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15일 저녁, 93세의 국어학자가 세상을 떠났다. 고려대 명예교수이자 동숭학술재단 이사장 김민수 선생. 선생이 이룬 업적은 산처럼 높지만, 선생이 세상을 떠났음을 알리는 기사는 짧은 부고 하나뿐.
"김민수(고려대 명예교수)씨 별세, 전영우(국민대 명예교수.문화재위원회 천연기념물 분과위원장)씨 장인상=15일, 고려대 안암병원 장례식장 201호, 발인 18일."
평창 동계올림픽에 관심이 집중되던 때 한국 사회는 이처럼 선생의 부고를 무심히 흘려들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선생이 세상과의 작별을 준비하던 때 한국 사회는 선생이 선구적으로 연구했던 남북의 언어 문제에 새삼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음식을 놓고 대화가 이어지는 와중에 임종석 비서실장은 "남북한 말에 어느 정도 차이가 있어도 알아들을 수 있는데 오징어와 낙지는 남북한이 정 반대더라"라고 했고 김 제1부부장은 "그것부터 통일을 해야겠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연합뉴스, 2018.2.10.)
남북의 언어 차이를 소재로 한 짧은 대화가 언론의 조명을 받을 만큼 분단 시대를 사는 한국인들에게 남북의 언어 차이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주제다. 그런데 남북의 언어 차이가 학문적 관심의 대상이 되고 남북의 언어 통일이 국어정책의 주요한 문제로 부각되기까지 선생이 기울였던 노력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남북 대립이 첨예하던 1964년, 선생은 하버드대학 옌칭연구소의 방문학자로 미국 땅을 밟았다. 선생은 그곳에서 북의 언어학 서적을 비롯한 다양한 자료들을 접하였고, 이를 수집, 정리하면서 북의 언어정책이 어떤 원리로 수립되었고 그 정책이 우리말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연구했다. 당시는 주체사상이 북의 지도이념으로 자리 잡는 시기였으며 이에 맞춰 문화어 정립을 위한 말다듬기 운동이 시작되던 때였다.
선생은 이러한 상황을 언어 이질화의 초기 단계로 보고 남북 언어규범의 통합을 목적으로 한 북한 연구를 준비했던 것이다. 시대적 한계로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지만 선생은 20여 년 연구의 결과물인 <북한의 국어연구>(1985)를 세상에 내놓으며 북한 언어 및 국어학 연구의 물꼬를 텄다.
그리고 젊은 학자들을 규합하여 <북한의 어학혁명>(1989), <북한의 조선어연구사>(1991), <김정일 시대의 북한언어>(1997), <남북의 언어 어떻게 통일할 것인가>(2002) 등을 연이어 출판하며 북한 언어 연구를 심화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선생은 남북 언어규범 통합의 3원칙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첫째, 남북의 규범을 공평하게 절충한다. 둘째, 절충되지 않는 것은 남북의 규범을 복수로 수용한다. 셋째, 복수로 수용되지 않는 것은 제3의 기준을 채택한다."
선생이 제안한 남북 언어규범 통합의 3원칙은 국어정책의 원리에 근거하여 남북 언어 통일의 방안을 모색하고, 남북 언어 통일의 관점에서 국어정책의 방향을 찾으려 한 결과였다. 선생은 국어정책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던 시기에 <국어정책론>(1973)을 저술하면서 국어정책론의 기반을 닦았다.
선생은 특정 이념을 앞세워 주장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국어정책을 수립해야 함을 강조했는데, 이는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조사를 수행할 국어연구기관을 설립해야 한다는 문제의식과 맞물려 있었다.
선생은 일찍이 언론 기고(동아일보, 1958.10.1./ 서울신문, 1958.10.11.)를 통해 국어연구소를 설립하여 국어정책의 기반을 조성할 것을 주문한 바 있었다. 1984년 국어연구소가 설립되고 오늘날 국립국어원으로 발전해 온 과정을 볼 때, 국어정책에 대한 선생의 문제의식은 시대의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한 결과였음을 알 수 있다.
선생은 말의 힘을 과장하는 관념론과 거리를 두고서, 우리말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을 예의주시하며 국어정책의 방향을 모색한 현실주의자였다. 따라서 선생의 국어정책 연구가 우리말을 정리하고 교육하는 데로 확장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선생은 국어사전과 학교 문법서의 편찬을 통해 국어학 연구의 실용화에 기여하였다.
한글학회 사전편찬원으로 1929년부터 이어져 온 <큰 사전>(1957)의 편찬 사업을 마무리하는 데 기여했고, 이후 <새 사전>(1959), <종합국어사전>(1968), <새 국어사전>(1972), <원색 도해 신국어대사전>(1974), <금성판 국어대사전>(1992), <우리말 어원사전>(1997)을 편찬하며 국어사전의 다양화와 혁신에 기여했다.
또한 선생은 남광우, 유창돈, 허웅 등 당대의 중견 국어학자들과 문법서를 집필하며, 전통적인 품사론 중심의 학교문법을 혁신할 것을 주장하였고, 문장론 중심으로 실용성을 강화하는 문법교육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재외동포의 이중어 문제와 한국어의 국제적 보급 문제가 중요하게 부각될 것을 예측하며, 이 문제를 학문적으로 다룰 이중언어학회(1981)를 설립하였다. 재외동포 및 세계인을 대상으로 한 한국어 보급 사업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오늘날, 40년 전 이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제안하고 실천의 기반을 만든 선생의 선견지명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선생은 이처럼 시대의 요구에 예민하게 귀 기울이며 우리말과 우리 삶의 문제에 학문적인 해답을 내놓았던 국어학자였다. 언어의 내적 질서를 엄밀히 분석하고 국어 자료의 역사적 의미를 실증적으로 분석한 국어학자이면서도 현실의 문제에 답하는 것을 소명으로 생각했던 태도는 선생의 삶이 빚어낸 정체성이었다.
1926년에 출생한 선생은 엄혹했던 일제강점기에 조선어학회 기관지 <한글>을 구독하던 친형 김윤수의 영향을 받으며 청소년기를 보냈다. 공과대 진학을 꿈꾸었던 19세 청년은 1945년 해방 직후 열린 조선어학회 간사장 이극로의 강연에 감명을 받고 우리말 연구에 일생을 걸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1945년 조선어학회 국어강습원 파견 강사 선발 시험에 응해 합격한 후 한글 보급 운동에 참여하였다.
1947년 선생이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자, 박문출판사 국어사전 편찬부 편찬원으로 근무하던 형 김윤수는 선생이 국어학 연구에 매진할 수 있도록 격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한국전쟁 때 김윤수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실종되자, 선생은 형의 뜻을 이어 국어사전을 편찬할 것을 결심하였다.
결국 선생은 일제강점기의 어문운동을 이끌던 조선어학회의 전통을 자양으로 국어학 연구의 뜻을 세웠고, 국어학 연구 과정에서 이룬 성과를 자양으로 실천 활동의 폭을 넓혔던 것이다. 실증적이고 이론적인 연구에서 탁월한 성과를 냈던 선생이었지만, 언제나 시대적 요구를 한 발 앞서 감지하고 이에 대응하는 연구를 선도했던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말글과 관련한 많은 것들이 선생이 이룬 학문적 성과와 실천에 기대어 시작되었고 존속되고 있다. 우리말 공동체가 지속되는 한, 남북 언어 통합을 위한 연구와 실천은 지속되어야 하고, 재외 동포와 세계인을 위한 우리말 보급은 더 확대되어야 하고, 우리말사전은 더 풍부하고 정교해져야 하고, 우리말의 원리와 작용은 더 정확히 규명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 사회가 선생의 삶을 기억해야 할 이유다.
덧붙이는 글 | 최경봉 기자는 원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