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RA에서 만난 장면나는 2004년 2월부터 2017년 10월까지 모두 네 차례 약 90일간 미국 메릴랜드 주 칼리지파크의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과 버지니아 주 남단 항구도시 노퍽에 있는 맥아더 기념관을 방문해 한국현대사 관련 사진 2000여 점을 수집했다.
그곳에 소장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진 가운데 우리나라 현대사에 꼭 필요한 사진을 검색해 오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인물보다 사건 중심으로, 사진을 검색하는데 장면 전 총리의 사진이 더러 눈에 들어왔다.
1899년 서울에서 태어난 장면은 아버지의 근무지인 인천에서 자라며 인천성당 부설 박문학교를 다녔다. 이어 수원 농림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에서 유학했다. 그는 정치가가 되겠다는 꿈을 조금도 가져본 적이 없었단다. 그래서 미국 뉴욕 맨해튼 가톨릭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면서 부전공으로 교육학을 공부했다. 그는 미국에서 돌아온 이후 줄곧 교육자로 살다가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정치에 입문하게 된 건 그의 자의가 아니었다. 주한 미 주둔군 하지 사령관이 노기남 주교를 불렀을 때 장면이 통역을 맡았다. 그때 장면의 유창한 영어를 들은 하지는 그를 1946년 미군정 자문기관인 '민주의원'에 지명했다.
1948년 5.10 총선거 때 그는 무소속으로 종로 을구에 출마해 당선했다. 제헌 국회의원이 된 지 석 달 만인 1948년 8월 11일, 그는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에게 유엔총회 한국 대표로 발탁됐다. 곧이어 한국 수석대표가 된 장면은 1948년 12월 8일,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이 한반도 내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받았다. 그 공로로 초대 주미대사에 발탁됐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장면 주미대사는 미 상·하원을 찾아다니면서 한국 파병을 역설해 이를 실현시켰다. 그해 11월 23일, 그는 느닷없이 제2대 국무총리로 지명돼 국회 인준을 받았다.
장면 부통령1956년, 그는 민주당 최고위원에 선출됐다. 그리고는 그해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부통령 후보자로 지명됐다. 정·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신익희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 후보에 출마했다. 대통령 후보 신익희가 선거 직전 급사한 가운데, 이승만의 러닝메이트였던 자유당의 이기붕을 20만여 표의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제4대 부통령에 당선했다.
그해 8월 15일, 정·부통령 당선자 취임식에서 이승만은 그를 노골적으로 견제했다. 취임식장에서 장면이 앉을 좌석을 부여하지 않았고, 취임사 발표 시간조차도 주지 않았다. 그날 장면은 간단한 성명서로 취임사를 대신하는 수모를 겪었다. 당시 대한민국 헌법을 보면 대한민국의 부통령은 참의원의 의장을 겸했다. 헌법상 그는 참의원 의장을 겸할 수 있었으나, 야당 인사가 부통령이 되면서 자유당 정부는 참의원 구성을 허용해주지 않았다.
그는 부통령 재직 중이었던 1956년 9월 28일 시공관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 참석했다가 암살미수라는 봉변을 당했다. 후일 장면은 저격범 7인에 대해 관용을 베풀어줄 것을 탄원, 그들은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1959년 11월 민주당 전당대의원대회에선 대표최고위원에 당선했다. 11월의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자 경선에서 조병옥에게 석패해 다시 부통령 후보자로 지명됐다. 1960년 3월 치료차 도미한 조병옥이 대선을 앞두고 미 육군병원에서 수술 중 사망해, 그는 부통령 후보로 홀로 유세를 하게 됐다.
제2공화국 장면 내각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에 '3인조' '9인조' 등 대대적인 부정선거로 낙선했다. 3·15 부정선거로 전국에서는 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는 시위가 발생했다. 그해 4월 19일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등지에서 최대의 항의 시위가 일어났다. 연일 계속되는 시위로 4월 26일, 마침내 이승만 정권이 무너졌다. 그해 6월, 내각책임제를 채택한 새 헌법이 제정되고, 7월 29일 총선거를 거쳐 그해 8월 23일 대한민국 제2공화국 장면 내각이 출범했다.
그런데 장면 내각은 안정적인 환경에서 정치를 하지 못했다. 정권 출범 후 줄곧 데모가 밤낮으로 이어졌다. 심지어 데모를 그만하자는 데모까지 등장할 정도였다. 게다가 군부의 쿠데타 설도 난무했다. 하지만 장면은 그런 제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4.19 혁명으로 탄생한 새로운 민주정부의 통과의례로 여겼다.
1961년 5월 6일 장면은 민주당의 한 의원으로부터 쿠데타 음모의 결정적 제보를 받았다. 제보를 받은 장면은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에게 물었다.
"장 총장, 군부의 쿠데타 설이 있는데 어떻게 된 일인가?" "천만에 말씀입니다.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 제가 (육군참모총장에) 있는 동안은 그런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한편, 장면은 이태희 검찰총장에게도 쿠데타 음모에 대한 조사를 지시했다. 그러자 이태희 검찰총장은 5월 13일 군부대 사이의 전화를 감청하던 경찰로부터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다는 군부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뒤 당시 장면 총리가 묵고 있는 반도호텔을 찾아가 이 사실을 보고했다.
장면은 또다시 장도영을 즉시 불러들였다. 호출을 받은 장도영은 그 말에 펄쩍 뛰었다.
"모두 공연한 모략입니다. 아무 염려 마십시오. 제가 육군참모총장에 있는 동안은 절대 그런 일은 없습니다."장면은 주한 미8군 사령관 매그루더가 천거해 발탁한 그의 말을 믿었다. 또, 미국을 철석같이 믿었다.
쿠데타로 실각1961년 5월 15일, 그날도 장면은 장도영 참모총장의 말을 믿으며, 평상시와 다름없이 집무했다. 이튿날 새벽 2시, 장도영은 반도호텔 총리 경호실로 긴급 전화를 걸었다.
"30사단에서 장난하려는 것을 막아놨다. 지금 해병대, 공수부대가 입경하려는 것을 한강에서 제지시키고 있다. … 아무 염려 마시고 그저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만 알고 계십시오."여전히 무사하다는 말이었다. 얼마 후 곧 총성이 요란하게 들렸다. 그제야 장 총리는 신변에 위험을 느꼈다. 장 총리는 경호원만 대동하고 우선 반도호텔 건너편 미 대사관으로 갔다. 하지만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몇 차례 문을 두드려 봤지만 끝내 대답이 없었다. 장 총리 일행은 다급하게 무교동 골목을 빠져 청진동을 거쳐 한국일보사 건너편 미 대사관 사택의 문을 두드렸다.
어떤 엄명이 내려졌는지, 거기서도 굳게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우선 피신할 곳이 급했다. 그때 장 총리의 머리에는 혜화동 카르멜 수녀원이 떠올랐다. 장 총리를 태운 차는 수녀원으로 갔다. 장 총리 부인과 평소 친교가 있었던 원장은 다행히 문을 열어줬다. 장 총리는 수녀원의 방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그날 새벽 수녀원에 잠복한 장면은 외부와 접촉을 끊음으로써 행방불명의 존재가 됐다. 장면은 수녀원에서 최후의 순간까지도 미국을 굳게 믿으면서 어떤 후속조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장면은 미국을 잘 알면서도 사실은 미국을 잘 몰랐다. 미국은 자기들 국익에 도움이 되는 자와 손을 잡는다는 것을. 그 당시 미국은 한국의 안보를 몹시 불안하게 보고 있었다. 미 군부로서는 새로운 카드가 필요했다.
세 번 '발등'을 찍히다주한 미8군 사령관 매그루더는 미국 본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웬일인지 미 국무부는 불개입을 표명했다. 그린 대사의 말은 군 통수권을 가진 대통령이 동의하지 않고, 국정 책임자인 총리가 행방불명인 상태에서 미국이 독단으로 뭔가를 도모할 수 없다는 원론적인 이야기였다.
장면은 수녀원에서 38시간 동안 잠적한 채, 미국의 도움을 기다렸지만 끝내 냉담한 반응, 그리고 윤보선 대통령의 쿠데타 추인과 "올 것이 왔다"라는 발언 소식을 접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했던가. 장면은 자기가 그렇게 믿었던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에게, 그동안 자기를 후원해 준 미국에게, 한때는 한솥밥을 먹었던 윤보선 대통령에게 배신당하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수녀원에서 자기 발로 걸어 나왔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내각 총사퇴서를 발표했다. 그렇게 우리나라 최초의 내각책임제 장면 민주당 정권은 역사 속으로 그만 사라지고 말았다.
그의 실각은 대한민국의 불행이요, 곧 한국정치를 한 세기 후퇴시킨 일로 평가된다. 언젠가는 바른 역사 발전을 위해 민주당 장면 내각을 재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는 무능한 정치인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신봉했기에 권좌에서 밀려났다고 보는 게 올바른 평가가 아닐까?
(* 이번 회는 한국전쟁 초기의 피란민 사진으로 꾸며봤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강준식 저 <대한민국의 대통령들>(김영사)을 참고해 작성됐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