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대 동시지방선거일이 5개월이 채 남지 않은 시점에 기초의원(자치구·시·군의원) 선거구획정이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2인 선거구제를 4인선거구제로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이와 관련 2인 선거구제의 문제를 담은 글을 싣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다른 입장의 글도 환영합니다. [편집자말] |
"무투표 당선이라며? 축하해."
제6회 전국동시 지방선거 후보 등록을 마감한 2014년 5월 16일 저녁, 서울 은평구선거관리위원회는 공명선거와 공약 실천을 다짐하는 '매니페스토 실천 협약식'을 열었다. 많은 출마자들이 선관위 사무실로 모인 가운데, 일부 출마자들 사이에서 매우 '이례적인' 축하 인사가 오갔다.
후보 등록만으로 당선이 확정된 어느 출마자는 머쓱함과 동시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고, 다른 후보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이후 선관위 직원이 출마자 현황을 공개하면서 무투표 당선은 이날 화제의 중심이 됐다.
서울 은평구 기초의원 8개 선거구 중 가·나·다 등 3개 선거구(모두 2인 선거구이다)에서 당시 새누리당 후보와 새정치민주연합 후보 2명만 등록해 투표 없이 당선이 확정됐다. 비례대표 역시 무투표 당선이 결정됐다. 19명의 의석으로 구성되는 서울 은평구의회에서 42%에 해당하는 8명이 무투표 당선자였다.
충격적인 결과였다. 출마자 입장에서 선거 경쟁 없이 정당 공천과 후보 등록만으로 당선이 확정된 것은 기쁜 일이겠지만 유권자 입장에선 매우 불행한 일이었다. 은평구 가·나·다 선거구 유권자들은 자신들의 대표를 선출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후보들의 자질과 능력, 공약 등을 꼼꼼히 신중하게 살펴보고 선택할 기회를 잃었다. 심지어 선거 벽보를 통해 후보들의 얼굴조차 접할 수 없었다. 마치 조선왕조시대 백성들이 왕이 보낸 고을 수령을 맞이하듯 지역에서 유세를 떨치는 두 정당이 파견한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2인 선거구 쪼개기 → 거대 양당 독점 체제 → 무투표 당선
2005년 공직선거법이 개정됐다. 한 선거구에서 4인까지 뽑는 중선거구제와 정당공천제가 도입됐다. 덕분에 지방정치와 지방자치의 발전으로 이어질 것이란 기대가 생겼다. 토호들이 장악한 동네정치판이 정당의 책임정치로 진화할 것이란 기대, 진보정당의 의회 진출로 보수적인 지방의회에서도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의제들이 다뤄질 것이란 희망이었다.
하지만 그해 겨울 4인 선거구가 모두 2인 선거구로 쪼개졌다. 그로 인해 거대 양당의 지방의회 독점 체제가 등장했다. 기초의회에 대한 주민들의 불신이 아무리 높아도 거대 양당의 독점 구조는 그대로 유지됐다.
개정 공직선거법이 적용된 2006년 제4회 전국동시 지방선거 이후 은평구 기초의원 선거에서 단 한 번도 군소정당이나 무소속 후보가 당선된 사례가 없다. 그만큼 거대 양당의 공천은 당선의 절대적 조건이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과 좋은 공약이 있다 해도 거대 양당의 공천이 없다면 출마는 무모한 도전일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무투표 당선은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선거경쟁 구도는 점점 낮아질 수밖에 없다. 2006년 은평구 기초의원 선거에서 55명이었던 출마자 수가 2010년 39명, 2014년 33명으로 줄어들었다. 무투표 당선은 은평구만이 아니라 서울 전체에서 나타났다. 2006년 0명, 2010년 2명, 2014년 26명 등 무투표 당선자는 점차 증가하는 추세다.
정당 수의 변화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하지만 거대 양당의 독점 구조가 주요 원인이라는 점은 부인하기 힘들어 보인다. 2014년 선거에서 아선거구(대조·역촌동)가 많은 주목을 받았다. 인구 증가로 인해 의원 정수가 1명이 늘어 아선거구는 은평구에선 처음으로 3인 선거구가 됐다. 역대 선거 중 가장 많은 후보(9명)가 아선거구에 출마했고, 치열한 선거전이 펼쳐졌다.
주민 눈치 보지 않는 지방의회
어찌 보면 무투표 당선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이유도 없다. 기초의원 선거는 투표가 큰 의미가 없는 선거가 됐다. 투표하건 하지 않건 간에 공천만으로 당선은 확정적이기 때문이다. 두 정당은 의회를 양분하고 있으며, 어느 정당이 1석을 더 차지하느냐의 변수만 있을 뿐이다. 그들이 장악한 지방의회에 대한 싸늘한 민심과 무관하다. 역동적인 우리나라의 정치 지형에서 절대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지방의회일 것이다. 거대 양당의 독점 체제는 지방의회를 민심의 사각지대로 만들어 버렸다.
2014년 지방선거가 있기 전, 지방의회 민낯을 보여주는 사건이 터졌다. 의원들이 외유성 연수를 다녀와서 보고서마저 어느 지방의회의 보고서를 그대로 베낀 것이다. 주민들의 성난 민심은 주민감사청구로 이어졌다. 서울시의 감사 결과, 사전심의부터 여행보고서 작성까지 문제가 하나둘이 아니었다. 임기가 끝난 공무국외 여행 심사위원들이 심의했고, 그 심의위원들은 외유성 연수로 일정이 짜여 있음에도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심의 회의록과 여행보고서 게시 의무 등 의원들이 직접 만든 공무국외 여행 조례마저 위반했다. 업무추진비를 직원격려금으로 지급한 뒤 의원 여행 경비로 사용하는 편법도 썼다. 해외시찰에는 써서는 안 되는 의회사무국 예산도 부당하게 썼다.
문제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여행을 다녀온 의원 누구도 사과하지 않았다. 선거 이후 새롭게 구성된 구의회 의장이 공식 사과를 했다. 새로운 의원들이 외유성 연수 문제를 해결하고자 의욕을 보였고 조례도 일부 개정했다. 하지만 조례는 조례일 뿐이었다. 비판적인 시민단체의 위촉은 배제한 채 거수기 역할을 하던 기존 심의위원을 재위촉했다. 형식적인 절차는 지켜졌지만 내용에 있어 외유성 해외연수라는 점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2010년 이후 지방자치에 참여민주주의가 도입되고 있다. 주민참여 예산제 등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실험들이 이뤄지고 있다. 최근에는 민관협치가 지방자치의 주요 과제로 떠오르면서 민간과 행정의 교류가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반면 민의의 전당이라는 의회는 이런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실정이다. 의회의 가장 큰 역할과 권한은 조례제정권이다. 주민들의 뜻을 모아 조례를 제정하는 것은 의회의 의무이기도 하다. 이를 위한 기초적인 과정인 입법공청회나 의제 중심의 토론회를 구의회가 한 번도 개최한 적이 없다는 점은 지방의회의 현주소라고 할 수 있다.
3~4인 선거구 확대, 지방자치 변화를 바라는 주민들의 염원최근 은평구에서 구청이 주도하는 지방분권개헌 촉구 서명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은평구의회도 작년 말 지방분권개헌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재정과 자치입법에 있어 더 많은 권한을 지방정부와 지방의회에 주자는 게 지방분권의 목표는 아닐 것이다. 지방자치에 더 큰 힘을 실어줌으로써 주민들이 권한을 갖게 하자는 것이다. 모세혈관을 타고 피가 몸 전체를 돌아야 건강하듯 주민들과 밀착된 풀뿌리 자치로 국민의 권리가 실현돼야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취지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지방정치와 지방의회가 바로 서야 한다. 공천권자에게 충성하는 게 아니라 주민들의 눈치를 보며 의정을 펼치는 의회가 돼야 한다. 주민들의 다양한 목소리가 의회를 통해 행정에 반영될 수 있어야 한다. 4년마다 찾아오는 선거에서조차 주민들의 평가를 받지 않는다면, 그런 지방의회가 과연 주민들을 신경쓸까? 무투표 당선과 공천만으로 당선되는 선거를 통해 구성된 지방의회에 과연 희망을 품을 수 있을까?
선거구 개편 없는 지방분권이 국민의 권리 확대로 이어질 수 있을까? 3~4인 선거구 확대만이 주민의 지방정치 참정권을 보장하는 길이다. 선거구 개편은 지방자치의 변화를 바라는 주민들의 간절한 염원이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정치개혁은평행동 운영위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