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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에 비례해 현명함이 저절로 생긴다면 좋겠지만 안타깝게 5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늘 갈등하고 잘못하고 후회하고 배우며 살아갑니다. 오늘 실수하고 내일은 그만큼 지혜가 쌓이는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중년의 좌충우돌 이야기입니다. [편집자말]
문영숙 68세. 친정 아버지의 막내 여동생(4녀 1남). 서울 거주. 150정도 되는 작은 키에 야무딱진 얼굴. 사돈네 팔촌까지 통틀어 그녀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다. 우리 가족만 해도 시골에서 서울 대학에 진학한 오빠가 낯선 서울 생활을 적응할 때까지 숙식을 제공했고, 사업을 시작한 언니에게는 사업 자금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빌려줬다.

바쁜 엄마를 대신해 내가 결혼 할 때 숟가락 하나까지 혼수 준비를 해주었고 집들이 손님도 그녀가 치러주었다. 영숙씨는 그냥 고모가 아니다. 우리 형제 포함 사촌들까지 모두에게 엄마 같은 고모.

영숙씨는 2남 1녀를 슬하에 두었다. 어린 시절, 방학 때마다 그녀 집에 갔다. 그녀의 집에는 사촌들까지 와있어 항상 북적북적했다. 정이 많은 그녀는 매끼 맛있는 음식을 우리들 입에 쏙쏙 넣어주면서 또 뭐가 먹고 싶은지 물었다.

제비 새끼들같이 받아먹는 게 예쁘다며 함박 미소를 짓는 그녀. 학기 중에는 그녀도 일을 해서 바쁘지만 방학 때면 자식들 옆에 꼭 붙어 아이들을 챙겼다. 삼시세끼를 따끈하게 새로 지어 먹이고, 본인은 후줄근한 옷을 입지만 아이들은 세련된 스타일로 입히는 영숙씨.

엄마 같은 고모, 영숙씨

 다큐 주인공으로 나온 영숙씨
다큐 주인공으로 나온 영숙씨 ⓒ MBN 화면캡처

50년째 시어머니까지 모시고 사는 영숙씨의 생활은 이렇다. 1월에는 화훼시장에서 꽃을 사다 집에서 꽃다발을 만든다. 2월에는 전국 초중고 대학 졸업식장을 다니며 꽃을 판다. 3월초에는 입학식에서, 중반 이후부터 4월에는 전국 지방 축제에서 온갖 장난감을 판다.

5월에는 초등학교 운동회. 여름 동안은 피서지. 가을에는 또다시 지방 축제. 각종 축제가 끝날 무렵에는 김장을 하고 각종 장을 담근다. 아이들이 어려서는 아무리 멀어도 집에 왔다갔다를 반복해야 했으므로 그야말로 살인적인 스케줄이다. 낡은 봉고차에 꽃을 싣고, 장난감을 싣고 전국을 누비는 영숙씨와 그녀의 남편.

이런 와중에 잠시라도 쉬는 날이 생기면 서울 근교에 사는 조카들을 돌보러 순회한다. 사촌오빠네 김치가 떨어졌는지, 우리 집에 고추 장아찌가 떨어졌는지, 반찬통에 밑반찬을 만들어 보따리보따리 싸서 배달하신다.

영숙씨의 단골멘트는 "고모가 고모 노릇도 못하고, 사는 게 바빠서 자주 못 들여다봐서 미안하다"이다. 내가 죄스럽고 감사해서 밥이라도 살라치면 바쁜 일이 있다며 바람과 같이 사라져버린다.

영숙씨의 막내 아들이 몇 년 전 갑상선 암에 걸려 수술하고 항암치료를 받느라 직장을 그만뒀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이가 막 태어난 직후 일이다. 우여곡절 끝에 아들은 철원에 된장 공장을 차렸고 손맛이 좋은 영숙씨가 이 일을 도왔다. 처음에는 판로도 없고 인건비도 부담이라 도와준다는 게 어쩌다보니 영숙씨 일이 되어버렸다.

영숙씨는 집(서울)과 철원 아들집을 오가며 된장 고추장 청국장을 만들었다. 집에서 식구들 먹는 것을 담는 것과 달리 대량으로 장을 담그는 일은 녹록지 않았다. 여러 번의 실패와 시도 끝에 지금은 어느 정도 자리잡아 가고 있다.

다큐로 본 영숙씨의 삶

 영숙씨 내외와 바깥 사돈. 두 집안 어른들의 고된 노동 앞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영숙씨 내외와 바깥 사돈. 두 집안 어른들의 고된 노동 앞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 MBN 화면캡처

귀농한 젊은 부부가 엄마와 함께 장을 만들어 판다는 소식이 전해졌는지 한 방송국에서 취재를 해서 방송을 탔다. 유쾌한 그녀의 모습을 TV로 보니 나도 덩달아 즐거웠다.

그 후로 한 달쯤, 다른 방송에서 영숙씨의 생활을 다큐로 찍었다. 설 연휴를 앞두고 방송이 되는 날, 가족 단톡방에 방송을 보라는 톡이 왔고 나도 시청했다. 그 전에도 즐겁게 시청했기 때문에 별 생각 없이 보던 나는 방송이 시작한 지 5분도 되지 않아 목울대가 뜨거워졌다. 이 다큐는 방송시간이 길다보니 내가 알지 못했던 영숙씨의 적나라한 삶이 담겨있었다.

철원 된장을 만드는 집에는 영숙씨 내외, 아들 내외와 어린 딸. 그리고 바깥 사돈이 같이 살고 있다. 집과 공장은 붙어있고 문 하나만 열면 바깥이라 집 안에서도 두꺼운 옷을 입고 생활한다.

맨손으로 살아보겠다고 일을 시작한 자식들을 돕기 위해 바깥 사돈까지 와서 장 만드는 일을 돕고 있었다. 안사돈은 지방에서 가게를 운영하고 있고 며느리는 서울에서 직장을 다녀 주말에만 철원에 온다. 실질적으로 부엌일을 할 사람은 영숙씨 뿐이다.

철원의 기온은 영하 20도. 영숙씨는 새벽 3시면 일어나 80kg 콩을 씻어 가마솥에 삶고 맨손으로 시래기를 씻어 국을 끓이고 새벽밥을 지어 식구들 먹이고, 치우고, 어린 손녀딸을 등에 업고 청소를 한다. 시퍼런 손은 퉁퉁 부어있고 안으로 굽어서 쫙 펴지지도 않는다.

말 하나도 허투루 하지 않는 점잖은 바깥 사돈 또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새벽부터 앞마당에 수북한 눈을 쓸고, 나무를 해오고, 아궁이에서 불을 지피고 밤이면 공장 한 켠의 초라한 숙직실에서 고단한 몸을 누인다.

영숙씨의 남편 그리고 아들 역시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이고 있지만 영숙씨의 노동에 비할 수는 없다. 장을 만들고 식구들 끼니뿐 아니라 새참까지 챙기느라 영숙씨는 몸도 마음도 쫒기고 있었다.

두 집안 어른들의 고된 노동 앞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부모를 고생 시킨다며 아들을 질책할 수도 없다. 아픈 몸으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서울 토박이인 그가 그곳까지 가서 그 일을 하기 까지 그 또한 얼마나 부대꼈을지...

고모가 편안하고 행복했으면

화면에 비치는 영숙씨의 얼굴은 주름이 깊고 기미가 가득하고 시름이 꽉 차 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영숙씨의 충혈된 눈동자가 내 마음을 흔들었다. 눈물이 흘렀다. 바깥 사돈의 칠순을 맞아 그를 집에 보내기 미안한 영숙씨는 그 집안 식구들까지 불러 그 곳에서 잔치를 치렀다.

전을 부치고 나물을 무치고 고기를 삶고 그야말로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렸을 때 안사돈과 그 쪽 집안 자식들이 도착했다. 안사돈의 얼굴에는 광이 났다. 철원에서 칠순잔치를 한다고, 그것도 촬영 한다고 하니 예의상이라도 치장을 했으리라.

우아한 머리 스탈에 화려한 메이크업. 환한 미소. 우리 영숙씨는 앞치마와 일체가 되어 재투성이 신데렐라처럼 옆에 앉아있었다. 다들 선한 사람들이고 누구의 잘못도 없는데 고개가 떨궈졌다.

방송이 끝나고 그녀에게 전화를 할 수가 없었다. 목소리를 들으면 무너질 것 같았다. 한참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고모 사랑 합니다' 문자로 대신했다.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언니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너무 가슴이 아파서 끝까지 보는 게 고통이더라."

나는 수화기를 든 채 고개만 끄덕였다. 전화를 끊고 나니 오빠한테 전화가 왔다.

"휴... 속이 상해서 혼났다. TV에 나온다 하기에 된장이 맛있다고 홍보 영상이라도 나올 줄 알았더니."

피가 물보다 진하긴 한가 보다. 다들 다른 사람은 안 보이고 영숙씨의 고된 노동에 아파하고 있으니.

며칠 후, 명절날 용돈을 조금 보내고 안부 전화를 했다. 배우를 했어도 손색이 없었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영숙씨는 쓸데없이 돈을 부쳤다고 난리다. 좀 한가해지면 반찬을 해다 주겠다고 하신다. 이번에는 내가 바람처럼 사라질 차례다.

"저 바빠서 집에 없어요. 제가 한가해지면 갈게요."

방문할 날을 잡자고 할까봐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고모, 저도 이제 나이 오십 다 되어가요. 이제 제가 맛있는 것 만들어 드릴게요. 저는 고모가 편안하고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사랑합니다. 건강하세요.


#주간애미#명랑한 중년#고모#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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