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계 스포츠에 대한 전 세계인의 공감을 연결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모든 세대가 참여할 수 있으며..." 평창올림픽 조직위원회는 슬로건 '하나된 열정(Passion Connected)'의 의미를 이 같이 설명합니다. <오마이뉴스>는 평창을 바라보는 경기장 밖 수많은 열정들을 소개합니다. 그들의 이야기가 하나된 공간에 모여 평창올림픽이 너, 나, 우리 모두의 올림픽이 되길 기원합니다. [편집자말] |
"정말 기대 밖이었죠."신한용 개성공단기업협회장은 올해 첫날을 떠올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날 신 회장은 자신의 회사가 있는 충남 예산의 가야산을 오르고 있었다. 원효대사가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은 곳으로 알려진 산이다.
새해 첫날, '신년에는 모든 일이 잘 풀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가야산을 찾았던 신 회장은 하산 도중 전화 한 통을 받았다. 평소 알던 기자가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신년사를 발표했는데, 앞으로 좋은 소식이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전해온 것이다(관련기사 :
"평창 올림픽 돕는 건 응당한 일... 북남 당국 시급히 만날 수 있을 것").
"(북한이) 그렇게까지 할 거라곤 생각 못했어요. 우리도 곧장 대응하고, 북쪽에서 다시 대응하고... 결국 9일에 남북고위급회담이 열렸잖아요. 열흘도 안 돼서 지난 10여 년을 뛰어넘는 전기가 마련된 겁니다."
개성공단 문이 닫힌 지 2년. 그 동안 기업들은 여러 차례 방북을 신청했으나 단 한 차례도 개성공단에 가지 못했다. 공장에 두고 온 제품과 자재가 어떤 상태로 남아있는지 한번만이라도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절절하다.
이런 상황에서 평창동계올림픽이란 기회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지난 17일 서울 영등포구 개성공단기업협회 사무실에서 만난 신 회장은 "우리나라가 올림픽과 참 인연이 많은 것 같다"라며 옅은 미소를 내보였다.
"이제 70년 굴레 벗어던져야"
신 회장은 대뜸 "굴렁쇠 소년, 그 정도의 나이이신가요?"라며 기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굴렁쇠 소년'이 잠실주경기장에 굴렁쇠를 굴리며 등장하던 모습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남아 있다. 기자가 "딱 1988년생입니다"라고 답하자, 신 회장은 "아주 중요할 때 태어났네요"라며 말을 이어갔다.
"당시 노태우 정부였거든요. 군사정권이라고 해서 데모도 많이 했을 땐데, 그 정부에서 올림픽 전에 전격적으로 북방정책을 시행했어요. 직전 하계올림픽이 1984년 LA올림픽이었고, 그 전이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이었잖아요? 둘 다 반쪽짜리 올림픽이 되고 말았죠. 한창 냉전시대일 때라 동서가 갈라져 있었기 때문에, '너네가 올림픽 하면 우리는 안 가'라는 식이었죠."의도가 어땠든 당시 노태우 정부는 올림픽에 사활을 걸었고, '반쪽 올림픽' 딱지가 붙지 않도록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노태우 대통령이 직접 "참가하는 모든 국가 선수와 임원의 안전을 보장한다"라고 말할 정도로 소련 등 동구권 국가의 참여를 호소했다. 신 회장이 말한 북방정책은 그런 맥락에서 시작됐다.
"우리가 한강의 기적을 이야기했지만, 서울올림픽 당시 국민소득이라고 해봐야 2500달러였습니다. 근데 북방정책과 올림픽을 계기로 30년 만에 3만달러를 바라보는 시대가 됐잖아요. 그 동안 정권이 바뀌고 최근 개성공단까지 폐쇄돼 버렸지만 어쨌든 서울올림픽이 남북관계 개선과 그에 따른 경제발전에 기폭제가 된 겁니다."신 회장은 "개성공단은 물론 남북관계가 다 막힌 상태에서 30년 만에 다시 올림픽을 치르게 됐다"라며 "서울올림픽을 거울삼아 평창올림픽을 다시 점프할 수 있는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지난 10년 동안, 우리는 북한이란 변수를 전혀 활용하지 못했다"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북한을 활용하지 못하면 한강의 기적은 여기서 끝나 버립니다. 우리의 행복도 마찬가지죠. 평창올림픽을 토대로 한강의 기적을 넘어 대동강의 기적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이제 좀 70년의 굴레를 벗어던져야 하지 않겠습니까."그러면서 신 회장은 북한의 평창올림픽 참가 등에 비난의 화살을 던지는 일부 야권 및 보수 세력을 향해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데, 남 탓만 하고 있으면 국가적으로도 큰 마이너스다"라고 일침을 가했다.
"북방으로 문을 열어야 한다는 건 노태우 정부부터 30년 동안 줄곧 이어져왔던 겁니다. 색깔만 조금 달랐지 기조는 다 같았어요. (박근혜 정부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와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DMZ 세계평화공원도 마찬가지예요. 지금 평창올림픽에 비난의 시선을 보내는 이들은 모두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인 거죠. 평창올림픽도, 개성공단도 그 의미를 생각해야지 고정관념으로 폄하해선 안 됩니다.""주경기장에 개성공단 홍보관 연다"신 회장은 개성공단 폐쇄 후 지난 2년을 "길게 느껴지지 않은 시간"이라고 떠올렸다. 그는 "2년이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지금도 모든 기업이 그야말로 경영 정상화를 위해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다"라며 "때문에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2년을 보냈다"라고 토로했다.
개성공단기업협회가 정부에 제출한 피해 규모는 대략 1조 5000억원이었다. 피해 규모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늘어가고 있다. 하지만 최근 문재인 정부의 추가지원금 660억원을 합하더라도, 그 동안 개성공단 기업에게 지급된 지원금 규모는 피해액의 1/3 정도에 그친다. 그만큼 지난 2년은 그들에게 "정신없는" 시간이었고,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한 남북관계 해빙은 단비 같은 소식이었다.
신 회장은 평창올림픽 기간 동안 세 가지 일을 계획하고 있다. 하나는 주경기장에 개성공단 홍보관을 여는 것이고, 둘은 직접 응원단이 되는 것이며, 셋은 다시 방북을 신청하는 것이다. 특히 이번만큼은 꼭 방북이 허용돼 개성에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올림픽 기간 중) 우리가 개성도 가고, 쌍방으로 교류도 있어야 올림픽을 향한 기대도 높아지고 올림픽 성공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 그리고 올림픽 이후에도 우리가 개성을 다녀온 것과 안 다녀온 것에 큰 차이가 있을 거예요. 방북은 남북 모두 승인해야 하는 거잖아요. 그것 자체가 (남북이 관계 회복을 위해) 운을 뗐다는 것이고, 올림픽 이후 속도를 내는 데 큰 힘이 될 것입니다."이어 신 회장은 "우리가 이번 올림픽을 잘 치러야 하는 건 국가적 대명제가 됐다"라며 "개성공단기업협회도 우리의 요구를 천방지축으로 하지 않고 국가의 이익이 무엇인지 고려하며 접근하겠다"라고 덧붙였다.
인터뷰 말미, 신 회장은 "초코파이" 이야기를 꺼냈다. 초코파이는 개성공단에서 일하던 북한 노동자들에게 최고 인기 간식이었다.
"(개성공단 입주 후) 처음 1, 2년은 말 그대로 서로 벌레 보듯이 했었거든요. 우리도 평생 교육을 그렇게 받아 와서... 그런데 지나고 나니 그렇지 않더라고요. 말은 안 해도 무언의 표정에서 나름의 정을 느꼈죠. 뭐니 뭐니 해도 초코파이 하나를 더 주네, 덜 주네로 실랑이했던 때가 생각나네요. 지금도 눈에 아련해요. 먼 친척의 이름과 얼굴은 생각 안 나도, 개성공단에서 함께 일하던 사람들은 아직도 선명히 기억납니다. 저뿐만 아니라 다 그럴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