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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애국 시민 여러분!" 160cm의 단신 신형식은 단상에 올라 웅변을 시작했다. 신형식은 달변가이며, 시민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명연설가였다. 그는 휴전협정과 미국의 대한(對韓) 원조방식에 관련해 평소 지니고 있던 불만을 터뜨렸다.

"우리는 UN에 대하여 하나도 고마워할 것이 없습니다. (중략) 우리 농토를 황폐화시켜 놓고 썩어진 밀가루를 갖다 주는 것이 고마우냐?" 그는 이어서 독설에 가까운 연설을 했다. "개가 주인으로부터 찬밥 덩이나 얻어먹을 적에는 주인을 따르지만, 주인이 개를 잡아먹으려고 노끈으로 목을 매 달 때는 그 유순하던 개도~ 눈에서 불이 번득이면서 최후발악과 반항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다음 발언이다.

"이 박사(李 博士)께서는 너무 고령하시고 노쇠하여 장래가 우려 됩니다." 즉 이승만 대통령이 너무 늙었기 때문에 후계자를 준비해야 한다는 취지의 연설이었다. 그는 결론으로 민족청년단 최고지도자인 이범석 장군의 뒤를 따르자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는 전혀 엉뚱한 말이 나왔다.

"영웅적인 지도자 김일성 장군의 뒤를 따라야 합니다" 무심천 광장에 모인 수천 명의 군중은 웅성거렸다. 단상 바로 앞에 있던 청주경찰서 사찰과 형사들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1953년 6월 25일 북진통일위원회 충북지부가 주최한 '6.25 기념 충북시민대회'는 이것으로 쫑쳤다. 대회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일부 흥분한 군중이 단상으로 뛰어오며 "빨갱이 새끼"라고 했지만, 사찰과 형사들이 제지했다. 행사장은 마치 벌집을 건드린 것처럼 되었고, 집회는 곧바로 해산되었다.

위의 내용은 1953년 6월 27일, 7월 1일 치 <동아일보> 기사를 재정리한 것이다.

 신형식 망언사건 기사. 동아일보 1953년 7월 1일자
신형식 망언사건 기사. 동아일보 1953년 7월 1일자 ⓒ 동아일보

당신이 주동이 되어 인민공화국 재건을 꾀하는 거 아냐?

반공투사 신형식은 이 사건으로 졸지에 빨갱이 괴수가 되어 청주지법과 대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결과는 사형구형이었다. 신형식은 청주 무심천광장에서 자유당 충북도당 부위원장이자 자유당(중앙당) 징계위원장 자격으로 연설했던 것이다. 또한, 북진통일위원회 충북지부 부위원장 명함도 있었다. 1952년 충북도의원 선거에서 홍원길에게 패해 고배를 마셨지만, 그는 실질적으로 자유당 충북도당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즉 신형식은 충북지역에서 대표적인 반공투사였다. 그런데 그의 실언(失言) 사건으로 개인적으로는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뿐만 아니라 이 사건은 신형식 개인의 추락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이범석과 족청계열이 정치적으로 몰락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사형 구형 기사. 동아일보 1953년 12월 1일자
사형 구형 기사. 동아일보 1953년 12월 1일자 ⓒ 동아일보

사형이 구형된 그에게 청주지법은 최종 7년을 구형했다. 하지만 대법원에서는 10년을 선고해, 1심보다 높은 형을 선고했다. 확정판결을 받은 후 그는 전주형무소에 수감됐다.

1956년 어느 날 갑자기 '국가보안법', '국방경비법' 위반자에 대해 전향서를 쓰라는 쪽지가 감방 안에 돌았다. 그날 이후로 정치범에게는 출역이 금지되었다. 그리고 악몽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정치범들을 '감옥 안의 감옥'에 한 명씩 불렀다. 이곳은 전주형무소장의 재가를 받아 신형식이 정치범들을 전향 공작하기 위한 특별감방이었다.

당시 정치범의 절대다수는 한국전쟁기에 빨치산활동을 하거나 북한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구속된 좌익수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좌익수를 고문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빨갱이들을 죽여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특별감방에 끌려간 최진호(가명. 94세)에게 신형식이 "당신이 주동이 되어 인민공화국 재건하려는 거 아냐?"라고 다그쳤다. 황당무계한 얘기였다.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최진호에게 돌아 온 건 매였다. 정신을 잃을 정도로 매타작을 받은 후 본격적인 고문이 시작되었다.

양발과 손을 묶고 그사이에 나무를 끼웠다. 그러면 사람이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리게 된다. 이른바 '통닭구이 고문'이다. 이어서 수정(수갑)을 채우고, 입을 틀어막고 곡괭이로 두드려 팼다. 고문이 끝난 후에는 수갑을 채워 먹방(징벌방)에 가두었다. 최근 상영한 영화 <1987>에서 나온 장면이다.

정부 수립 후 최초의 전향 공작

하지만 최진호 선생은 당시 고문이 1970~80년대보다 훨씬 험악했음을 증언한다. "고문도요. 고문 기술자가 하는 거랑 막무가내로 고문하는 거랑 달라요. 고문 기술자들은 가급적 외상을 남기지 않고, 죽지 않을 정도의 고문을 가하죠. 그런데 당시에 신형식 똘마니들은 막무가내로 패고 고문을 했어요." 기술자들이 고문해도 박종철처럼 죽거나 김근태 선생처럼 평생을 고문후유증에 시달린다. 하물며 당시에 가한 고문이야...

고문은 최진호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전주형무소에 수감된 좌익수 200명을 대상으로 매일 진행되었다. 특별감방은 전주형무소 내에 감방 하나를 비우고 신형식이 상주하면서, 고문을 진두지휘한 곳이다. 직접 고문을 가한 이들은 전직 형사나 깡패로, 소위 '경비'라고 불렀다. '경비'는 형무관(현재의 교도관)을 보조하는 역할이었다. 그런 '경비'가 정치범을 고문하는 악역을 맡았다. 신형식의 '전향공작'으로 많은 좌익수들이 전향을 했다. 이 전향공작은 대한민국 수립 이후 최초의 전향공작이다.

흔히 전향 공작하면 박정희 정권 시절 제정된 사회안전법과 연동해서 생각하게 된다. 1974년 '7·4 남북공동성명서' 발표 이후 대한민국에 좌익수가 없다는 것을 광고하기 위해, 전국의 형무소에서 좌익수에 대한 대대적인 전향공작을 전개했다. 하지만 신형식은 20년 일찍 '전향공작'이라는 명분하에 구타와 고문 등 반인권적인 범죄행위를 저질렀다.

파킨슨병에 시달리는 고문피해자

최진호 선생은 파킨슨병에 시달린다. 온몸에 마비증세가 오고, 청각을 거의 잃었다. 현재 홀로 살고 있는 최 선생은 병마와 힘겹게 싸우고 있다. 그가 파킨슨병에 시달리는 이유는 신형식의 고문에 의한 것이다. "당시에 곡괭이 자루로 머리를 맞은 것이" 주요한 병인(病因)이다. 최 선생은 감형으로 1960년에 석방되었다. 하지만 정상적인 사회생활은 불가능했다. 직장에 수시로 형사들이 찾아와 전직을 이야기했고, 이사 가는 곳마다 찾아왔다. 사회안전법이 제정된 후에는 두 달에 한 번씩 검찰청에 생활내용을 신고해야 했다. 2018년 현재는 파킨슨병에 시달리며, 혼자 외로이 살고 있다.

최진호 선생은 북한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에 '반일학생사건'으로 구속되었다. 해방 후 교사를 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백아산과 백운산에 활동하다 1954년 백운산에서 검거되었다. 한국전쟁은 그렇다 쳐도 최진호 선생이 신형식을 만나지 않았다면, 최 선생의 삶은 어땠을까?

 신형식 감형장
신형식 감형장 ⓒ 박만순

충북보도연맹 간사장 신형식은 1946년 전향 후 반공투사로 활동했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동료들의 죽음의 길을 외면하고 CIC에 들어갔다. 이후 자유당 충북도당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다 '김일성 장군 만세' 실언사건으로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전주형무소에서는 '전향 공작'에 앞장섰다. 이런 노력의 일환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1960년 10월 1일 자로 11개월 26일 감형(減刑)을 받았다.

1962년 석방된 신형식은 여전히 양지(陽地)만을 찾아다녔다. <충청일보> 논설위원과 광덕학원 이사를 역임했다. 또한 '신채호선생 추모사업회' 초대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가 말년에 언론인·교육자·사회운동가로 지낼 때, 다른 이는 파킨슨병으로 고통을 받았다.


#신형식#김일성장군 만세#전주형무소#전향공작#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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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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