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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11월 13일 오전 서울 마포구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 앞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 기증식이 열리고 있다.
지난해 11월 13일 오전 서울 마포구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 앞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 기증식이 열리고 있다. ⓒ 이희훈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잡은 박정희는 이듬해인 1962년 개헌을 단행했다. 4·19민주혁명을 통해 만들어진 당시 헌법은 내각책임제적 요소를 대거 도입해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 또는 분산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5·16 헌법은 모든 권력을 대통령에 집중시켰다. 대통령의 임기는 4년 중임으로 고쳐졌다. 박정희는 자신이 개정한 헌법을 통해 1963년 12월 대통령에 취임 후 4년씩 두 차례에 걸쳐 8년 동안 대통령에 재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박정희는 8년에 만족하지 못했다. 계속 대통령 자리에 있고 싶었지만 대통령의 3선을 금지한 헌법이 문제였다. 결국 박정희는 3선에 도전하기 위해 다시 헌법을 고쳤다. 하지만 박정희의 3선은 순탄치 않았다. 박정희가 헌법을 개정하면서까지 3선에 도전하자 야당에서는 40대 기수론을 내세워 김영삼과 김대중이 부각시켰다.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는 선거비용으로 600~700억 원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당시 국가 예산의 10%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노골적으로 지역감정을 부추기기도 했다. '신라 임금을 뽑자'는 선동이 있었고, 심지어 "김대중 후보가 정권을 잡으면 경상남도 전역에 피의 보복이 있을 것이다"라며 공포심을 조장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박정희는 634만 2,828표(53.2%)를 얻어 539만 5,900표(45.3%)를 얻은 김대중과 약 8% 차밖에 나지 않았다. 선거에서 패배할 위기까지 몰렸던 것이다.

영구집권을 위해 사법부 길들인 박정희

당시만 해도 정치 신인에 가깝던 김대중에게 대통령 자리를 내어줄 뻔했던 박정희는 영구집권을 위해 권력을 더욱 공고화 시키고자 했다. 사법부는 그러기 위해서 가장 먼저 손봐야 할 대상이었다. 당시 몇몇 신념 있는 판사들에 의해 공안사건에 대한 무죄판결이 이어지고 있었다. 특히 서울지법 형사부 이범렬 부장판사와 최공운 판사는 잇따른 무죄판결로 공안당국에게 미운털이 박힌 상황이었다.

1971년 7월 28일 새벽, 서울지법 당직 판사실에 구속영장이 청구됐다. 피의자는 이범렬과 최공운 판사였다. 증인조사를 위해 출장을 가면서 변호사에게 교통비와 숙박비 등으로 9만 7000원을 받았다는 이유였다. 위법성의 소지는 있었지만 당시 검증을 신청한 변호인이 형사 사건에서 소요되는 경비를 보전하는 것은 관례였다. 누가 봐도 공안당국에 미운털이 박힌 판사에 대한 탄압이었고 사법부에 대한 길들이기였다.

당연히 영장은 기각되었다. 서울지법 형사부 판사 37명은 박정희 정부의 사법부 길들이기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무더기로 사직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검찰은 이튿날 영장을 재청구했다. 심지어 이 부장판사를 미행하기까지 했다. 이번에는 전국에 있는 판사의 3분의 1이 넘는 153명이 사법권의 독립을 외치며 사직서를 내던졌다. 판사들의 집단 반발은 박정희가 판사들에 대한 수사를 중지시키고 관련 검찰 관계자를 인사이동 시키고 나서야 진정되었다. 제1차 사법파동이다.

신군부 권력을 정당화해준 대법원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등 신군부는 김재규의 10·26 사건에 관여되었다며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 겸 비상계엄사령관을 체포하는 12·12 사건을 일으켰다. 신군부는 정승화를 내란방조죄 혐의를 씌워 군사법원 재판에 회부했다. 정승화는 민간법원인 대법원에서의 재판을 포기했고 이로써 그에 대한 내란방조죄는 확정됐다. 그러나 정승화는 1997년 문민정권이 들어선 이후 서울지방법원에 재심을 청구했고 결국 무죄를 받아냈다.

신군부는 김재규에게도 내란목적살인죄를 적용했다. 내란죄는 국토를 참절하거나 국헌문란을 목적으로 폭동을 일으킬 때 성립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박정희를 살해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김재규가 폭동을 일으켰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어떠한 증거도 없었다. 김재규의 상고 이유 역시 계획된 내란 음모·예비도 없었고 한 지방의 평온을 해할 만한 폭동도 없었으며 국헌문란의 목적 또한 없었다는 것이었다.

김재규의 상고 이유에 대해 민문기 등 6명의 대법관들은 "아무리 대통령이 피해자가 된 살인 사건이라 하더라도 이를 당연히 내란목적이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라는 소수의견을 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대법원은 1980년 5월 20일 김재규를 내란목적살인으로 처단한 고등군사법원의 판결을 확정했다.

신군부는 김재규의 유죄에 매우 민감했다. 소수의견을 제출한 재판관들은 살아있는 권력에 대항한 것이었고 결국 타의에 의해 대법원을 떠나야 했다. 반면 김재규의 유죄를 이끈 유태흥 대법관은 신군부 통치 하에서 대법원장에까지 올랐다. 하지만 신군부가 김재규의 유죄에 민감했던 것은 그가 박정희를 살해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신군부는 정승화를 내란방조죄로 체포하여 처벌함으로써 권력을 장악했다. 그런데 김재규에 대한 내란목적살인죄가 무죄라면 정승화에 대한 내란방조죄 역시 부정될 수밖에 없었다. 정승화를 체포한 명분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신군부의 12·12사건은 단순한 군사 쿠데타에 불과하게 되고 그들은 권력의 정당성을 잃고 마는 것이었다. 신군부는 자신들의 군사 쿠데타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김재규의 유죄가 반드시 필요했고 소수의견을 낸 6인의 대법관은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사법부의 협조가 없으면 권력을 장악할 수 없다

2017년 9월 11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이낙연 국무총리는 삼권분립을 명확히 설명해 주목을 받았다. 황주홍 국민의당 의원의 "한국은 삼권분립 국가가 아닌 제왕적 대통령 1인제 국가"라는 언급에 "조금 전에 삼권분립을 체험하지 않았나"라고 답변한 것이다. 대통령이 지명한 헌법재판소장 후보자의 인준이 국회에서 부결된 것을 지칭한 발언이었다. 헌법재판소장 임명동의안 부결에 대한 행정부 수장인 대통령의 임명권에 대한 입법부인 국회의 견제라는 명쾌한 해석이었다.

헌법은 대한민국의 권력을 입법, 행정, 사법으로 나눠놨다. 이른바 삼권분립이다. 삼권분립은 국가권력의 작용을 입법·행정·사법의 셋으로 나누어 상호간 견제와 균형을 유지시킴으로서 국가권력의 집중과 남용을 방지하려는 통치조직원리다. 특히 사법부는 삼권분리에서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한다. 행정부와 입법부 간 균형이 흐트러져 권력이 한쪽으로 쏠린다고 해도 사법부에서 올바른 판단을 해준다면 독점권력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은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박정희와 전두환이 사법부를 길들이기 위해 애썼던 이유였을 것이다.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위해 사회를 반공 이데올로기의 공포 속으로 몰아넣는 데 공안사범에 대한 사법부의 잇따른 무죄는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10·26을 내란으로 몰아가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에게 김재규의 내란목적살인죄의 성립을 부정하는 대법관들은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대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박정희 정권을 향해 집단적으로 사직서를 내던진 판사들과 김재규의 내란목적살인죄를 부인한 6명의 대법관의 행동은 사법권의 독립만이 아닌 대한민국의 권력이 특정 개인에게 집중되는 독재를 막고 삼권분립을 지켜내려던 움직이었던 것이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재직하던 2016년 3월 28일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심의관이 작성한 '사법행정위원회 위원 후보자 검토' 관련 문건. 후보자 추전 명단 중 1순위는 적색, 2순위는 청색, 3순위는 흑색으로 분류돼 표기돼 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재직하던 2016년 3월 28일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심의관이 작성한 '사법행정위원회 위원 후보자 검토' 관련 문건. 후보자 추전 명단 중 1순위는 적색, 2순위는 청색, 3순위는 흑색으로 분류돼 표기돼 있다. ⓒ 참여연대 공개 자료

지난 9년간의 적폐, 사법부도 공범?

근래 한국사회 최대의 이슈는 '적폐청산'이다. 앞으로 밝혀져야 할 것이 훨씬 더 많이 남았겠지만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 보아도 이명박, 박근혜 정부 9년간 한국 사회는 권력 독점에 의한 심각한 부작용 속에 살아왔다. 그런데 박정희와 전두환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권력의 독점은 사법부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하다.

최승호 MBC사장이 해직언론인 시절에 만든 영화 <자백>은 민주화 정권이라 생각되었던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도 얼마나 많은 간첩조작사건들이 있어왔는지 보여준다. 이 역시 사법부가 공정하게, 아니 최소한 검찰의 증거를 면밀하게 들여만 봤어도 대부분 막을 수 있는 사건들이었다. 사실상 사법부가 정권의 공안조작에 동조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이 외에도 노동, 경제, 사회 등 다양한 분야에서 보수화된 판례들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판결이 거듭됨에도 일부 보수적인 판사들의 개인적 일탈이겠지, 대형 로펌을 동원한 사측의 전략·전술의 승리겠지 하는 것이 대부분 국민들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설마 사법부가 권력의 견제를 포기한 것은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마지막 희망이었고 이 땅의 민주주의에 대한 마지막 기대였을 것이다. 하지만 설마 했던 국민들의 기대가 송두리째 뽑혀나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 24일 김명수 대법원장은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의 PC에서 특정 판사 동향 자료와 '원세훈 전 국정원장 재판에 대한 청와대와의 교감' 의혹 문건이 발견된 것과 관련해 국민들에게 사과했다. 김 대법원장은 법원 구성원과 국민들에게 드리는 입장문에서 "이번 일이 재판과 사법행정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크게 무너뜨리고 있음을 직시하고 있다"며 "저 역시 참담한 심정이며 대법원장으로서 마음 깊이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의혹으로만 떠돌던 사법부 블랙리스트의 존재가 처음으로 밝혀진 것이다.

대법원이 일선 판사들의 동향을 조사했다는 것 자체로 그것은 블랙리스트다. 실제로 법관 인사에 반영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대법원이 자신의 성향을 조사했다는 사실 만으로 판사들은 큰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 부담이 재판의 결과에 영향을 미칠 것은 당연하다.

협조를 거부해 조사하지 못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장 PC와 암호가 설정돼 확인하지 못한 파일들에 대한 조사까지 이뤄진다면 사법부 블랙리스트의 규모가 어디까지 확대될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더욱이 국정원을 불법적으로 대통령 선거에 동원한 혐의를 받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재판함에 있어 대법원이 청와대와 교감했다는 의혹은 사법권의 독립을 뿌리째 훼손시킬 수 있는 행위다.

대한민국은 수십 년의 군부독재 정권을 경험한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독재의 역사에는 언제나 정권의 사법부 길들이기가 있었다. 사법부가 두 눈을 부릅뜨고 권력을 견제하는 한 그 누구도 권력을 독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법부 블랙리스트는 사법부 적폐다. 그리고 우리는 사법부 적폐는 필연적으로 권력의 독점으로 이어질 수밖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 알고 있다.

김명수 대법관은 '사법부 블랙리스트' 추가조사위원회의 조사를 통해 이번 문제를 명확히 밝혀내겠다고 다짐했다. 국민들은 김명수 체제의 대법원이 과연 스스로 사법부 적폐를 청산할 수 있을지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봐야 한다. 박정희, 전두환 그리고 박근혜와 이명박에서 알 수 있듯 사법부 적폐 청산은 사법부만의 일이 아닌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근본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광민 변호사는 부천시청소년법률지원센터 소장으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블랙리스트#적폐청산#사법부#대법원#김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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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사무소 사람사이 대표 변호사다. 민변 부천지회장을 역임했고 현재는 경기도 의회 의원(부천5, 교육행정위원회)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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