역사상 최초로 올림픽에서 남북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이 구성되지만, 문제가 순탄치 않다.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지난 15일 "우리 선수들이 배제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우리 선수 23명은 그대로 유지되고 23명 플러스알파를 가지고 논의하는 것"이라고 안심시켰다. 하지만 논란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단일팀 구성과 관련해 1950년대부터 있었던 일들을 검토하면, 이 문제의 난이도를 짐작할 수 있다.
선례를 남긴 쪽은 동서독이다. 양측은 1955년 단일팀 구성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1956년 이탈리아 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1956년 호주 멜버른 하계올림픽, 1960년 로마 하계올림픽, 1964년 도쿄 하계올림픽에 동서독 단일팀이 참가했다.
단일팀 국호는 '독일', 국기는 오륜 마크 들어간 흑·적·황 3색기, 국가는 베토벤 교향곡 제9번이었다. 선수 선발 원칙은 '실력 위주'였다. 동서독 안배 없이 성적 우수자를 뽑기로 합의했다.
메달 수확도 만족스러웠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뒤로 독일이 처음 참가한 대회는 1952년 핀란드 헬싱키 대회다. 동독이 참가하지 않은 이 대회에서, 서독은 순위는 5위이지만 금메달은 하나도 획득하지 못했다. 은 7, 동 17이었다.
그에 비해 단일팀이 참가한 1956년 멜버른에서는 금 6, 은 13, 동 7로 종합 5위, 1960년 로마에서는 금 12, 은 19, 동 11로 종합 3위, 1964년 도쿄에서는 금 10, 은 22, 동 18로 종합 3위를 기록했다. 멜버른 대회 때는 금메달 개수가 한 자리 숫자이지만, 로마와 도쿄에서는 두 자리를 기록했다.
멜버른·로마·도쿄 성적은 패전 이전과 비교해도 좋았다. 패전 이전에 독일이 참가한 횟수는 총 10회다. 이 중, 멜버른 대회보다 성적이 좋았던 적은 두 번이다. 192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대회에서 금 10, 은 7, 동 14로 종합 2위, 주최국이었던 1936년 베를린 대회에서 금 33, 은 26, 동 30으로 종합 1위를 차지했다. 두 대회를 제외하면, 패전 이전의 기록은 멜버른 대회 때보다 저조했다. 실력 위주로 단일팀을 선발한 게 주효했던 것이다.
동서독 단일팀, 그리고 여러 가지 논란들 당시 동서독에도 논란이 있었다. 단일팀 구성 과정에서 금전적 협력이 진행되고 출전 엔트리가 감소하는 데 따른 것이었다. 2013년에 <한국체육사학회지> 제18권 제2호에 실린 김미숙·송병록의 '통일 독일 전, 동서독 스포츠 교류사'에서는 이렇게 설명했다.
"서독 내에서는 동독 지원에 불만이 제기되기도 했는데, 이는 스포츠 가치관의 차이, 국가대표 선수 간 경쟁구도의 심화, 동독팀에 대한 계속적인 재정적 지출 등으로 인한 것이었다." 이런 논란을 잠재운 요인들로는 멜버른 대회 4년 전인 1952년에 '스포츠 정치 평화 조약'(일명 1952 베를린 조약)을 체결하고 이를 바탕으로 체계적으로 체육 교류를 활성화했을 뿐 아니라, 실력 위주로 단일팀을 선발함으로써 양쪽 선수들이 승복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단일팀 구성은 독일에 보다 많은 메달을 선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양독의 스포츠 교류 활성화에 기여했으며 나아가 독일 통일에도 밑거름이 되었다. 그런데 왜 1964년 올림픽 때까지만 단일팀이 구성됐을까? 이 점은 잠시 뒤 다른 문제와 함께 일괄적으로 설명된다.
동서독 단일팀이 거둔 성과는 남북한에도 자극이 됐다. 1957년 12월에 북한이 1960년 로마올림픽에 단일팀을 내보내자고 제안한 뒤로, 남북한은 올림픽이 열릴 때마다 거의 매번 단일팀 문제를 논의했다.
하지만 독일에 비해 성과가 적었다. 2000년 호주 시드니 올림픽 때처럼 개회식 공동 입장은 성사시켰어도, 단일팀 구성에는 끝내 실패했다. 이번 평창 동계올림픽에서는 사상 최초로 단일팀이 구성되지만, 이것도 전체 종목이 아닌 일부 종목에 그치는 것이다.
하지만 올림픽 이외의 국제대회에서는 단일팀 구성이 성사됐다. 1991년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및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는 남북 단일팀이 참가했다. 청소년축구에서 8강 진출에 성공한 것도 대단하지만, 여자 탁구에서 거둔 단체전 우승은 온 민족에게 격한 감동을 선사했다. 남북한 각각의 힘으로는 어쩌지 못했던 중국 탁구의 장벽을 코리아 단일팀이 붕괴시킨 것이다. 2002년에 <체육사학회지> 제10호에 실린 정찬모의 '남북 체육교류의 역사와 발전 방향'에 이런 글이 있다.
"코리아 탁구 단일팀의 우승 장면이 텔레비전을 통해 남북한에 중계됨으로써 7천만 겨레에게 우리가 진정 한민족이라는 엄연한 사실과, 우리에게 왜 통일이 필요한 것인가를 가슴 깊이 느끼게 해주었다. 이러한 모습을 가리켜 언론은 '냉전 장벽에 탁구 구멍 뚫다'라든가 '코리아팀이 새긴 역사' 등의 표현을 써서 그 감격을 나타내기도 했다." 당시 단일팀이 구성될 수 있었던 것은 탈냉전 분위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공동응원을 계기로 신뢰 분위기가 형성되고, 이를 계기로 그 해 10월부터 남북체육회담을 열어 단일팀 준비를 진행했기 때문이다.
단체 구기 종목인 청소년 축구의 경우에는,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2차례 평가전을 치른 뒤에 단일팀을 구성했기 때문에 엔트리 축소로 인한 논란을 잠재울 수 있었다. 온 민족이 열광적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평가전을 치렀기 때문에, 탈락자 발생으로 인한 파장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일반 국제대회에서는 단일팀이 성사된 데 반해 올림픽에서는 그동안 성사되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다. 이 이유는 동서독 단일팀이 1964년까지만 구성된 것과도 관련된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올림픽 순위를 국가별로 집계하지 않지만, 참가국들은 '자기네 마음대로' 그렇게 한다. 금메달 숫자로 순위를 매기기도 하고, 메달 합계로 매기기도 한다. 이를 통해 어떻게든지 국력을 과시하려 한다. 국가들의 극성이 심한 탓에 이 문제는 학술적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2000년에 <한국레져스포츠학회지> 제4권에 실린 류준상의 '올림픽과 민족주의에 대한 연구'에 이런 말이 있다. 논문 제목 속의 '민족주의'는 내셔널리즘(nationalism)을 번역한 단어이므로 민족국가주의나 국가주의로 대치되어야 한다. 아래 인용문에 나타나는 것처럼 논문 저자가 '민족' 대신 '국가'를 사용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논문 저자 역시 국가를 지칭하는 의미로 민족주의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모든 국가들은 올림픽에 있어서 스포츠의 성공을 통해 국가의 명성을 높이고 국민들의 자존심을 높여 주고 경제적 능력과 국제사회에 있어서의 지위와 인정력을 강화시키고자 하고 있다." 이처럼 올림픽을 통해 국력을 과시하려 하기 때문에, 단일팀 협상에 임하는 국가들은 이 팀이 거두게 될 호성적이 자국 덕분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데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다.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단일팀을 구성하려다 보면 협상이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고, 한두 종목도 아니고 전체 종목에서 이런 식으로 협상이 진행되면 협상 타결이 요원해질 수밖에 없다. 이러니, 1957년부터 단일팀 협상을 해온 남북한이 아직 한 번도 전 종목에 걸쳐 단일팀을 구성할 수 없었던 것이다.
동서독이 올림픽 단일팀을 꾸릴 수 있었던 이유는? 그렇다면, 동서독이 1956년부터 1964년까지 올림픽 단일팀을 꾸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동독 측의 절박한 사정 때문이었다.
1950년대부터 소련을 위시한 공산권 국가들은 올림픽을 통한 체제 홍보의 유용성에 주목했다. 소련은 최초로 출전한 1952년 헬싱키 대회에서 금 22, 은 30, 동 19로 미국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헝가리는 금 16으로 종합 3위였다. 잘 먹고 잘 지원해야만 딸 수 있는 메달을 공산권 국가들이 많이 회득했으니, 공산주의에 대한 자본주의 국민들의 시선이 달라지지 않을 수 없었다.
동독은 스포츠 강국이었다. 그래서 올림픽에 나가면 소련 못지않게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장애물이 있었다. IOC가 동독의 독일 대표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동독이 올림픽에 나가려면, 독일 대표권을 가진 서독과 단일팀을 이루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1950년대 중반부터 단일팀 구성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같은 시기의 북한도 동독처럼 단일팀 구성에 적극적이었다. IOC가 인정하는 '코리아'는 대한민국뿐이었으므로, 대한민국과 단일팀을 이루지 못하면 올림픽 무대를 밟을 수 없었다. 하지만 동서독과 달리 당시의 남북한은 단일팀 구성에 실패했다. 동서독만큼의 체육교류가 없었던 것도 이유이지만, 1953년까지 전쟁을 치렀다는 점이 보다 더 결정적인 이유였다.
동서독이 1964년까지만 단일팀을 구성한 것은 그 후로는 동독이 단독 출전권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동독은 1965년에 IOC 회원국으로 인정됐다. 그래서 그 후로는 단일팀에 집착할 이유가 없었다. 이 때문에 단일팀 구성이 힘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서관으로 공산권 북방정책에 관여한 염돈재의 저서 <독일 통일의 과정과 교훈>에 이런 대목이 있다.
"동독은 문서상으로 완전하게 IOC에 가입되었고 1972년부터는 독자적인 국기·국가·휘장을 사용하며 단독으로 출전하게 되었다." 올림픽과 국가주의의 밀접한 관계 동서독 체육교류는 그 뒤에 더 활성화됐지만, 올림픽 단일팀만큼은 더 이상 구성되지 못했다. 올림픽과 국가주의의 관계는 그만큼 밀접하다.
북한은 1963년에 IOC 회원국으로 받아들여졌지만, 국호 문제 때문에 한동안 논란을 벌였다. IOC가 인정한 국호는, 북한이 요구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이 아니라 북한(North Korea)이었다. 이 때문에 북한은 회원국이 된 뒤에도 한동안 올림픽에 불참했다. 1969년에야 IOC는 DPRK란 국호를 승인했다.
만약 IOC가 1950년대부터 동독과 북한의 단독 참가를 인정했다면, 올림픽 단일팀 문제가 이슈화되기 힘들었을 수도 있다. 단독 출전이 불가능하다는 점이 두 나라를 단일팀 협상으로 밀어 넣었다. 그래서 두 나라가 단독 출전권을 얻은 뒤로는 단일팀 가능성이 한층 더 낮아졌다. 탁구와 청소년축구에서 남북 단일팀이 비교적 쉽게 구성된 것은 올림픽을 위한 단일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그간의 사정을 감안하면, 비록 전 종목 단일팀 구성은 아닐지라도 일부 종목에서 단일팀을 구성하게 된 것은 획기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환경이 확연히 달라진 것은 아니다.
평창 이후에도 남북한은 단일팀 문제로 계속 머리를 맞대게 될 것이다. 그런데 단일팀에 관한 한, 남북한은 1950년대 때보다, 또 탁구·청소년축구 단일팀 때보다 더 나은 환경을 만나기 힘들 것이다. 단일팀이 아니라도 각자가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으므로, 또 단일 국제대회가 아닌 올림픽은 국가적 위상과 직접 관련되므로, 전 종목에 걸친 단일팀 성사를 이루려면 앞으로도 계속 난관을 헤쳐가야 할 것이다.
1950년대보다 불리한 상황에서, 또 단일 국제대회보다 불리한 상황에서 앞으로 남북이 올림픽 단일팀을 이루는 길은, 양쪽 정부 및 체육 당국과 선수들이 1950년대보다도 훨씬 더 많이 양보를 하는 한편, 선수 엔트리 축소로 인한 파장을 최소화하기 위해 1991년 탁구·청소년축구 때 했던 것보다 훨씬 더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특히 엔트리 축소와 관련해서는, 불이익을 받게 될 선수나 관계자들이 깨끗하게 승복할 수 있도록 명분을 조성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