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덕기 목사의 절친 주시경,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한글을 보급하다한글학자 주시경은 상동교회 교인이자 온 가족이 상동교회에 출석하였다. 주시경 선생은 소년 시절부터 전덕기 목사와 형제같이 지냈다. 전덕기는 숯장수 숙부 밑에서 컸고 주시경은 해산물 객주집 주인의 아들이었다. 어렸을 때 이름은 전봉운(전덕기), 주상호(주시경)이었다. 주시경이 한 살 아래였지만 둘은 친구처럼 친하게 지냈다. 청소년기에 이르러 전덕기는 스크랜턴 집안의 사환이 되지만 주시경은 배재학당에 들어가 신학문을 접했다. 상동교회 시절 전덕기 목사는 주시경이 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후원하고 뒷바라지를 마다치 않았다. 너무도 절친한 사이였기 때문인지, 주시경 선생과 전덕기 목사는 1914년 같은 해 3월과 7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상동교회 교인으로서 주시경이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그 시기는 주시경의 한글 연구와 한글 보급을 위한 운동의 절정기였다. 상동교회가 주시경 선생의 주 활동무대였을 정도로 전덕기 목사는 주시경 선생을 남달리 사랑하고 아꼈다. 한글의 과학화와 한글 강습을 통한 한글의 대중화에 가장 열정적으로 활동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상동교회 부설 상동청년학원이 설립되었을 초창기부터 주시경은 국어 교사로서 정성껏 봉직하였다. '주 보따리'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동분서주하며 주시경은 황해도 재령 등 지방에서 열린 하기 조선어강습회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등 한글 보급 운동에 혼신을 다했다.
상동청년학원에서 매년 교사를 대상으로 개설한 하기 국어강습소(조선어강습원의 전신)는 6기에 걸쳐 매회 25~35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전덕기 목사와 주시경 선생은 국어의 흥망성쇠가 나라의 명운을 좌우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민족의 얼과 민족정신이 그 나라의 언어에 있음을 자각하고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선 무엇보다 우리의 언어인 한글을 보존하고 널리 보급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1907년 7월 여름방학을 맞아 개최된 국어강습회는 대성황을 이루었고 주시경 선생의 강의는 인기를 치솟았다. 주시경 선생은 우리 한글의 독창성과 우리말의 체계적 조직 그리고 우수성을 힘써 강조했다.
밤에도 주시경 선생은 상동청년학원 부설 '국어 야학반'을 맡아 문법을 가르치고 우리말을 보급하는 데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활동했다. '국어 야학반'은 무려 2년 동안 지속되면서 많은 노동 청년들에게 우리말의 중요성을 각인시켰다. 상동교회 교인과 일반 대중에게도 국어 문법 강습회를 선보였는데 매주 일요일 오후 2시에 '국어 문법강습회'를 개최하여 국어교육의 중요성과 말과 글이 그 민족의 정신을 담고 있음을 애써 강조하였다.
을사늑약 반대운동 당시 백범 김구는 전덕기 목사와 친해지면서 민족운동을 함께 도모했는데 서울에 올 때마다 우리말의 국어 정신을 역설하며 가슴을 찌르는 설교를 했던 전덕기 목사의 말씀을 듣기 위해 상동교회를 찾곤 했다.
1900년대 상동교회는 왜 민족운동, 항일구국운동의 총본산이자 요람이 될 수 있었는가?
전덕기 목사의 상동교회는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항거하는 체결 반대 상소 운동을 주도했던 공간이다. 을사늑약 체결 직후엔 종로 거리 일대에서 항의 시위를 전개했으며 을사오적 처단을 위한 암살 모의를 시도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1907년 세계평화회의(만국평화회의는 일본식 표현)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접한 우국지사들은 상동교회 지하실에서 헤이그 특사(밀사는 일본식 표현) 파견을 주도했다. 전덕기 목사를 중심으로 이상설, 이회영, 이동녕, 이준 열사들이 매주 목요일 7시에 회합을 했다. 이상설은 이회영의 친척으로 절친이자 정부 관료를 역임한 신분이었고 이준 열사는 상동청년회장을 지낸 뛰어난 대중 연설가였다.
이회영은 이토 히로부미의 일제 통감부 몰래 거사를 추진하였다. 비밀리에 고종 황제의 측근과 밀통하여 을사늑약 체결이 불법이자 무효임을 알리는 고종의 친서를 받아내는 데 성공한다. 우리가 한국사 책에서 배웠던 바로 그 헤이그 특사 이상설(정사), 이준(부사), 이위종에게 건네진 것이다. 헤이그 특사 사건은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강도적 성격을 전 세계에 폭로하려 한 대한제국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그런 역사적 사건의 발원지가 바로 상동교회였다. 이렇듯 1900년대 상동교회는 항일 우국지사들의 은신처이자 집합소 같은 역할을 감당했던 공간이다. 물론 전덕기 목사는 그들에게 든든한 울타리를 쳐 주었고 일제의 감시로부터 보호막 역할을 마다치 않았다. 그들 우국지사, 항일구국운동의 중심에 전덕기 목사가 존재했던 것이다. 따라서 1900년대 항일 애국지사들은 전덕기 목사를 중심으로 상동교회라는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이다.
마치 1970~80년대 박정희-전두환 군부독재 시절 교회야학 형태와 유사했다. 당시 개신교회, 도시산업선교회나 천주교 성당은 군사정권 아래에서 대학생들과 노동자들이 만날 수 있는 합법적인 공간이었다. 교회의 존재 이유와 사명은 선교와 구제에 있다. 선교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복음 전파이고 구제는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의 삶을 현실적으로 위로하는 사역을 가리킨다. 그런 연유로 국가의 빈곤과 개인적 가난 때문에 배울 기회를 잃은 노동자 계층이나 도시빈민계층의 자녀들을 대상으로 교회라는 합법 공간을 빌어 개설된 야학은 독재 권력의 감시와 탄압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제1의 공간이었다. 검정고시 야학, 생활야학, 노동야학 등 다양한 형태의 야학들이 80년대에 존재했다. 물론 불의한 국가권력의 정보기관은 촉수를 번득이며 끊임없이 감시와 탄압을 가해왔지만 뜻있는 성직자들이 든든한 보호막을 쳐주었던 것과 유사했다.
1900년대와 1910년대 일제 강점기 초기 전국적인 항일 비밀 지하조직인 신민회 창립 역시 상동교회 지하실에서 1907년 결성된다. 매주 목요일 저녁 7시에 예배를 드린 직후 전덕기 목사와 이회영, 이동녕, 양기탁 등 우국지사들은 지하실에서 거듭 회합을 하고 신민회 결성을 주도했다. <백범일지>에도 나오듯이 상동교회는 이동녕, 이회영, 전덕기, 양기탁 등 신민회 창립멤버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던 공간이다.
20대 청년 전덕기는 1896년 독립협회 시절 절친 주시경과 함께 독립협회에 가입, 독립협회 서무부장이 되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만민공동회 활동에도 참여하였고 그런 활동 속에서 서재필, 윤치호, 이승만, 이동녕, 이동휘, 양기탁, 조성환 등 다양한 항일우국지사들을 만났고 인간관계를 맺었다. 독립협회가 정부의 탄압을 받고 이상재, 이승만 등 지도부가 수배 투옥되면서 관련 인사들이 상동교회 내 상동청년회(엡웟 청년회)로 대거 숨어들었다. 이들 항일지사들에 의해서 항일구국운동의 연장 선상에서 을사늑약 반대 상소 운동이 전개되고 헤이그 특사 사건, 국채보상운동, 신민회 창립 등이 주도된 것이다. 실제로 국채보상운동 당시 서울 시내 수전소(모금소)가 상동교회 내에 설치될 정도였다.
전덕기 목사가 상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한 1907년 상동교회 지하실에선 신민회 창립이 논의된다. 김구의 <백범일지>에도 그 내용이 언급되고 있다.
"국내와 국외를 통하여 정치적 비밀결사가 조직되었는데 그것이 곧 신민회(新民會)였다. (중략) 양기탁, 안태국, 이승훈, 전덕기, 이동녕, 주진수, 이갑, 이종호, 최광옥, 김홍량과 그 외 몇 사람의 중심인물과 당시 400여 명 정예분자로 신민회를 조직했다."신민회 창립멤버인 전덕기 목사를 비롯한 신민회 간부들은 1909년 3월 서울회의와 4월 청도회의를 통해 국권 회복의 최고 전략으로 독립전쟁을 준비한다. 그리하여 해외 독립군기지 건설과 신한촌 건설, 경제적 자립, 그리고 신한촌에 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려는 논의였다. 이러한 논의는 즉각 실행에 옮겨져 남만주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에 세워진 신흥무관학교를 탄생시키고 10년에 걸쳐 3500명의 독립군을 길러낸다. 그들이 주역이 되어 치른 전쟁이 일본군 수천 명을 섬멸한 1920년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였다. 이후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1920-30년대 의열단, 1930년대 조선민족혁명당, 동북항일연군, 1940년대 한국광복군, 조선의용대(군) 등에서 해방 직전까지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등 맹활약하였다.
그런 점에서 상동교회는 1900년대 항일구국운동의 총본산이자 주요 거점이었음이 틀림없다. 따라서 1900년대 민족운동사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전덕기 목사를 민족운동의 거목으로 규정하는 데 이견을 달 사람은 없다. 김구, 안창호, 이승만, 이동녕, 이상재 등 당대의 역사적 인물과 비교해도 전덕기 목사는 걸출한 인물임이 틀림없다.
상동청년회에 이어 전덕기 목사의 상동교회는 1904년 11월 상동청년학원을 설립해 교육계몽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상동청년학원은 일종의 교회학교 형태인데 1900년 이전에는 선교사들이 선교를 목적으로 교회학교를 설립하였다.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이 최초의 교회학교였다. 그러나 1900년대 이후에는 선교뿐만 아니라 구국운동 차원에서 서양 근대 신학문을 가르치려는 의도로 한국인 교인들이 교회학교 설립을 이끌었다. 상동청년학원이 교육·구국 운동차원에서 설립된 대표적인 교회학교 형태이다.
실제로 전덕기 목사가 세운 상동청년학원은 평양의 대성학교나 정주의 오산학교보다 무려 3~4년이나 앞서 세워진 민족운동의 요람이자 인재양성소였다. 그런 점에서 1900년대 상동청년학원은 민족운동과 교육운동의 선구적인 위치에 섰을 뿐 아니라 명실상부한 민족운동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전덕기 목사가 1914년 39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자 상동청년학원도 1914년 일제에 의해 폐교되는 운명에 직면한다. 상동청년학원의 교육과정은 초기에는 출세의 지름길인 영어를 비롯하여 국어, 수학, 물리, 박물학, 지리, 체조 등 근대 신학문과 종교(기독교 성경)과목이었다. 그러다가 이후 학생들의 진로라는 현실적인 이유로 부기, 경제학, 그리고 일본어, 중국어 등 실용적인 학문이 추가되었다.
아펜젤러의 감리교 1886년 연례보고서에도 조선 사람들이 '영어를 배우려는 열기는 언제나 대단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영어에 대한 약간의 지식만 있어도 높은 자리에 오르는 디딤돌이 되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 '왜 영어를 배우려고 합니까?'라고 물으면 한결같이 '벼슬을 얻으려고'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1886년 9월 1일 단 1명으로 시작한 배재학당은 그 해 말 32명으로 크게 늘어나 한국 최대의 학교라고 아펜젤러는 1886년 11월 6일자 일기에 쓰고 있다.
전덕기 목사는 상동청년학원을 세울 때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운동에 헌신할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 교육계획을 수립했다. 민족의 얼과 정신이 담긴 한글의 이치와 보급, 그리고 민족정체성과 직결된 한국사 강의와 타 문화 강의, 나아가 신문화 수용과 전파, 체육활동을 통한 신체단련, 지도자의 자기수양과 종교 훈련에 교육의 역점을 두었다.
상동청년회뿐만 아니라 상동청년학원의 운영 및 교사진 역시 당대의 내로라하는 지식인들이었다. 남궁억(교장), 이회영(학감), 유일선(교장 및 수학), 조성환(한문), 장도빈, 최남선(국사), 이동녕, 이만규(이학), 주시경(국어), 성경(전덕기), 영어(스크랜턴 대부인) 등이 상동청년학원 강사들이었다. 상동청년학원 출신 운영진 및 교사 출신 가운데 14명이 독립운동가 서훈을 받을 정도로 항일의식을 강조한 대표적인 민족교육기관이었다. 상동청년학원은 당시에 미국 북감리교 선교부의 후원 없이 조선인 스스로 후원과 기부를 받아 운영함으로써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마음껏 고취시키는 민족운동의 산실이기도 했다.
상동교회, 상동청년회, 상동청년학원을 중심으로 교사-학생들의 인간관계 속에서 1900년대 항일구국운동의 인맥이 형성된다. 이른바 '상동파'의 등장이다. 이들 '상동파'가 중심이 되어 1905년 을사늑약 반대 상소 운동과 종로 거리 연설 및 시위가 벌어진다. 특히 종로 거리 시위는 일제 경찰과의 투석전 등 시위 양상이 매우 격렬하였다. 을사오적을 응징하려 한 주체나 오적 처단 암살 모의, 국채보상운동, 헤이그 특사 사건, 신민회 창립 등 1900년대 민족운동의 중심 주체가 이들 '상동파'였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1907년 상동교회 지하실에서 창립된 신민회는 상동청년회와 상동청년학원의 인맥인 '상동파'를 핵심적인 모체로 탄생한다. 창립멤버 7인 가운데 전덕기, 이회영, 이동녕, 양기탁은 상동교회 교인이자 상동청년회 회원이었다. 전덕기 목사는 신민회 창립 직후 재무를 총괄하는 직책을 맡는다. 다시 말해 전덕기 목사가 만든 상동청년회와 상동청년학원, 즉 '상동파'는 독립협회 인물들을 계승한 것으로 이후 신민회 창립의 인적 토대를 구축한다. 따라서 항일구국운동의 구심 '상동파'가 형성되는 데엔 전덕기 목사의 가교 역할과 그 존재감을 빼 놓고 설명할 도리가 없다. 왜냐하면 당시 전덕기 목사는 민족주의 항일지사들의 상징적 존재로 이미 떠올랐기 때문이다.
실제로 독립협회 시절 상동교회에 와서 전덕기 목사에게 가장 먼저 세례를 받은 이동녕을 비롯하여 수많은 열혈 항일지사들이 전덕기 목사 주변에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동휘, 이갑, 노백린 등 과격한 인물들뿐 아니라 안창호, 이승훈, 이승만 등 온건한 인물들까지 전덕기 목사의 인품과 함께 전덕기 목사를 중심으로 운집하였다. 전덕기 목사가 1903년 상동청년회 회장이 되었을 때 정순만(서기 및 통신국장), 박용만(다정국장), 이준(외교부장), 이승만, 이동녕, 이희간, 조성환, 이동휘 등이 상동청년회로 결합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 체결 움직임이 보이자 상동청년회원 정순만과 이희간은 비수를 품고 외부대신 박제순의 집에 숨어들어 갔다. 그들은 박제순에게 조약에 조인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 일제가 조약 체결을 강요할 시 관인을 연못에 던져버리고 자결할 것을 협박하기도 했다.
전덕기 목사를 상징으로 하는 '상동파' 인물들은 1904년 11월 을사늑약이 불법적으로 체결되자 체결 반대 상소운동을 전개한다. '상동파' 인물들은 '상동회의'를 통해 덕수궁 정문인 대한문 앞에서 복합 상소 운동을 전개한다. 그리고 일본 헌병이 군도로 내리치는 위협 속에서도 을사늑약 반대 상소 운동을 결행한다. 가두연설 및 종로 거리 항의 시위 때는 일본 보병 2개 중대 병력과 벽돌을 던지는 등 투석전을 전개했다. 종로 가두연설에선 대대적인 육박전이 벌어졌다. 종로 공개연설에서 일본 순사가 칼을 빼 들자 연설하던 청년이 맨손으로 일본 순사를 거꾸러뜨리는 순간 일본 경찰들이 총을 쏘았다. 시위대는 벽돌을 집어 던지며 저항하다 수십 명이 체포되었다.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전덕기 목사는 상동청년회 2인자 정순만과 함께 이지용, 박제순, 이근택 등 을사오적 처단을 결의하고 평안도 장사 십 수 명을 몰래 모집하기도 했다.
전덕기 목사, 이회영과 함께 헤이그 특사 파견을 주도하고 이준 열사를 축도(祝禱)하다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차 세계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접한 전덕기 목사는 상동교회 내 지하실에서 이회영, 이상설, 이준 등과 특사 파견을 주도했다. 을사늑약 체결이 일제의 협박에 의한 무효이며 불법적으로 체결된 것으로 일제의 침략성을 만천하에 폭로하고자 하였다. 헤이그 파견 당시 정사 이회영의 친척 이상설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 당시 그 참상을 목격한 인물이다. 그는 조약 체결에 반대하면서 고종 황제가 이를 거부하지 못할 지경이면 자결하라고 직접 상소를 지어 올렸다. 참정대신 한규설, 시종무관장 민영환 등과 사전에 대응책을 논의하기도 했다. 조약 체결에 결사적으로 반대하되 그렇지 못할 경우 모두 현장에서 자결하자고 주문한 것이다. 조약 체결에 격하게 항의하던 참정대신 한규설은 일본 헌병에 붙잡혀 끌려 나갔고 이상설은 눈물을 흘리며 성토하다 혼절했다. 조병세와 함께 을사오적 처단과 조약 파기를 주장하던 시종무관장 민영환은 1905년 11월 30일 유서를 남긴 채 할복 자결하였다. 2천만 동포에게 남긴 민영환의 유서에는 비장함이 절절히 묻어나온다.
"오호! 나라의 치욕과 백성의 욕됨이 이에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 경쟁 가운데서 진멸하리라. 대개 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하는 사람은 도리어 삶을 얻나니 ...(중략)...영환은 죽어도 죽지 않고 저승에서라도 제공을 기어이 도우리니 다행히 동포형제들은 천만 배 더욱...(중략)...한 마음으로 힘을 다하여 우리의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어서라도 마땅히 저 세상에서 기뻐 웃으리라." 이상설 또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시도했으나 실패한다. 그 광경을 백범 김구가 우연히 목격하는데 그 내용이 <백범일지>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민영환 댁에 가서 조의를 표하고 큰 길로 나오는데 여러 사람이 인력거를 둘러싼 채 밀고 가면서 큰 소리로 울부짖는 것이었다. 인력거에는 나이 마흔 안팎으로 보이는 어떤 사람이 흰 명주 저고리에 갓도 망건도 없이 맨상투 바람으로 실려 가는데 옷에 핏자국이 얼룩져 있었다. 누구냐고 물은 즉 의정부 참찬 이상설이 자결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 헤이그 파견 당시 부사로 임명된 이준 열사는 상동청년회 외교부장과 회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본래 연동장로교인이었다가 상동감리교인이 되었는데 한국 최초로 법관양성소를 졸업한 뒤 최초로 검사에 임명된 인물이다. 그는 국제법에 밝았고 일제의 황무지개척권 요구에 저항한 보안회 활동(1904)을 비롯하여 국채보상운동(1907) 당시 활발히 활동하였다. 그는 YMCA 등 탁월한 대중연설가이며 '상동파'의 '상동회의' 직후 대표로 을사늑약 반대 상소문을 지어 올린 인물이기도 하다. 일제는 헤이그 주재 일본 외교관의 보고서에 근거하여 이준 열사의 죽음을 병사로 왜곡하였고 식민사학자들도 이에 동조하였다. 그러나 이준 열사는 연쇄구균에 의한 피부질환(단독 丹毒)에 걸려 죽은 게 아니다. 피부 질환은 그렇게 쉽게 죽을 수 있는 질병도 아니다. 오히려 일제 외무성 산하 영사들과 일제 첩자들이 작성한 기밀문서에는 이준 열사의 죽음을 '자살', '할복분사'로 적고 있다. 무엇보다 헤이그 특사로 함께 파견된 이상설은 자신이 세운 독립운동 단체 '권업회' 기관지 <권업신문>을 통해 '헤이그에서 뜨거운 피를 흘린 지...'라는 표현을 통해 이준 열사의 '자결'을 공식화했다.
전덕기 목사는 이회영의 인척관계를 통해 고종의 친서를 받아내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헤이그 특사가 떠나기 전 상동청년회 이준 열사를 위해 축도하고 특사 파견이 성공하도록 철야기도를 한다. 헤이그 특사 파견 당시 일제 통감부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의 특사 파견 시도를 알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누가 특사로 파견되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1907년 5월 19일 이토 통감이 극비 전보로 일본 외무대신 하야시에게 발송한 내용이나 블라디보스톡 주재 무역사무관 노무라 모토노부가 조선통감부에 보낸 보고서를 통해 일제가 헤이그 특사 파견을 사전에 인지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노무라 보고서에는 전 평리원 검사 이준, 전 학부협판 이상설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고 이들이 5월 21일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로 출발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헤이그 특사 사건 이후 이토 통감은 일본 정부의 방침에 따라 고종을 쫓아내고 순종으로 갈아치우기 위한 작업에 들어간다. 자신이 직접 나서기보다 친일 내각인 이완용 총리대신, 송병준 농상공부 대신을 내세워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킨다. 특히 고종의 양위문제 해결에 가장 앞장 선 송병준은 "이번 일 책임은 폐하 한 몸에 있으니 친히 도쿄로 가서 그 죄를 빌던지 그렇지 않으면 하세가와 주둔군 사령관을 대한문 앞으로 맞이해서 면박의 예의를 취해야 한다." 고 겁박한다. 감히 신하된 처지에서 나올 수 없는 망발이 아닐 수 없다.
민중목회를 실천한 전덕기 목사의 삶과 죽음어린 시절 전덕기는 9살에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었다. 남대문 시장에서 숯을 만들어 팔던 숙부 전성여 밑에서 소년 전덕기는 이웃집 서당에서 어깨 너머로 배운 한자 지식이 어린 시절 공부의 전부였다. 어린 전덕기는 근본이 총명하였으나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면서 빈곤함과 고독 속에서 불우한 소년 시절을 보낸다. 그런 탓에 소년 시절 전덕기는 매우 불량하여 쉽게 사람을 잘 때리는 등 폭력에 노출된다. 그리고 외국 선교사들을 향해 돌팔매질을 하여 유리창을 부수고 모욕적인 언사를 내뱉는 등 반항아적 기질을 보이는 불량소년으로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돌팔매질의 대상이었던 스크랜턴 선교사의 언행에 감복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숙부 전성여의 손에 이끌려 스크랜턴 선교사의 가사도우미(집사)가 된다. 거기서 청소년 전덕기는 자신을 끔찍이 사랑했던 스크랜턴 대부인으로부터 정신적으로 깊은 감화를 받은 것이다.
전덕기 목사의 목회활동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가는 현장 목회였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 일상의 삶에 고통 받는 민중을 찾아가서 복음을 전했다. 전덕기 목사의 민중 목회는 오롯이 스크랜턴 선교사가 전하고자 했던 복음에서 비롯된 것이자 그에 기초한 신앙심의 발로였다. 이 민족을 가난과 무지, 질병과 미신에서 해방시키고 영혼과 육신의 질병을 고치려는 게 선교사로서 스크랜턴 목사의 소명이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억눌린 자에게 해방을, 병든 자에게 건강을, 고통 받는 자에게 평안을" 전하고자 하였다. 목사 전덕기는 그러한 스크랜턴의 선교정신을 그대로 계승한 인물이자 스크랜턴을 뼛속까지 닮고 싶어 했다.
소외된 사람들에게 향하는 그의 사랑은 감동적인 설교로 성화되었고 그들의 가슴을 적셨다. 생전에 전덕기 목사를 존경했던 김진호 목사는 전덕기 목사의 설교가 알아듣기 쉬울 정도로 평범했고 삶에 지치고 고달픈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격려와 감동의 말씀이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실제로 전덕기 목사의 설교는 대중의 마음속을 파고들 뿐만 아니라 청년들을 끌어들이는 힘찬 설교였다. 그러던 1907년 스크랜턴에 이어 목사 전덕기는 상동교회 담임목사가 되었다.
상동교회는 1907년 전덕기 목사 부임 이후 눈부시게 성장, 발전한다. 1912년엔 총 교인수가 2907명에 이르러 정동교회 교인수 1850명을 월등히 능가할 정도였다. 상동교회 담임 목사 시절 전덕기는 설교할 때 발을 구르고 강단의 단상을 치며 소리 높이 열정을 담아 회중을 감동시켰다고 백범 김구는 회고한 적이 있다. 그리하여 정동제일교회보다 출발은 늦었지만 상동교회는 전국의 어떤 감리교회보다 신자수가 많았고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전덕기는 항상 쑥과, 들것, 나막신을 갖고 다녔다. 쑥은 시체 썩는 고약한 냄새를 막기 위함이고 나막신은 시신이 안치된 방안에 들어서기 위함이었다. 목사 전덕기는 장례를 치를 비용이 없는 궁핍한 이들의 연락을 받으면 비록 교인이 아니어도 손수 시신을 거두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사 전덕기는 지방 교회 설교를 하고 돌아오다가 각혈을 하는 등 폐렴으로 고생한다. 병상목회를 하는 와중에 1911년부턴 부흥사이자 독립운동가인 현순 목사가 전덕기 목사를 도와 상동교회에 와서 시무한다. 1912년부터 전덕기 목사의 병환은 더욱 깊어갔다. 그러다가 1914년 3월 39세 젊은 나이에 순교한다.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상동교회로, 남대문 시장으로 몰려든 사람들로 장례인파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남대문 시장 일대 거지와 인근 불량배들, 그리고 백정들이 나서서 상여를 메고 소복을 입은 기생과 창녀들이 구슬피 울면서 긴 상여행렬의 뒤를 따랐다. '우리 선생님이 죽었다! 우리 선생님이 죽었다!'고 통곡하며 그들의 울부짖음은 애절하기 그지없었다. 길게 늘어선 장례행렬이 10리에 달했다. 마치 국상과도 같은 슬픔으로 가득한 분위기였다. 민중의 아들로 태어나 몸소 민중 목회를 실천하다 순교한 목사! 전덕기의 죽음을 슬퍼한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