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금산의 산속에 산다. 하루에 오전, 오후 딱 두 번 오는 시내버스가 눈이 오면 20분 정도 '아랫마을'로 내려가야 한다. 이런 첩첩산중에 밤사이 눈이 내렸다. 도시로 향하는 하나뿐인 도로가 눈밭이 됐다. 새하얀 세상으로 변한 고요한 아침, 둘째(강건) 녀석이 부산을 떨며 정적을 깼다. 매일 늦잠을 자던 녀석이 웬일로 일찍 일어났다. 눈 때문은 아니었다.
"서울 가야 해요."
"서울에 뭔 일 있어?"
"꿈틀박람회 하는데, 도와드리기로 했어요."
"언제 올 거야? 그동안 잠은 어디서 잘 건데?"
"오늘은 서교동 마당집에서 잘 것 같고요. 내일은 아마 동훈이네서 잘 것 같아요."
나갈 채비를 끝낸 둘째 녀석이 허둥지둥 눈길을 달려간다. 오랜만에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한다. 뭐가 저리 신날까? 그래, 나는 알고 있다. 녀석이 서울 가는 게 좋아서가 아니라 '꿈틀리' 때문에 저러는 것을.
꿈틀리인생학교의 특별한 입학식
지난 2016년, 둘째는 꿈틀리인생학교 1기 1번이 됐다. 입학이 어려웠기에 누구보다 감회가 남달랐다. 사연은 이렇다.
둘째는 원래 입학 대상이 안 됐다. 꿈틀리인생학교는 중3을 졸업하거나 고1을 마친 학생을 뽑았다. 한국 나이로 따지면, 17살이나 18살이다. 당시 둘째는 15살이었다. 중등 검정고시를 합격해 '중학교 졸업'은 인정받았으나 입학을 해도 16살이기에 자격 조건이 안 됐다. 입학상담을 해준 교사도 "나이가 어려 입학이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초조했다. 당시 둘째는 풀무고등학교에 지원했다가 떨어진 상태였다. 꿈틀리인생학교가 아니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우리 가족은 고심에 빠졌다.
걱정을 이어가던 어느 날,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꿈틀리인생학교에서 둘째의 입학 여부를 놓고 논의한 결과 "중등 졸업을 했기에 입학대상자로 보는 게 맞다"는 결론이 났다며, 반가운 소식을 알려왔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렇게 둘째는 남들보다 어린 나이에 꿈틀리인생학교에 갔다.
입학식은 특별했다. 여러 사람 앞에서 첫 번째로 우리 가족을 소개했다. 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이게 아니다.
나 홀로 입학식에 씩씩하게 온 학생이 있었다. 홀로 있으니 외로워 보였다. 이런 내 예상을 깨고 학생은 웃는 얼굴로 즉석에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가족을 소개했다. 웃음바다가 됐다. 통화의 끝머리, 어머니의 한 마디에 입학식장에 탄성이 울려 퍼졌다. 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딸아, 위대한 평민이 되어라!"
기억에 남는 가족은 또 있다. 엄마와 언니가 입학식에 함께 했다.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궁금했다. '일이 바빠 못 왔나?' 했는데, 아니었다. 이 학생의 엄마가 아빠가 못 온 이유를 설명하였다.
"아빠는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에 맞아 쓰러져 입원해 있던 서울대병원 앞 농성장을 지키느라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차가운 아스팔트를 지키는 "아빠"를 위해 입학식에 참석한 모든 사람은 큰 박수로 격려했다. 꿈틀리인생학교는 가족들도 특별했다.
옆을 볼 자유, 아이도 부모도 필요
둘째가 1년 동안 '옆을 볼 자유'를 누리는 동안, 아빠인 나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자유를 맛봤다. 한 달에 한 번, 꿈틀리인생학교 학부모는 서울과 대전, 부산, 순천, 울진 등을 돌며, 번개 모임을 가졌다.
꿈틀리인생학교에선 글이 아니라 온몸으로 가르쳤다. 부모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꿈틀리' 깃발을 들고 세월호 사건의 진상규명과 서슬 퍼런 공권력의 물대포에 쓰러진 백남기 농민을 위한 서울 광화문 광장 촛불집회 현장에 함께 갔다. 아이들만 민주시민교육을 배운 게 아니었다.
더불어 사는 행복도 알게 됐다. 집회가 끝나면 30~40명이 함께 밥을 먹고 서로 다독이는 시간을 가졌다. 이런 날이면, 지방에서 올라온 가족들은 서울과 경기지역에 사는 꿈틀리 가족들의 집으로 초대돼 즐거운 담소를 나누고 황송한 대접을 받았다. 우리 가족에겐 외로운 생활에서 맘이 따뜻해지는 경험이었다.
이런 모임이 한번두번 이어져 가면서, 그동안 경쟁과 입시교육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는 한 부모는 부모들의 모임을 통해 자신의 교육관이 바뀌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아이가 진짜 스스로 서서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학부모 모임에서 '우리나라 교육에서 꿈틀리인생학교가 왜 필요한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토론하면서 생각이 변했다고 했다.
아이들이 입시 경쟁에서 벗어나 스스로 성찰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배울 때, 부모들도 자유롭고 여유로우며, 풍요로운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부모들도 경험하고 있었다.
덴마크까지 날아간 둘째, 이렇게 달라졌다
둘째는 학교 밖에서도 '인생학교'를 살았다. 꿈틀리인생학교에서 함께 부대끼며 사는 것도 모자라 틈만 나면 '꿈틀리 친구들'이 사는 동네를 찾아갔다. 이렇게 행복한 1년을 끝내고 지난 2017년 졸업을 했다.
졸업을 앞두고 둘째는 풀무고등학교에 다시 지원을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또 떨어졌다. 기대했기에 실망도 클 줄 알고 걱정했으나 금방 일어섰다. 고등검정고시를 준비해 통과하고 이후에는 대안대학 풀무전공부에 원서를 넣어 합격했다. 그리고 그렇게 가고싶어하던 애프터스콜레(Afterskole)의 나라, 덴마크로 날아갔다.
꿈틀리인생학교에서 맺은 인연으로 둘째는 덴마크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꿈틀리인생학교에서 반년 동안 함께 생활한 덴마크 친구가 자기 나라로 초대한 거다. 40여 일간 덴마크에 머물면서 둘째는 친구가 다니는 학교의 배려로 4주 동안 덴마크 학교를 체험했다. 이 경험이 꽤 충격적이었는지 돌아와서 이런 말을 쏟아냈다.
"모든 학생들이 인생학교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분위기, 일반학교나 인생학교나 전혀 문제 되지 않는 교육 제도, 어떻게 자기 스스로 인생을 살아갈지 찾아가도록 돕는 부모들의 교육철학 등 너무 부러웠어요. 오연호 기자님의 책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에서 말하던 행복한 인생을 직접 눈과 몸으로 겪어보니 책에서보다 더 크게 다가왔어요."
"꿈틀리인생학교 같은 학교가 우리나라 교육제도에 하루빨리 잘 정착돼 경쟁과 입시에 내몰린 청소년들에게 '옆을 봐도 아무 문제없어'라는 사회적 분위가 만들어졌으면 좋겠어요."
어느새 둘째는 생각도 성장하고 사회와 주변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져 있었다.
또 하나의 가족, '꿈틀리 가족'
지난 2017년 둘째가 꿈틀리인생학교를 졸업했으나 꿈틀리 가족들의 모임은 여전하다. 지금도 번개모임을 갖고 시시때때로 만나고 있다. 지난 2월 중순, 5년 만에 떠난 제주도 가족여행에서도 꿈틀리 가족을 만나 즐겁게 지냈다.
그래서다. 우리 가족은 이젠 어딜 가도 반갑게 맞아줄 '꿈틀리 가족'이 생겼다. 외국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고 돌아왔기에 우리 가족은 한국 땅도 낯설고 금산의 산 속도 외로웠다. 하지만 둘째가 꿈틀리인생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또 하나의 가족'이 늘어갔다.
그래서일까? 둘째는 꿈틀리 친구들을 만나러 갈 때면 환한 미소를 짓고 행복해 한다. 좋아하는 잠을 마다하고 일찍 일어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아버지인 나도 아무런 걱정 없이 둘째를 어디든 보낼 수 있는 건, '꿈틀리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꿈틀리인생학교는 아이들에게만 '옆을 볼 자유'를 준 게 아니었다. 어른들에게도 '옆을 볼 자유'를 줬다. 인생의 후반을 시작하며 찾아온 이 자유를 꿈틀리 가족과 함께 더 오랫동안 누리고 싶다. 아이들은 함께 걸어갈 든든한 벗을, 부모들은 동지를 얻었기에. 끝으로 꿈틀리인생학교 입학을 고민하는 가족이 있다면,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조금 더디 가면 어떤가?
좀 다른 길로 가면 어떠랴?
더불어, 함께 가니 이 또한 즐겁고 기쁘지 아니한가?[관련기사]
내 나이 열여덟 살, 인생학교에 입학했다놀고먹는 학교? 치열하게 '행복'을 가르칩니다꿈틀리인생학교 입학정보 |
꿈틀리 인생학교가 3기 신입생을 모집합니다.
덴마크가 국가별 행복지수 1위의 나라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에프터스콜레(Efterskole) 제도에 있습니다. 한국형 에프터스콜레 꿈틀리 인생학교는 청소년들이 '옆을 볼 자유'를 실컷 누리며, 인생을 설계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꿈틀리인생학교를 참고해주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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