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에 도움 되는 작곡가가 되겠다는 신념으로 유럽 유학을 가 세계적 명성을 얻었지만, 살아 생전 고국에 정착하기는커녕 간첩으로 몰려 국내로 납치돼 옥고까지 치렀다가 독일로 되돌아가 생을 마친 윤이상(1917~1995년).
그의 유해가 사후 23년 만인 25일 오후, 고향인 경남 통영으로 돌아왔다. 통영시 추모공원 내 공설봉안당에 임시 안치됐다. '박근혜 무죄석방 천만인 서명운동본부' 회원 50여 명이 반대 집회를 벌이는 가운데, 그는 그렇게 고향의 품에 안겼다.
'통영 바다를 보고 싶다'는 게 그의 생전의 뜻이었다. 이에 따라, 3월말 열리는 통영국제음악제 개막에 맞춰 통영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통영국제음악당 인근에 묘소를 마련한다고 한다.
정통성이 약한 박정희 정권 때는 간첩 조작사건이 유독 많았다. 간첩을 잡아내는 게 아니라 제조하는 시절이었다. 39세 때인 1956년 처음엔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윤이상도 그 그물에 걸려들었다.
5·16 쿠데타 6년 뒤인 1967년 6월, 50세의 윤이상은 동백림(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으로 서독(독일)에서 납치돼 고국으로 끌려왔다. 극심한 가난 속에 돈을 벌어가며 공부하느라 고국행 비행기를 탈 수 없었던 그는, '중앙정보부 후원'으로 그렇게 고국 땅을 밟았다.
윤이상이 세계적 작곡가로 조명받은 시점은 1972년 뮌헨 올림픽에 오페라 <심청>을 내놓은 뒤였다. 1967년이면 유럽에서 국제적 주목을 받으며 음악적으로 성장할 때였다. 이때 서독에서 납치된 그는 한국도 아닌 서독 현지에서부터 고문을 받았다.
음악가 윤이상에게 자행한 '소음 고문'
'박정희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해주겠다'며 전화로 윤이상을 불러내 서독주재 대사관의 꼭대기 다락방에 감금한 정보요원들은 그때부터 고문을 시작했다. 이른바 소음 고문이었다. 비좁은 방에 가두고 라디오 볼륨을 최대한 높였다. 귀청을 찢는 수준이었다.
아래층으로 끌려가 조사받을 때가 돼서야 고문은 끝났다. 하지만 잠시였다. 원하는 진술을 해주지 않자, 정보요원들은 또다시 다락방으로 끌고가 다음날 오후까지 소음 고문을 가했다. '귀로 먹고 산다' 해도 과언이 아닌 음악가에 대한 고문치고는 너무 악랄하고 고약하고 얄궂은 것이었다.
독일 소설가 루이제 린저와의 대담록 <윤이상, 상처 입은 용>에서 윤이상은 이렇게 회고했다. 소음 고문이 처음 시작됐을 때의 상황이다.
"그들은 라디오를 아주 크게 틀어놓고 그 소리를 점차 키웠습니다. 나는 라디오를 꺼달라고 부탁했지만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고문의 제1단계, 즉 소음 고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뭔가 먹을 것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귀청 떨어질 정도의 소음을 조성한 상태에서 음식 그릇을 내놓았다. 너무 비인간적인 처사였다. 이런 패턴은 반복됐다. 다음 번 조사 뒤에는 이상한 약물을 먹이면서 소음 고문을 가했다.
원하는 진술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하는 답변은, 최덕신 독일주재 대사가 북한과 연계됐다는 증언이었다. 최덕신은 평북 의주 출신에 독립운동가 최동오의 아들이다. 8·15 광복 뒤 월남해 국군과 외무부에서 일했다. 8·15 뒤에 월남한 사람들은 대개 다 반공정신이 투철했다. 그런 사람까지 간첩단 사건에 엮으려 했던 것이다.
도쿄 올림픽에 출전할 단일팀 문제를 놓고 1963년 1월 24일 스위스 로잔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서 제1차 남북체육회담이 열렸을 때, 북한이 '앞 면은 태극기, 뒷 면은 인공기'로 하자는 파격적 제안까지 내놓으며 단일팀 성사에 열의를 보인 데 반해, 당시 외무장관이던 최덕신은 "태극기를 꼭 넣어라"며 "안 되면 회담 보이코트도 불사한다"는 강경한 훈령을 스위스 현지에 보내 회담을 더욱 꼬이게 만들었다. 그 정도로 북한에 대항하는 반공 의지가 강렬했다.
그런데 그는 결국 북으로 망명했다. 동백림 사건 9년 뒤인 1976년이었다. 종교 기반인 천도교에서 영향력을 상실한 데다 박정희 정권과의 불화까지 생기자, 북으로 망명해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지냈다. 하지만 1967년 당시만 해도 최덕신이 반공주의자였으므로 윤이상은 "휼륭한 대사이며 반공주의자입니다"라고 진술했다가 더욱 더 심한 소음 고문을 당했다.
윤이상 납치에 여권도 필요없었다그 뒤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벌어졌다. 윤이상은 대한민국 어디선가 서울 남산으로 끌려간 게 아니다. 저 멀리 서독에서 일본을 거쳐 남산으로 끌려갔다. 이 루트는 중앙정보부가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외국 주권과 충돌하는 루트다. 그런데도 중앙정보부는 마치 국내에서 활동하듯, 상당히 거침 없이 윤이상을 납치했다.
납치 당시 윤이상은 서베를린에 있었다. 이곳은 서독 땅이지만, 동독 땅에 둘러싸여 있었다. 서베를린에서 서독 수도 본에 가려면 동독 땅을 지나야 했다. 그래서 윤이상이 서베를린을 벗어나려면 여권을 제시해야 했다.
서베를린에서 박정희 친서 이야기를 듣고 정보요원들을 만나러 나갔을 당시, 윤이상의 몸에는 여권이 없었다. 그런 윤이상에게 정보요원들은 "대통령 친서가 본의 대사관에 있으니 그리 가자"고 말했다. 여권이 없으면 서베를린 밖으로 나갈 수 없기 때문에 윤이상은 "여권 가지러 집에 좀 갔다 오겠습니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정보요원들은 안 된다고 말했다. 여권은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윤이상을 데리고 서베를린에서 서독을 거쳐 일본을 지나 한국으로 날아갈 생각이었는데도 여권이 필요 없다고 말한 것이다. 서베를린 여권 검사소에서 벌어진 상황을, 소설적 형식이 약간 가미된 박선욱의 <세계 현대음악의 거장 윤이상>은 이렇게 묘사한다.
"남자는 윤이상을 여권 검사소로 데려갔다. 그들이 공항 직원들에게 몇 마디 건네자 순순히 길을 터주었다. 평소에 여권 없이는 통과시켜 주지 않는 직원들이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는 게 이상했다." 서독 정보기관 혹은 서독 공항이 중앙정보부에 협조한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낳을 수 있는 장면이었다. <윤이상, 상처 입은 용>에 따르면, 윤이상을 태우고 함부르크공항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는 차 안에서 정보요원은 "아시겠지만 달아나려 해도 소용없소"라며 "우리는 독일 정보기관과 협정을 맺고 있으니까"라고 협박했다. 정보요원까지도 서독과의 협조를 운운했던 것이다.
서독뿐 아니라 일본의 관계기관까지 중앙정보부를 돕는 게 아닌가 의심할 만한 상황이 뒤이어 벌어졌다. <세계 현대음악의 거장 윤이상>은 이렇게 묘사한다.
"함부르크공항에는 한국 총영사와 일본항공 지점장이 나와서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윤이상은 그들을 멍한 눈으로 쳐다본 뒤,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이끄는 대로 일본항공 비행기에 탑승했다. 윤이상이 탄 비행기 앞좌석은 텅 비어 있었다. 공항 직원들은 윤이상의 여권도 조사하지 않고 통과시켜 주었다. 함부르크를 떠난 비행기는 알래스카를 거쳐 도쿄에 도착했다. 한국 비행기로 갈아탈 때도 일본의 공항 관계자들은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았다."2006년 1월 26일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발표한 자료집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인용된 진술에서 최덕신 당시 서독대사는 "몇몇 나라의 국경을 지나야 하는데, 이것은 한국 외교 범위를 넘어서는 일로서 서독, 나아가 다른 나라 기관의 협조와 묵인 없이는 해내기 어려운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위의 발전위원회는 외국 정보기관과의 협력을 증명할 문건이 없다는 이유로, 독일 정보기관과의 협력설은 "사실무근인 것으로 확인"됐다고 결론지었다. 위 자료집에 나오는 대목이다.
"1967년 6월 15일 주독 거점의 보고 문건 상에 '독일기관 및 경찰 협조 불가함으로 은밀 활동 전개, 현지 경찰과 마찰 시 case by case로 해결' 문구로 보아...... 독(獨) 기관과의 협력은 없었던 것으로 판단."5일 뒤인 6월 20일에 중앙정보부가 서독 공작팀 앞으로 "모든 검거 호송은 극비리에 진행시킴을 원칙으로 하되, 부득이한 경우 독일 기관과 협조할 것"이라는 공문이 전달됐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협조를 증명할 만한 명확한 문건이 나오지 않았다면서 위와 같은 결론을 내린 것이다. 정보부 요원들이 일기 쓰면서 활동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윤이상은 우주에 내장된 소리의 바다 속에서 최상의 음을 건져내는 법을 배우겠다며 유학을 떠났다. 그런 윤이상한테,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는 라디오 볼륨을 최대한 켜서 고막을 괴롭히는 소음 고문으로 그를 고통스럽게 했다.
윤이상은 유럽 음악의 본고장 독일에서 최고의 실력을 닦고 국제적 기반을 쌓은 뒤 고향에 돌아가려 했다. 그런 윤이상한테, 박 정권의 중앙정보부는 서독·일본과의 국제적 협조가 의심되는 정황 속에서 납치해 고문을 가하고 무기징역까지 선고했다. 꿈과 희망을 절묘하게 꺾는 고약하고 얄궂은 방법으로 박정희 정권은 한 음악가를 간첩단으로 엮으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