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온 '효리네 민박'. 겨울에도 변함없이 아름다운 제주 그리고 효리 부부의 삶을 보며 '제주앓이'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제주 한달살기, 제주 이주에 대한 관심도 다시 높아지고 있는데요. 제주에 실제로 살았던, 현재도 살고 있는 이들에게 환상 속 제주가 아닌 ‘리얼 제주’ 이야기를 들어 봅니다. [편집자말] |
*주의 : 제주살이에 대한 로망이 깨질 수도 있습니다.
나는 제주에서 3년 가까이 살았다. 귀농도 귀촌도 제주살이에 대한 로망 때문도 아닌 '직장' 때문이었다. 내가 지원한 직장이었지만 덜컥 합격 통보를 받고 나니 '아 이제 정말 제주'도'에서 살아야 하는 것인가?' 순간 망설여지기도 했다. 그곳은 '섬' 이었으니까.
나 또한 여행을 좋아하고 타지에서 혼자 살았던 경험도 있었고 보통의 사람들보다 적응력도 뛰어난 편이었지만 막상 진짜 아무 연고도 없는 섬에서 혼자 살아야 할 생각을 하니 살아보기도 전에 마음이 고립된 듯했다.
물론 나도 있었다. 제주살이에 대한 로망. 에메랄드 빛 바다와 푸른 숲과 오름들, 상쾌한 바람과 노란 감귤이 지천에 널려있고, 느리게 느리게 그렇게 자연과 함께 여유롭게 사는 삶. 하지만 로망은 현실을 뛰어넘을 수 없는 법. 나에게 제주는 로망이 아닌 현실이었다. 그것은 '삶'이었으니까.
나에게 제주는 로망이 아닌 현실
친구들은 제주에 살고 있는 내내 나에게 물었다.
"창문 열면 바다 보여?" "길거리에서 귤 따먹어?" "스타벅스는 있어?" 나는 대답한다.
"얘들아 창문 열면 롯데마트가 보이고, 바다 보려면 나도 차타고 운전해서 나가야 해, 귤은 나도 마트에서 돈 주고 사다 먹어. 그리고 스타벅스는 집 근처에 세 개나 있단다."제주 태생의 회사 동료는 육지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가장 많이 받는다고 했다.
"너희 엄마 해녀야?" "집에 감귤나무는 몇 그루나 있어?" 회사 동료는 대답한다.
"우리 엄마 주부고, 우리 집 아파트야."그리고 제주에서 태어나 60년을 산 직장 상사는 이렇게 얘기했다.
"바닷가 앞에 집 짓는 사람들은 죄다 육지 사람들이야! 실제로 살아 보면 해풍에 파도에 아휴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고. 진짜 명당 자리는 바다 앞이 아닌 한라산이 보이는 곳이지."실제로 바닷가 앞에 있는 집들은 두 종류. 카페이거나 바다뷰에 대한 로망이 있는 육지 사람들이 지은 집들이거나.
제주도는 문명의 손길이 거쳐 가지 않은 고립된 섬이 아니며, 제주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소길댁' 효리 언니처럼 사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육지 사람들이 기억하고 꿈꾸는 제주살이의 모습은 '여행지'로서의 제주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여행일 뿐. 삶은 여행이라는 노래도 있다지만, 여행과 삶은 분리되었을 때 효과가 극대화된다. 동일시한다면 그 반대일 것이다.
제주에 살아보니
나는 서귀포 어느 마을 안쪽 혹은 애월 어딘가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귀촌을 한 것이 아니라 제주 시내 한복판에서 바쁘게 직장 생활을 하며 제주에서 살았다. 그러니 일반적으로 꿈꾸는 제주살이와는 차이가 있었다.
평일에는 회사 업무에 바빠 섬에 살면서도 바다 한번 볼 수 없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주말에는 나 또한 제주의 바다를 즐기고 오름을 오르며 잠깐의 여유를 만끽하기도 했다. 그 기억들은 분명 나에게도 행복한 기억들이다. 나도 제주의 풍경으로 위안을 받았고 여전히 제주도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하지만 살아보니 다 똑같다. 그곳이 서울이든 부산이든 제주든 삶의 최소한의 패턴들은 육지와 섬 할 것 없이 비슷하다. 생활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하고, 먹기 위해 장을 봐야 하고, 살기 위해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
사실 제주도민들의 진짜 맛집은 흑돼지집도 횟집도 아닌 빕스와 아웃백이다. 연인과 바다를 보며 낭만적인 데이트도 하겠지만 CGV에서 영화를 보고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신다. 출.퇴근시간 교통체증과 비싼 물가는 서울과 똑같다고 말할 수 있다.
오히려 인터넷 쇼핑을 할 때마다 꼬박꼬박 붙는 도서산간비 추가배송비는 기본 옵션이며, 큰 가구와 일부 식품 등은 아예 제주 지역 배송 불가 메시지를 받기 십상이다. 아 참고로 제주도에는 백화점과 복합 쇼핑몰이 없다. 이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 많은 여성들은 진심으로 깜짝 놀란다.
나 또한 바다도 오름도 좋았지만 백화점, 쇼핑몰이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물론 백화점을 바라고 제주도를 가는 것은 아니지만, 도시 생활이 주는 기본적인 편리한 옵션들을 완전히 다 버리고 사는 것은 육지 사람들에겐 결코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런 물리적인 것들은 괜찮다. 더 지불하거나 육지에 올라갈 때 면세점 찬스를 쓰면 되기도 하니까. 예상 외로 여파가 크고 어찌 할 수 없는 것은 바로 '날씨'다.
강풍주의보, 풍랑주의보, 윈드시어(돌풍)경보 제주에 산다면 돌하르방과 한라봉 보다 더 익숙해져야 하는 단어들이다. 배가 끊기고 비행기가 결항되는 것은 기본이요, 새벽 내내 덜컹거리는 창문 소리에 익숙해 져야 하며, 여름에는 습한 날씨에 빨래가 잘 마르지 않아 집집마다 아니 방방마다 제습기는 필수. 쨍했다가 갑자기 비가 왔다가 태풍이 부는 일이 분 단위로 바뀌는 날씨는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사람의 생활뿐만 아니라 감정까지도 영향을 미친다.
강풍주의보에 모든 비행기가 결항됐던 어느 날에는 방에서 덜컹거리는 창문을 바라보며 '내가 만약 지금 여기서 갑자기 죽는다 해도 부모님도 올 수 없겠구나.' 창문보다 가슴이 더 덜컹했다. 극단적인 생각이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기에 제주의 날씨는 내 감정을 그렇게 수 없이도 들었다 놨다 했다.
우리는 이효리가 아니고, 제주는 '섬'이다
제주에 사는 3년 가까운 시간동안 "제주에 살아요"라고 말하면 열 명 중 열 명 모두에게서
"우와 진짜 부럽네요. 저도 제주도에서 살고 싶어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 나는 "좋죠. 근데 사람 사는 거 서울이나 제주나 다 똑같아요"라고 말하곤 했다.
사람의 삶이 '제주도'라는 배경 하나만으로 순식간에 여유, 평화, 느림, 행복으로 다 바뀌지는 않는다. 아쉽게도 우리의 삶은 영화가 아니기에, 제주도로 이주만 하면 영화 속 장면처럼 '몇 달 후, 몇 년 후 해피엔딩'으로 깔끔하게 편집되기에는 구구절절하고 현실적인 삶의 패턴들이 있다. 먹고, 자고, 돈 벌고, 사고와 같은 패턴들.
그러니 제주도에서 살고 싶다 생각한다면, 무얼 먹고 어디서 자고 무엇으로 돈을 벌고 이것들을 어떻게 반복할 것인가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들이 필요하다. 물론 돈이 많아 그 돈으로 땅도 사고 더 안 벌어도 되는 것이라면 예외일 수도 있겠다.
언젠가 라디오에서 "떠나고 싶지 않은 곳으로 떠나고 싶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아마도 이 말은 떠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좋은 곳에서 살고 싶다는 마음과 내가 지금 있는 이곳이 그런 좋은 곳이 아니니 그런 곳을 찾아 떠나고 싶다는 마음이 동시에 묻어있는 것이겠다. 요즘 대세에 따르면 그 곳은 많은 육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제주도'로 생각 될 수 있을 것이다.
제주도에 살고 싶다는 마음은 단순히 '제주도'라는 섬이 주는 풍경 때문만이 아닌, 섬에 살지 않아도 섬처럼 마음이 고립된 현대인들의 탈출과 휴식 욕구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 탈출과 욕구는 '여행'으로도 충족될 수 있으며, '삶'이 들어 간다면 더 깊게 고민해야 할 일이다.
기억해야 할 것은 멋진 제주의 풍경들은 이주의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 풍경이 내 삶을 다 바꾸어 놓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제주의 바다와 숲과 오름은 죄가 없다. 일면식도 없는 효리언니와 프로그램 제작진들에게는 죄송하지만 <효리네 민박>이 죄라면 죄다.
내가 봐도 그렇게 살 수 있다면 당장 다시 이주하겠다. 민박집이 너무 좋고 프로그램을 너무 잘 만들었다. 그 집과 땅을 지우고, 배경음악을 지우고 현실적으로 생각해 봐야 할 일이다. 내가 가진 돈은 얼마이며 어떻게 살 것인가?
중요한 건 우리는 이효리가 아니고 우리의 집은 효리네 민박집이 아니며, 무엇보다 제주도는 '섬'이다. 잊지 말자.
그래서 제주도에 살고 싶다는 그대들에게 묻는다.
"그러니까 제주도에 살면서 뭐 먹고 살 거예요?"흑돼지라고 대답하지는 않겠지. 그러니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대답하고 준비할 수 있을 때까지 제주도는 여행으로 가자. 참고로 제주의 삼다(三多)는 더 이상 바람, 여자, 돌이 아닌 카페, 펜션, 렌트카임을 미리 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