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어느 집 퇴비장에 웬 노란 꽃이 피어 있었다. "저게 뭐지?" 서순남은 며칠을 굶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비칠거리며 퇴비장 가까이 갔다. 그런데 노란 것은 꽃이 아니라 밥 덩어리였다. 사람들이 먹다 남은 밥을 버린 것이고, 밥이 오래되어 곰팡이가 난 것이었다.
서순남은 누가 볼까봐,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곰팡이 난 밥 덩어리를 얼른 주웠다. 며칠째 배를 곯아 방에 누워 있는 동생들을 생각하며, 부리나케 집으로 왔다. 집 앞 개울에서 밥을 씻었다. 방문을 열고 동생들한테 "옥분아 밥 갖고 왔다. 밥 먹자"고 하자, 금방 죽을 것 같이 누워 있던 동생들이 벌떡 일어났다. 옥분이가 "언니, 밥 어디서 난 거야?"라고 묻자, "응 누가 준 거야. 얼른 먹자"
두 살짜리 막내 동생과 함께 셋이서 옹기종기 앉아 밥 덩어리를 허겁지겁 먹었다. 그런데 그 밥이 왜 이렇게 꿀맛이던지. 1951년 당시 옥분이는 여섯 살이었고, 그 아래 동생은 두 살이었다.
하지만 퇴비장에 날마다 버려진 밥이 있지는 않았다. 바느질 일감 찾아 돈 벌러 나간 엄마 박선례(1914년생)는 이틀에 한 번꼴로 집에 왔다. 하지만 엄마가 가져 오는 밥은 아이 세 명이 이틀 동안 먹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다보니 물로 배를 채웠다. 물을 먹고 조금 있다 보면 생목이 올라 와 죽을 지경이었다.
항상 굶다보니 머리도 어지럽고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다리도 후들거려 제대로 걷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집 구정물통이 눈에 들어왔다. 무의식중에 구정물통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손을 휘저으니 밥찌꺼기가 건져졌다. 밥은 이미 상해 썩기 시작했지만, 다시 손을 구정물통에 넣었다. 몇 차례 반복해 밥을 건진 후 집으로 왔다. 구정물통에서 건져온 밥을 물에 씻은 후 동생들 앞에 놓았다. 동생들은 화등잔만한 눈을 밝히며 달려들었다. 서순남이 80평생 이제까지 먹어 본 음식 중에 가장 맛있게 먹은 것이다.
애기업개로 팔려가고남들이 보면 정신 나간 아이처럼 보이는 밥 구걸은 그나마 오랜 기간 지속되지 못했다. 가정형편은 더욱 옥죄어 급기야는 가족들이 생이별을 해야 했다. 엄마는 일감을 찾아 다른 집으로 가고, 동생들은 친척 집에 맡겨지고, 서순남은 애기업개로 팔려 갔다. 애기업개로 일하러 갔는데, 입부터 딱 벌어졌다. 그 집 아줌마, 아저씨 포함해 집 식구가 14명이나 되었다. 애기업개 일은 단순히 어린 아기 돌보는 일로 끝나지 않았다. 빨래, 청소, 설거지 그야말로 전천후 식모 역할이었다.
"순남아 물 떠와라", "순남아 밥 좀 더 갖고 와", "순남아 여기 다꽝(단무지) 갖고 와라" 부엌에서 국에 말은 밥을 막 뜨려 하는데, 주인집 식구들이 서순남을 부르는 소리는 끝이 없었다. 14명의 밥 시중을 드는 일은 고역(苦役)이었다. 식구들 밥 시중을 모두 한 후에 숟가락을 드는 순간 주인집 아줌마가 "야! 너는 아직도 밥 먹고 있냐. 얼른 밥상 치워 이 계집애야" 하는 것이 아닌가. 결국 이날도 밥 한 숟가락 뜨지 못했다.
목구멍에 풀칠하기 위해 애기업게로 나섰지만 풀칠은커녕 구박덩어리로 전락했다. 밥은 제대로 먹지도 못했고, 툭 하면 주인아줌마한테 혼났고, 매질을 당했다. 그릇 깨뜨렸다고 혼나고, 혼나서 서러워 울면 운다고 매질을 가했다. 이렇게 해도 혼나고 저렇게 해도 혼나는 일만 있었다. 일 년 전까지 귀하게만 컸던 서순남이 이렇게 구박덩이가 된 이유는 뭘까?
한 달간 시신 수습하러 다녔지만..."아버지는 어디 가셨냐?" 구장 아저씨는 마당에 들어서며 서순남에게 물었다. "들에 나가셨는데요"라고 하자 "아버지 오시면 우리 집으로 오시라 해라"고 했다. 저녁 때 밥상머리에서 아버지에게 구장 아저씨 말을 전하자, 아버지는 밥을 먹다 말고 구장 집으로 갔다. 그렇게 구장 집으로 갔던 아버지 서태준(1907년생)은 그날 밤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구장 집으로 간 지 3일 만에 옆집 아저씨가 헐레벌떡 뛰어 와서 엄마에게 "형수님! 형님이 돌아가셨대요"라며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했다. 서태준은 충주시 살미면 신당리 가느골의 다른 보도연맹원과 함께 살미지서로 갔다가 충주경찰서를 경유해, 충주시 호암동 싸리재에서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학살된 것이다.
박선례는 순간 마당에서 쓰러졌다. 박선례가 정신을 차리고 싸리재로 뛰어갔다. 마음만 급했지 계속 뛰어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30리길로 12km나 되었기 때문이다. 걷다가 뛰다가 해서 싸리재에 도착하니 목불인견의 상황이 눈앞에 펼쳐졌다.
수백 구의 시신이 숲 속에 있었고, 유가족들이 여기저기서 자기 가족을 찾기 위해 눈을 시뻘겋게 뜨고 있었다. 하지만 시신 찾기는 제 정신으로 할 일이 아니었다. 엎어져 죽은 사람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팔을 잡아 다니면 팔이 쑥 빠졌다. 한 여름이라 살이 급속히 부패한 것이다. 또한 시신들의 얼굴과 배, 팔다리에는 구데기와 벌레들이 꼬물꼬물 기어 다녔다.
한편에서는 구토하는 이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시신을 찾아 통곡하는 이들이 있었다. 박선례가 온종일 싸리재에서 시신을 찾았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다시 살미면 신당리까지 30리를 걸어 와 집에 도착했을 때는 혼이 나간 사람 같았다. 옷은 전부 피칠갑이 되었고, 머리는 흐트러져, 가족들의 눈에 엄마가 아니라 귀신같이 보였다. 박선례는 남편 시신을 찾기 위해 한 달간 싸리재로 갔다. 하지만 결국 남편을 찾지는 못했다.
4번의 자살 기도
애기업개로 일하던 어느 날이었다. 마을 개울가로 가서 얼음을 깨고, 한나절 동안 빨래를 했다. 손이 깨질 것 같았지만 중간에 멈출 수는 없었다. 다 하고 나니 손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고, 그날 밤 손등과 팔에서는 피가 줄줄 흘렀다. 피부가 트고 갈라져서 피가 난 것이다. 너무 아파 울고 있는데, 옆집 할머니가 마실 왔다가 보고 "순남아 이거라도 발라라"하며 내민 것은 들기름이었다. 들기름을 바르니, 잠깐 동안은 통증이 완화됐지만 그때뿐이었다. 몸과 맘이 너무 힘들어 자살하기로 결심했다. 마을에 큰 감나무가 있어 거기에 올라갔다. 떨어지려고 하는 순간 동네 사람에게 발견되어 죽음을 면했다. 그때 서순남의 나이 겨우 16세였다.
또 한 번은 빨래할 때 쓰는 양잿물을 먹으려고 했다. 양잿물이 한겨울에 얼어 가루로 있었는데, 몰래 먹기 위해 몇 시간 동안 손에 갖고 다녔다. 그러다 보니 손바닥 껍질이 전부 벗겨졌다.
열여섯 살 그해에는 또 하나의 비극이 서순남의 운명 앞에 닥쳐왔다. 엄마 박선례가 개울가에서 빠져 죽은 것이다. 실족사인지 자살인지는 모르지만 사랑하는 엄마가 죽은 것이다. 어린 서순남은 너무나 낙심해 목을 매 자살을 시도했지만 옆집 할아버지한테 발견돼 실패했다.
서순남(81세. 경기도 이천시)은 팔십 평생 살아오면서 모두 네 번의 자살 시도를 했지만 그때마다 누군가에게 발견되어 생명을 부지했다. "죽는 것도 맘대로 안 되는구나"라고 생각했지만, 다행히도 그녀가 34세에 헤어졌던 여동생 옥분이와 충북 괴산군에서 재회했다. 하지만 오빠는 6.25 당시 의용군으로 끌려가 소식이 없고, 언니는 6.25 전에 병으로 죽었다. 막내 여동생은 아직까지도 소식이 닿지 않는다.
한국전쟁은 서순남의 인생에 먹구름이나 마찬가지였다. 팔십이 넘은 지금 서순남의 유일한 희망은 아버지 서태준의 명예 회복이다. 보도연맹사건으로 학살당한 아버지가 명예 회복되어 자식이나 손주들한테 떳떳한 할아버지로 거듭나길 바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