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지난 5일 뇌물공여자에서 '피해자'로 풀려났다. 항소심 재판부가 1심에서 인정됐던 핵심 증거들을 외면하면서 징역 5년에서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으로 형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수사 단계부터 1심, 항소심까지 삼성 변호인단과 함께 싸워 온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항소심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특검은 항소심 결과에 울분을 삼키는 모습이다. 특검 관계자는 "진짜 설마설마했다. 우리가 예측한 시나리오 10개 중 가장 최악의 결과였다"며 "재판부가 무죄를 쓰겠다고 작정하면 못 쓸 게 없겠더라"고 말했다. 또 다른 특검 관계자 또한 "매우 극단적인 판결"이라고 지적했다. 정치적으로 '극단'이라는 말이 아니다. 특검이 제시한 증거를 모두 배척하고 이 부회장 변호인의 주장만 취사 선택해 극단적으로 기울어진 판단이라는 지적이다.
특검 관계자는 "이 판결은 증거에 대한 판단, 사실관계 인정, 법리해석 등 매 이슈마다 매우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며 "안종범 수첩에 대한 증거 능력을 인정하지 않은 것도 대법원 판례, 통설, 학설을 다 배제하고 별다른 설명 없이 삼성 변호인단이 주장하는 미국 소수설을 채택했다"라고 말했다.
재판부는 이 부회장이 박근혜 전 대통령과 합의한 '부정한 청탁'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업무 수첩과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업무 일지의 증거 능력을 배척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재판부의 논리는 빈약했다.
노종화 변호사는 "재판부가 이 부회장의 승계 작업을 인정할 수 없다는 논거를 충분히 설명해야 하는데 업무 수첩과 승계 작업을 인정한 1심 판결에 대한 근거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이 부회장이 이익을 본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등 이 부회장의 개별 현안 11개는 1심이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결과를 그대로 가져오면서도 그 이유에 관해 설명하지 않았다. 특검 쪽의 주장이나 제출된 증거에 대한 판단도 하지 않았다.
"삼성 쪽 의견서 그대로 옮긴 판결문"
다른 특검 관계자 역시 "납득할 수 있도록 치밀하게 내용을 설명해야 하는데 판결문은 보니 너무 대충이었다"며 "재산국외도피 논리도 도저히 이해를 못 하겠다. 보통 판결문엔 증거 하나하나를 판단해서 인정하기 어렵다 등 결론을 내주는데 이 판결은 삼성 쪽 의견서를 그대로 옮겼다"고 밝혔다.
재산국외도피 혐의는 삼성이 '비선실세' 최순실씨의 딸 정유라씨에게 승마를 지원하면서 최씨에게 해외로 뇌물을 몰래 반출했다는 내용으로, 이 부회장의 혐의 중 형량이 가장 높아 특검의 구형 기준이 됐던 부분이다. 그러나 재판부는 뇌물을 국외에서만 공여한 것일 뿐, '도피'에 해당되지도 않으며 그럴 의사도 없었다고 판단했다. 해외로 뇌물을 송금하기 위해 삼성전자-코어스포츠 간의 허위 용역계약까지 체결한 사실에 대해서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 부회장을 '피해자'로 본 재판부의 시각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특검에 있던 한 검사는 "재판부가 이 부회장과 박 전 대통령의 독대를 일방적으로 갈취하는 자리로 만들었다"며 "이미 박 전 대통령 쪽에서 서로 윈윈하는 자리였다고 했는데 그 내용을 전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면 이 부회장이 몇 차례에 걸쳐 아무 이유 없이 강요에 의해 몇 십억 원을 냈다는 건데 말이 되나"라고 밝혔다.
특검은 대법원에 제출할 상고이유서에 집중하겠다는 입장이다. 특검 관계자는 "대법원에서 파기환송할 가능성은 당연히 있다고 본다"며 "안종범 수첩의 증거능력도 법률적 해석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증거능력을 따져서 사실관계를 인정해야 하기 때문에 대법원에서 모두 하기는 부담될 것"이라고 했다.
특검은 선고 당일인 5일, 오후 7시께 A4용지 3쪽에 달하는 입장문을 배포한 바 있다. 당시 특검 측은 "이재용이 피해자에 불과하다는 항소심 판단은 이재용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해 사건의 본질을 왜곡했다"며 "대법원에 상고해 실체 진실에 부합하는 판결이 선고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관련 기사:
특검, '이재용 집유' 맹비난... "편파적이고 무성의한 판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