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롭게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
"장관님 직접 발표하십니다.질의응답 없습니다 방송 촬영되고 생방송 안 됩니다."2일 오전 10시 57분, 법무부 출입기자 카톡방에 뜬 메시지입니다. 읽자마자 저절로 '헐' 소리가 튀어 나왔습니다. 입장 발표를 예고한 박상기 장관은 서지현 검사 성추행 피해 호소를 듣고도 미온적으로 대처했다는 의혹을 산 상황이었습니다. 물어볼 게 많은 기자들로서는 "질의응답 없다"라는 일방 통보가 황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홍보담당관의 세 줄 공지 이후, 카톡방엔 기자들의 항의가 이어졌습니다.
"질의응답이 없다면 굳이 거기까지 가서 들을 이유가 있습니까?""장관님 입장 발표는 언제 결정된 건지요?"그러나 돌아온 답은 "(과천정부청사 내) 차량 통과를 원하시면 차종, 차량번호, 탑승자, 전원 성함, 연락처를 아래 문자로 보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일방통행'에 기자들의 항의는 거세졌습니다. '보이콧'(취재 거부)까지 언급되며 험악한 분위기가 빚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법무부 측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오전 11시 16분, '차량 통과 안내' 메시지가 마지막이었습니다.
30분쯤 뒤, 별도 창구인 서울중앙지검 출입기자단을 통해 수정된 공지가 내려왔습니다. 생중계가 가능하고 질의응답은 인권국장과 대변인이 맡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취재 거부 기로에 놓였던 기자회견은 예정대로 진행됐습니다.
질의응답 없이 '3분 만에' 퇴장
이날 박 장관은 예정 시각보다 약 6분 늦은 낮 1시 36분에 어두운 얼굴로 마이크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미리 배포한 A4 두 장짜리 입장을 읽고 '3분' 만에 떠났습니다. 서 검사의 고통에 안타까움을 표하며 조직문화 개선을 약속하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폭로 5일 만에 나온 입장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평이한 내용이었습니다. "법무부 차원의 조치가 매우 미흡했다"라는 대목이 있었지만 "국민들께서 보시기에"라는 단서를 달아, 속 시원한 사과도 아니었습니다. 발표 직후 곳곳에서 기자들 사이에서 "쓸 게 없다"라는 말이 나온 이유입니다.
가장 큰 관심사였던 '거짓 해명 논란'은 박 장관이 퇴장한 후 문홍성 대변인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날 법무부는 서 검사의 피해 호소 이메일을 박 장관이 받았는지 여부를 두고 입장을 번복했습니다. 사실, 이 날도 카톡방에서는 입장을 번복한 이유까지 설명하라는 기자들의 항의가 있었습니다만, 공식적인 답은 역시 없었습니다. 하루 뒤에야 '잘 사용하지 않는 검찰 메일로 받아 확인하는 데 착오가 있었다'라는 해명을 들었습니다.
지금이라도 법무부가 대책위원회를 발족하고 적극적인 후속조치를 약속한 건 잘된 일입니다. 그러나 이날 기자회견 과정과 지난 5일 동안의 조치를 살펴보면 법무부가 사태 해결보다 비난 여론을 잠재우는 데 급급한 건 아닌지 의심이 듭니다.
검찰 개혁의 시험대
이날 박 장관은 중요한 약속을 하나 했습니다. 검찰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2차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적극 대처하겠다는 겁니다. 문 대변인은 "검찰 내부에서 서 검사에 대한 비난 여론이 나올 때는 엄정하게 처리하겠다는 게 장관님의 생각"이라고 힘주어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이런 입장은 구성원에게 아직 공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성폭력 피해를 고발했을 때 폭로 의도를 의심하며 피해자를 비난하는 건 아주 익숙한 일입니다. 바꿔 말해, 5일 전 서 검사가 스스로를 드러낸 순간 이미 2차 피해는 예상됐다는 겁니다. 실제로 검찰 내부에서는 서 검사를 향한 마타도어가 흘러나왔고, 서 검사 측이 검찰과 법무부에 피해자 보호를 공개 호소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하루 반나절이 지난 뒤에야 '엄정 대응' 방침을 발표한 법무부는 "최대한 신속하게 했다"라고 합니다.
사실 법무부도 '2차 피해'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서 검사의 폭로 직후 첫 공식 입장에서 법무부는 가장 먼저 "인사 과정에 문제가 없었다"라고 밝혔습니다. 사건의 원인을 '인사 불만'으로 몰아세우는 비난 여론과 동일한 인식이었습니다. 제일 마지막에서야 "(성추행은) 시일이 경과했고 당사자들이 퇴직해 경위 파악에 어려움이 있다"라고만 했습니다. 박 장관도 2차 피해의 책임을 인정했습니다. 그밖에 이해가 안 되는 지점이 많지만, 이 글에선 생략하겠습니다.
지방지청에 근무하는 평검사가 용기를 내 면담을 요청할 수 있었던 건 그가 검찰 개혁을 강조한 비 검찰 출신의 장관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은 서 검사가 보낸 메일을 첫머리에 잘 드러납니다. "장관님께서 부임하신 이후 검찰에도 진정한 개혁과 조직문화 발전을 위한 새로운 바람이 분 것 같아 감사드립니다." 공고한 카르텔 속에서 오랜 시간 좌절한 피해자에게 '비 검찰 출신 장관'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바로 이곳이 박 장관이 줄곧 강조한 검찰 개혁의 시험대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