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8월 페이스북 페이지 '성판매 여성 안녕들 하십니까'가 페이스북 코리아에 의해 통보 없이 삭제되었고 1141명의 연서명을 받아 복구됐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알려지며 사건을 다룬 기사들에는 성판매 이슈에 대한 반감과 몰이해에 기반한 성판매자/성노동자에 대한 혐오 발언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 기획을 통해 각 필자는 당시 달린 악플들을 유형별로 분류하여 하나씩 답변합니다. -기자말 5편
'충분히 비참한가' 성노동을 판단하는 이상한 논리 성매매, 가깝고도 먼 한창 학교에 다닐 무렵, 통학 버스를 타면 늘 지나는 거리가 있었다. 새하얀 웨딩드레스가 늘어선 길이었다. 나란히 줄지어 선 드레스숍들을 지나고 나면 몇 블럭 떨어진 곳에 다닥다닥 '방석집'이 이어졌다. 상징적이라고 해야 할지, 직관적이라고 해야 할지 이 거리의 끝엔 비뇨기과가 있었다. 언제 봐도 기이한 광경이었다.
대학 시절 나는 총여학생회 소속이었다. 정확히는 총여학생회 비상대책위원회였다. 투표 정족수를 채우지 못해 삼 년의 활동 기간 중 한 번도 학생회를 만들어 본 적이 없었다. 학칙상, 학생회가 출범하지 않으면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려 위원회 활동을 하게 돼 있다. '정상'일 때의 모습인 학생회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삼 년 내내 '비상' 상태였던 총여학생회에서 나와 내 친구들은 결혼, 성매매, 반성폭력, 성 소수자에 대한 텍스트를 읽었다.
서로 읽고 싶은 책을 들고 와 산발적으로 읽었기 때문에 어떤 텍스트였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느 책에서 '결혼과 성매매는 서로 대척점이 아니라 연장선에 있다'는, '아내와 창녀를 의도적으로 분리하는 남성 중심적 여성관에 반대해야 한다'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결혼 제도와 성매매는 모두 남성의 욕망 아래 여성을 도구화하는 가부장제의 전략으로, 이 둘은 결코 대칭적이지 않고 오히려 연속적이라는 주장이었다. 이 거리는 그야말로 책의 현현이었다.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던 내게 그 텍스트는 정말 깜짝 놀랄 만큼 새로웠다. 그 논의에 강하게 설득되어 그 이후에도 그 말을 기계적으로 외곤 했다. 하지만 그것도 그뿐, 내게 성매매는 늘 그 지점에서 멈췄다. 성매매 이슈와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늘 버스를 타고 먼발치에서 스쳐 지나가듯 바라만 보는 관찰자의 시선으로 머물렀다. '나와 상관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기보다는 무엇을 더 알아야 하는지 몰랐다. 그러나 내가 관심이 있건 말건, 성매매는 가까운 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회사 동기들과 술을 마시며 들은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회식에서 1차가 끝난 뒤 여성 직원들을 일찍 보내고 나면 남성 직원들끼리 헤어지는 척하면서 늘 2차를 가곤 했단다. 2차는 영등포의 성매매 업소이거나 노래방 도우미가 있는 노래주점이었다. 가기 싫었던 동기가 몰래 빠지면, 다음 날 어김없이 거센 타박이 돌아왔다. '순진한 척하지 말라'는 게 요지였다. 회사에서 젠틀하고 일을 척척 처리해서 존경해 마지않던 선배는 알고 보니 뻔질나게 업소를 드나드는, 그것도 후배들에게 돈을 내라고 강요하는 진상 성매매 광이었다.
다른 회사도 다르지 않았다. 방송사에 계약직으로 취업한 내 친구는 '방송하려면 이런 문화도 알아야 돼'라며 남성 피디가 룸살롱에 끌고 갔다. 친구를 포함해 두 명의 막내가 끌려 갔는데, 모두 여성이었다. 그 남성 피디는 언제나 여성 막내 직원들만 룸살롱으로 데려가 그들 옆에서 종업원을 추행해서 악명이 자자하다고 했다. 다른 여성들 앞에서 추행 당하는 종업원도 굉장히 불쾌해 했고, 기분 나빠하는 종업원과 혼자 신난 남성 피디 사이에서 내 친구 역시 괴롭고 힘든 시간을 겪어야 했다.
사실 나는 성매매 업소를 이용하는 남성들은 나와 정말 다른 곳에 있을 거라 막연히 믿어 왔다. 가상의 범죄자를 상상하는 것처럼, 딱 봐도 음흉하게 생겼거나 '악당'처럼 생긴 사람이 성 구매를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 옆자리의 선배, 동료 너무 평범하게 생긴 이런 사람들이 바로 성구매자였다. 생각보다 많은 남성이 성 구매를 하는 데에 반해 나처럼 어떤 여성들은 성매매와 '알러지적'일 만큼 극단적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아니, 분리라기보다 '외면'이 더 적합할지도 모른다. 시내엔 이미 카페만큼이나 많은 룸살롱이 산적해 있었는데도, 나는 성매매를 다른 나라 이야기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성들의 성 구매는 너무나 일상적이었다. 그들 안에서 성 구매는 용인되고 권장되기까지 했다. 그들만의 멤버십을 구축하는 데에 있어 (성적 대상으로서의) 여성이 없으면 큰일 난다는 듯이, 남성 동료들끼리는 '단합' 차원으로 성 구매를 이용한다.
한국 사회 성매매를 분석한 <은밀한 호황>에 따르면 "대부분 남성들이 혼자보다는 다른 남성들과 모임을 갖는 과정과 경로를 통해 성매매를 하러 간다"고 한다. 그런 반면 성매매를 하지 않는 여성들은 나처럼 성매매를 '다른 세상' 이야기쯤으로 여기고, 성매매 이야기가 나오는 즉시 성 판매 여성 노동자에 대한 혐오를 쏟아낸다.
성 판매 노동자가 아닌 여성들만 성 판매 여성 노동자를 혐오하는 게 아니다. 성매매 업소를 이용하는 성 구매 남성들조차도 성 판매 여성 노동자를 'X년'이라고 멸시한다. 성 판매 여성 노동자가 받는 낙인만큼 성 구매 남성들도 멸시받거나, 성 구매 남성들이 서로를 '독려'하는 만큼 성 판매 여성 노동자들도 노동자로 인정된다면 차라리 일관성이라도 있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흔히 '스폰'이라고 말하는 관계에서도 '스폰'을 받는 여성에 대해서는 '리스트'까지 작성되고 원색적인 비난과 모욕이 쏟아진다. 하지만 '스폰'을 하는 남성에 대해서는 대체로 무관심하다. 성 판매 여성 노동자들은 온갖 혐오 발언과 모욕에 시달리는 반면 성 구매 남성들은 늘 떳떳하다. 성 판매 여성의 불리한 지점을 노려 돈을 지불하지 않거나 상시적으로 몰카, 노 콘돔 위협을 가하기도 한다.
궁금한 건 이 지점이었다. 성매매에 대한 제도적 해결책(성매매 합법화 또는 비범죄화 등)은 내게 아직 너무 어려웠다. 그보다는 성매매에 대한 논의가 늘 성판매 여성들에 대한 혐오, 멸시, 배제로 끝나는 것이 의문이었다. 성매매에 대한 혐오가 성판매 여성에 대한 혐오로 직결되어 '걔네들에게 권리가 왜 필요하냐'는 형태로 끝나 버리니 제도적인 측면으로는 논의를 시작할 수조차 없는 것이 현재 온라인 공론장의 수준이다.
'쉽게 돈 버는 더러운 여성'은 누구의 관점인가 성판매 여성 노동자를 향해 가지각색으로 발화되는 혐오 발언 가운데 내가 주목하고 싶은 건 '더럽다'라는 표현이다. 성판매 여성 노동자의 경험담에는 늘 '더러운 창녀'라는 말이 꼬리표처럼 쫓아다닌다. 여성이건 남성이건 너무 손쉽게 '더럽다'는 표현을 한다. '더러운 년들이 이미지 세탁하려 한다', '불쌍한데 더러워', '더러운 창녀 주제에 무슨' 등등.
성판매 노동을 '더럽다'고 한다면 '깨끗한' 것은 무엇인가. 더럽다거나 깨끗하다는 표현은 성적 대상으로서의 여성에게 주로 붙는 성차별적인 형용이다. 성판매 여성 노동자를 '더럽다'고 할 때 성 판매 하지 않는 여성들은 '깨끗함/순결'을 획득한다. 유사한 맥락에서 성 판매 노동을 '더러운 노동'이라고 할 때, 반대편에서 편의점, 식당, 호프집 아르바이트는 '신성/성실'의 표식을 획득한다.
왜 여성은 '깨끗'해야 하는가. 노동은 왜 신성해야 하나. 자본주의의 쳇바퀴를 굴리는 다른 노동들도 성매매에 비견되면 언제나 정직하고 성실한 이미지를 얻는다. 성판매 여성 노동자를 '더러운 년'이라고 욕할 때, 욕하는 사람은 반대로 '순결한 여성' 혹은 '신성한 노동자'가 되는데 이것 자체가 성차별 구조 혹은 자본주의 아래 사람들을 억압하는 말들이다. 이 말들의 기저에는 다시 여성은 깨끗해야 한다거나, 노동자는 근면 성실해야 한다는 명제가 숨어 있다.
그런데 여성의 '순결'이나 노동자의 '근면 성실'의 판단 주체는 누구인가. 여성이 '순결'한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 권한은 전적으로 남성에게 주어져 있다. 성판매를 하지 않더라도 남성의 기준 또는 기대와 어긋났을 때 여성은 즉시 '더러운 년'이 된다. 유사한 맥락에서 노동자의 '근면 성실' 역시 노동자 스스로가 판단하는게 아니라, 고용주가 매기는 것이다.
결국 '깨끗'하다는 것도, '더럽'다는 말도 남성의 권력을 공고히 해주는 표현에 다름 아니다. 다시 말해 성 판매 여성 노동자를 '더럽다'고 혐오할 때, 혐오 발언의 발화자 역시 성차별 구조의 가장 억압적인 언어('깨끗한', '순결')로 재현되는 것이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한겨레> 칼럼에서 이렇게 말했다.
"성매매는 성별, 성차별 제도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다. 그래서 결정권이 아니라 여성 인권 문제다. 성(몸) 매매가 왜 불법인가? 누구나 노동과 임금을 교환해서 먹고 산다. 남녀가 같은 일에 종사해도, 여성이 '더 파는 것'처럼 보이는 성차별이 있을 뿐이다. 손발, 머리 등 몸의 어느 부분을 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어떤 이들은 '지식인'이고, 어떤 이들은 '노가다'로 분류된다. 거듭 강조하는 바, 성매매는 매매가 아니라 성별이 문제다."
성판매 여성 노동자를 모욕하는 말들도 (여성이 하건 남성이 하건) 바로 이 지점에 머물러 있다. 성매매는 그들이 그렇게 목놓아 부르짖는 그 '깨끗함' 그러니까 이른바 '순결'이 지탱하고 있는 성차별 구조 때문에 오히려 유지된다.
여성학자 게일 루빈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성매매 제도뿐 아니라 결혼과 같은 다른 사회적 제도 역시 성차별적인 메커니즘의 산물이라고 논설한다. 게일 루빈에 따르면 '여성 거래'는 아주 오래전부터 다양한 문화에서 만연한 현상이긴 하지만 자연적이거나 필수적인 건 아니다. 이건 각각의 사회에서 섹스/젠더가 조직되는 메커니즘의 산물이다.
'여성 거래'는 돈을 지불하여 성을 구매하는 성매매뿐 아니라 국가 간의 '화합'을 도모하고자 궁녀를 보내거나, 가문 간의 결속 또는 경쟁을 위하여 딸을 보내 결혼시키는 행위 전반을 말한다. 이 과정에서는 '물론 남성들도 거래'된다. 이에 대해 게일 루빈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명확히 선을 긋는다.
"하지만 남성들의 경우에는 남성으로서가 아니라 노예, 남창, 스포츠 스타, 하인, 혹은 다른 불운한 사회적 지위로서 거래된다. 여성들은 노예, 하인, 매춘부로서 거래될 뿐 아니라 그냥 여성으로 거래되기도 한다."
이런 '여성 거래' 현상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인데, 특히 웹툰, 드라마, 영화 등 다양한 문화 콘텐츠 속에서 자주 발견된다. 네이버에서 큰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웹툰 <금수저>만 봐도 그렇다. 대기업 간의 유대와 화목을 유지하고자 아주 어린 나이부터 각 재벌가의 아들과 딸을 사귀게 하는데, 웹툰을 보면 알겠지만 여성인 '주희'는 남성인 '태용'의 소유물처럼 자주 표현되곤 한다.
'어차피 주희는 내꺼'라거나 '주희를 가져야만', '주희를 가질 때' 같은 표현이 심심찮게 등장하면서, 이 정략 결혼이 사실상 여성인 '주희'에 대한 소유권을 양도받는 과정이라는 것이 암묵적으로 드러난다. 게일 루빈이 "거래되고 있는 것이 여성이라면, 연결되어 있는 여성들을 주고받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남성들"(110쪽) 이라고 말한 바처럼, <금수저>에서 서로의 손주를 결혼시키려고 하는 건 각 재벌가의 수장 남성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성매매나 정략결혼은 서로 완전히 다른 현상이 아니다. 여러 사람과 성관계를 맺는 성매매는 '더럽'고, 아주 어린 시절부터 한 사람만을 바라보게 되어 있는 정략결혼은 '깨끗'한 게 아니다. 문제는 이 둘 모두를 가능케 하는 지금 이 사회의 성차별 구조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에서 '거래'되는, 특히 성 판매 여성들에게는 그 어떤 목소리도 허락되지 않는다. '성 판매 여성 안녕들 하십니까'가 돌연 삭제된 것처럼 말이다.
'성 판매 여성 안녕들 하십니까'는 성판매 여성 노동자가 운영하는 페이스북 페이지로 성매매 현장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례들을 게시하고 있다. 포스트마다 악성 댓글이 빠지지 않는다. 성 판매 여성 노동자를 향해 "이런 일한다고 이렇게 써 놓는 거 이해할 수 없다", "부끄럽지도 않냐", "닥쳤으면" 하는 반응 일색이다. 그래도 꿋꿋하게 이어지다가 어느 날 페이지가 예고 없이 삭제됐다(지금은 항의 끝에 다시 부활했다).
이 사건은 우리 사회에서 성 판매 여성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어떻게 다루어지는지 매우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페이지 운영자이자 성 판매 여성 노동자인 이소희씨가 위키트리와 한 인터뷰에 달린 악성 댓글들도 여기에 한몫한다.
"왜 어떤 사람들을 이런 일을 하고 있는지 혹은 해야 하는지. 이 공간(성 산업) 바깥은 어떤지. 성 판매자로서는 성 판매자가 아닌 사람과 교류할 수 없는 건지. 이런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단지 성 산업 바깥의 사람들과 '교류'를 하고 싶었다고 하는 이소희씨의 인터뷰 기사에 사람들은 그녀의 꿈을 조롱하거나 그녀를 혐오하는 댓글을 게시한다. 이들은 이소희씨를 비롯한 성판매 여성 노동자의 말, 그 발화 자체를 불편해 한다.
이렇게 표출된 불편함 가운데에서도 '어려운 형편에서도 알바 서너 개 뛰는 사람들을 바보로 만드는 것 같다'는 댓글은 인상적이다. 성판매 여성 노동자들이 자신의 근로 환경에 대해 말을 하는 것이 왜 다른 알바 노동자를 '바보'로 만드는가. 날 때부터 금수저인 재벌가 자제들의 뉴스에나 달릴 법한 말들이 성 판매 여성 노동자를 향한다. 이 발화에는 성판매 노동이 쉽고, 더럽고, 돈 잘 버는 노동이라는 편견과 추측이 농축되어 있다. 이 안에 사실을 근거로 한 논증 따윈 없다.
'외면'과 '혐오'는 어떤 것도 바꾸지 못한다 우리 사회는 지금까지 성판매 여성 노동자의 목소리를 삭제해 왔고, 그 때문에 여전히 성판매 여성 노동자에 대한 정보는 굉장히 빈약하다. 그런 가운데 결정을 내리다 보니 계속 '성매매 특별법'의 현장 적용에서 나타나는 문제점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혐오는 혐오대로 거짓 사실들을 낳으며 스스로의 몸집을 불린다.
성판매 여성 노동자들은 '닥치'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의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성구매를 일삼는 남성들은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입을 꾹 닫고, 성판매 여성 노동자가 아닌 여성들은 성매매 현장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성매매를 혐오하고, 성판매 여성 노동자를 단순히 비난하여 성판매 여성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서사에 대해 침묵하게 하는 것은 오히려 성매매 산업을 유지시키는 가장 큰 동력으로 작동한다.
그러므로 '동정팔이', '사연팔이'라며 귀를 닫은 채 비난할 게 아니라, 무엇이 그녀들을 성매매 시장으로 내몰았는지, 누가 여성들을 '거래'했는지, 그곳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똑똑히 보고 들어야 한다. 모든 목소리를 음소거하고 그저 혐오로 외면하는 것은 차라리 쉬운 일이다. 성매매를 보지 않고, 룸살롱을 모른 척 지나가고, 방석집을 향해 침 한 번 뱉으면 되는 일 아닌가. 혐오만으로 성매매가 없어질 수 있다면, 우리 사회에서 성매매 업소는 이미 사라져야 마땅하다.
청소년 학원가 맞은편에 룸살롱이 즐비하고, 한 건물의 전층을 성매매 업소가 점령한 지금 우리 사회는 바로 그 혐오를 먹이 삼아 몸집을 키운다. 외면하고, 혐오하고, 목소리를 마음껏 삭제하라. 그럴수록 성매매는 더욱 공고해질 것이고, 결국 이 사회의 성차별도, '깨끗'한 여성에 대한 검열도 더욱 강화될 것이다.
필리핀에서 십대 소녀를 끼고 다니고, 일본에서 아동 포르노를 유통하며, 국내/외에서 성 구매를 일삼는 남성들은 바로 '더럽다'며 돌 던지는 많은 이들 덕택에 '마음 놓고' 성 구매를 한다. 성 판매 여성을 향한 잘못된 혐오가 사라지지 않는 한,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