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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과 결혼 중에 당장 선택하라면 너와 결혼하겠어. 그게 지옥이라 해도. 너와 함께라면."

영화 <비포선라이즈>에서 제시(에단 호크)와 셀린(줄리 델피)은 아침을 함께 맞이하며 이런 대화를 나눈다. 두 사람은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만나 하루 만에 사랑에 빠진다. 단 하루 만에 두 사람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된다. 이 운명적인 사랑을 다룬 <비포선라이즈>는 만들어진 지 20년이 넘었는데도 꼭 봐야 할 사랑 영화로 꼽힌다.

<비포선라이즈>를 보며 나는 여행지에서의 로맨스를 꿈꿨다. 여행을 가면 운명적인 상대가 나타날 것 같았다. 실제로 여행을 하며 만난 사람 중 상당수가 성별을 불문하고 서로에게 호의적이었다.

우유니에서 만난 중년의 부부는 고산증에 시달리는 내게 몇 개 남지 않은 약을 기꺼이 나눠주었다. 보고타에서 예약한 에어비앤비를 찾지 못할 때, 길에서 만난 한국인 여행객들이 모두 나서 도와준 적도 있었다. 게스트하우스에 머물 때면 서로에게 은근한 인사를 건네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는, 나는 줄리 델피가 아니고 남자들도 에단 호크가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을 남미를 여행하며 깨달을 수 있었다. 여행지에서의 로맨스는 침대에 엎드려 노트북으로 본 영화 속에서 가장 달콤했다. 영화 속 로맨스가 필터 넣은 셀카라면, 현실은 아버지가 대충 찍어준 무보정 실사랄까.

남미의 성희롱, 큰소리 한번 못낸 이유  

 우루밤바 마을 축제, 물론 좋은 사람들이 더 많았다.
우루밤바 마을 축제, 물론 좋은 사람들이 더 많았다. ⓒ 박초롱

남미를 여행하며 나는 성희롱을 숱하게 당했다. 길을 걸을 때 뒤에서 휘파람을 불거나 윙크를 날리는 것은 애교였다. 나랑 사귈래? 너 몸 좋다. 숙소에 혼자 있어?라는 질문도 받았다. 사진을 같이 찍자며 지나치게 가깝게 다가오거나 은근슬쩍 어깨나 허리에 손을 대는 현지인도 있었다.

그런 이들에게 때론 주먹으로 욕을 날리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상황에서 나는 달리 대응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부당한 일에 침묵하는 것을 무임승차라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남미를 여행하는 동안 당한 성희롱에는 큰 목소리 한 번 내지 못했다. 왜였을까?

무서웠다. 지구 반대편에서 온 작은 동양인 여자라는 신분은 그들에게 섣불리 욕을 하게 하지도, 경찰서에 가자고 하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상대가 얼마나 위협적인지 알 수도 없었고 괜히 강하게 대응했다가 보복을 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총이라도 꺼내면 어떡하지? 동네 사람들이 다 한 패거리면 어쩌나? 그런 상황에서 내가 가진 유일한 무기는 단 하나, '무시'였다. 나는 영어를 못 알아듣는 척, 스페인어를 못 하는 척, 가끔은 그들의 말이 아예 들리지 않는 척 걸음을 옮겼다. 조금씩 빨라지는 나의 잰걸음을 들키지 않게 조심하면서.

남미에서 동양인 여자라는 신분은 묘하다. 일단 남미에는 동양인 여행자가 많이 없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산티아고, 라파즈, 리마, 보고타와 같은 대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면 정도는 더 심하다.

동양인은 신기하면서 만만한 상대다. 남미를 여행하며 가장 많이 들은 단어는 'Chino(치노)'였다. 중국인이라는 뜻이지만 실은 이 말에 경멸과 조소의 뜻이 숨어있다. 자신에게 페루리안이라고 말하면 욱하고 화를 내면서 아시아인들에게는 치노라는 말을 서슴지 않는다.

내가 너무 예민한 건가? 그렇지 않다

 쿠바 아바나
쿠바 아바나 ⓒ 박초롱

성희롱이 가장 심했던 건 쿠바였다. 쿠바의 성희롱이 얼마나 심한지는 남미 여행자들의 단체 카톡방에서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막상 가서 겪으니 과연 한 걸음에 한 번씩 성희롱 멘트를 들어야 했다.

재밌는 건 남자와 함께 다니면 눈만 흘깃거릴 뿐 대놓고 성희롱을 하지는 않는다는 거다. 인터넷이 안 되는 쿠바지만 아바나를 여행하는 한국 여행객들은 그래서 무리를 지어 다닌다. 열정과 자유로움이라는 말로 적당히 포장된 쿠바인들의 성희롱은 가히 세계 정상급이었다.

쿠바는 중남미 여행자들에게 호불호가 강한 나라인데 쿠바에 학을 떼는 많은 이들이 성희롱을 그 이유로 꼽는다. 쿠바가 정말 좋았던 여행자로서 그 점이 안타까웠다. 이러다 정말 문제 생기는 거 아니야?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히론((Playa Girón)에서 충격적인 성추행 사건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히론은 아바나에서 한참 떨어진 쿠바의 작은 바다마을이다. 고요한 일몰이 숨 막히게 아름다운 곳이었다. 나는 아시아인에게 호의적이라 입소문을 탄 호스텔에 묵었다. 저녁 식사로 나오는 킹크랩이 맛있기로 유명한 집이었다.

그런데 주인이 지나치게 스킨십이 많았다. 대화를 할 때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와 계속 뒤로 한 걸음씩 물러나야 했다. 음식을 서빙하며 다정하게 어깨를 감싸 안거나 손가락으로 팔을 튕기기도 했다.

몇 번 참던 내가 터진 건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주인에게 나는 짜증스럽게 "don't touch me!(만지지 마!)"라고 소리쳤다. 싸해진 저녁 테이블 자리를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떠났다. 정적이 흐르는 테이블에서 나는 무언가 잘못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쿠바인들은 원래 저렇게 스킨십이 많은 걸까? 내가 너무 예민한가?

다음 날 아침 어젯밤 저녁 식사를 함께 한 일본인 여행객과 주인이 싸우고 있는 걸 보았다. 말싸움은 점점 격해지더니 일본인 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물건을 집어 던졌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니 주인이 밤에 자기 방으로 들어와 옷을 벗고 자신의 성기를 만져보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호스텔에 묵었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일본 여행객은 우느라 영어로 제대로 말을 하지도 못했다. 결국 일본어를 아는 한국인이 그녀의 말을 내게 전하면, 내가 스페인어로 주인에게 다시 항의하는 식이 되었다. 주인의 해명은 간단했다.

"걔가 먼저 꼬리를 쳤어. 내가 만져도 가만히 있었다고!"

 문제의 호스텔
문제의 호스텔 ⓒ 박초롱

주인은 증거(?)로 둘이 다정히 볼을 대고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기가 막혔다. 일본인 여행객에게 경찰서에 가자고 말했다. 당신이 원한다면 내가 증인이 되어주겠노라고 말했다. 주인은 더 당당했다. 경찰서 같이 가자고 말하며 자기도 증인이 있다고 했다. 밑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그 증인이었다. 경찰들도 다 자기 친구란다.

일본인 여행객은 경찰서에 가길 원하지 않았다. 히론은 워낙 작은 마을이라 길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 인사를 하고 지낼 정도다. 그녀는 어차피 경찰도 한 패거리일 거라 믿었다. 내가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도중에도 주인은 계속 그녀의 어깨를 잡아 돌리려 했다. 만지지 말라는 내 경고에 그는 세상에서 가장 순결한 피해자인 양 기가 막힌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그녀를 아바나에 있는 다음 숙소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중남미를 여행하는 사람들의 단체카톡방에 숙소의 이름과 사건에 대해 알렸다. 그러나 아직도 누군가는 그 호스텔에 묵을지 모른다. 인터넷이 잘 되지 않는 쿠바의 특성상 평점이나 리뷰를 남길 수도 없을 테니 말이다.

'남미를 여행하는 여행자들을 위한 성희롱 대처법'이란 게 있을지 모르겠다. 실은 가해자들이 바뀌어야할 문제다. 그러나 남미의 성희롱자들에 대해 내가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아는 것은 겨우 한 가지다. 단호하게 말할 것. 이것이 그들의 문화겠거니, 좋은 게 좋은 거니까, 분위기 깨고 싶지 않아서, 그래도 여행진데라는 생각은 쓰레기통에 버리는 게 낫겠다.

 히론 노을
히론 노을 ⓒ 박초롱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늘 설렌다. 그 설렘이 여행의 마지막까지 유지되려면 기대만 가지고 여행을 시작해서도 안 될 것 같다. 나는 남미여행이 너무 좋았다. 기회가 된다면 언제라도 다시 가고 싶다. 말을 잊게 만드는 히론 해변의 아름다움을 다시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성희롱에 대한 나의 경험담이 남미 여행에 대한 꿈을 좌절시키지 않았으면 한다. 그러나 남미 여행을 버킷리스트에 담아두는 분이 있다면 말하고 싶다. 남미는 아름다웠다고. 그렇지만 아름답기만 하지는 않았다고.

 히론의 해변
히론의 해변 ⓒ 박초롱



#남미#여행#쿠바#성희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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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밥 벌어 먹고 사는 프리랜서 작가 딴짓매거진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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