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개헌 이후 31년 만에 다시 개헌 논의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개헌은 생각보다 훨씬 '국민의 삶'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내가 열심히 일한 만큼 공정한 대가를 받을 수 있는지, 한 사람의 국민으로 언제든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지, 사랑하는 사람과 걱정없는 삶을 꿈꿀 수 있는지 개헌은 이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칩니다. <오마이뉴스>는 '내가 만드는 헌법'이라는 기획을 통해 여러분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하고자 합니다. 장애인, 농민, 노동자, 성소수자, 사법피해자, 취준생 등 각자의 위치에서 '내가 생각하는 헌법, 내가 바라는 개헌의 방향'에 대해 자유롭게 기사로 써서 보내주세요. '내가 만드는 개헌'은 열린 기획으로 시민기자 누구나 참여할 수 있습니다. [편집자말] |
문재인 행정부의 헌법개정안 발의를 앞두고 원내 5당이 각자에 유리한 셈법을 요리조리 따져보느라 바쁘다. 정당 차원에서는 대통령의 권한분산과 권력구조 개편을 중심으로 이번 개헌 논의를 이끌어 가는 듯 보인다. 자신들의 지지층과 그들의 특성에 따라 권력구조 형태와 지방분권의 정도 그리고 선거구제 개편을 논하려는 생각으로 읽힌다.
실제로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은 '4년 중임제'에, 의석수가 적은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 정의당은 비례대표제를 확대하는 선거구제 개편에, 자유한국당은 분권형 대통령제와 개헌 관련 국민투표의 시기를 늦추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정당들이 '정치의 형태'와 '국가 운영 방식'에 관심을 둔다면, 우리 국민들은 그 틀 안에 담길 내용과 가치에 생생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 각자의 존엄을 보장하는 모든 가치는 결코 부딪히거나 경쟁하지 않으며, 헌법의 이름 아래 수호되어야 한다. 노동자, 노인과 청소년, 장애인, 취업준비생과 사회초년생 그리고 모든 성별을 위한 가치는 동시다발적으로 헌법 조항에 포함되어야 하며, 그 과정엔 국민이 주체로 바로 서야 할 것이다.
이 중에서도, 여성이 주체가 되는 우리 새 헌법의 모습은 어떨까?
여성을 '보호'하자는 현행 헌법
현행 헌법 체제는 1987년 9차 개헌으로 완성됐고, 지금은 2018년이다. 지난 31년 동안의 사회 격변은 여성들이 살아가는 삶의 격변기와도 같다. 변화한 여성들의 삶이 새 헌법에 반영되고, 새 헌법은 미래 사회와 여성의 삶을 예측해 윤택한 연결고리를 만들어야 하는 의무가 있다.
현행 헌법에서 여성 국민을 다루는 핵심은 '보호'다. 제 32조 4항에서는 '여자의 근로는 특별한 보호를 받으며, 고용·임금 및 근로조건에 있어서 부당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라고 언급하고, 제 34조 3항에서는 '국가는 여자의 복지와 권익의 향상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고 공표했다. 32조에서는 여성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하고, 34조에서는 여성 인권을 폭넓게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현행 헌법이 여성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 단편적이고 차별적이라 비판받는 이유는 바로 36조에서 드러난다.
제 36조는 1항에서 '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되어야 하며, 국가는 이를 보장한다'고 말하며, 이어 2항에서는 '국가는 모성의 보호를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결국 여성이 특별히 '보호'의 대상으로 다뤄야 하는 이유는, 이들이 임신하고 출산하는 능력이 있기에 엄마가 될 것이라는 국가 차원의 전제와 맞닿는다. 다시 말해 현행 헌법은 여성의 사회적-신체적 취약함을 보호해야 하는 이유를 인구 재생산의 관점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위 헌법 조항을 기반으로 제정된 남녀고용평등법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새 헌법의 제 1과제 : 여성을 주체로 표현하기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새 헌법은 여성을 객체나 대상이 아닌 주체로 표현하는 것부터 고려해야 한다. 예컨대, [여성의 근로는 특별한 보호를 '받아']야 하는 게 아니라 [여성은 노동 현장에서 성별에 의한 차별 없이 '일할' 권리]가 있음을 강조해야 한다. 여성을 무력하거나 수동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아닌, 여성 역시 권한을 평등하게 행사하고 권리를 요구하는 주체로 그려내야 한다. 사회적 차별에 의해 발생되는 여성의 약자성을 나열하는 것이 아닌, 여성 주체들을 '일반 국민'의 영역에 평등하게 진입시키는 것에 새 헌법의 언어가 신경써주기를 바란다.
또한, 여성의 영역에서 '모성'의 영역을 분리하는 것 역시 새 헌법의 역할이다. 이는 국가적 차원의 모성 보호를 거부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임신, 출산, 양육은 분명히 국가적으로 다뤄져야하고 국가가 온전히 책임을 져야 하는 과정이며, 이는 필히 공적 영역에서 논의되어야 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현행 헌법은 '모성'을 여성에게만 부여하고, 여성을 다시금 '모성'과 동일시하며 결혼과 출산을 여성 국민의 기본값으로 설정했다. 이는 9차 헌법의 잘못이다. 임신, 출산, 양육은 모성과 부성 모두를 아우르는 영역이며, 더 확실히는 국가의 영역이다. 현행 헌법의 '모성 보호'의 논리는 여성을 보호의 대상으로만 전락시킨 동시에, 출산과 육아의 책임에서 남성을 교묘하게 빼내오는 결과를 낳았다. 저출산 시대에 국가의 인구 정책을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싶다면 임신-출산-육아의 문제를 여성-남성-국가 3주체 모두가 짊어질 수 있도록 헌법이 오롯하게 담아내야 한다.
여성의 문제는 모든 가치와 맞닿아 있음을
앞서 지적한 것처럼, 아무리 추상적인 언어나 관념들이더라도 헌법에서만큼은 더욱 섬세하고 예민하게 쓰여야 한다. 여성을 바라보는 관념과 성차별을 표현하는 언어의 문제는, 우리 사회 모든 쟁점과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사실 여성 문제를 '여성 문제'라 명명하는 것조차 아이러니다. 세상 모든 문제, 노동, 정치, 민주주의, 교육, 건강권, 가족, 인구, 외교와 통일까지 모든 영역에서 성차별이 실재하기에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헌법차원의 노력은 필수적이다.
물론 현행 헌법의 평등을 향한 노력 덕분에 형식적 평등이 각 분야에서 정착되고 있음은 사실이다. 특히 교육의 기회에서의 성차별은 양적으로 해결되었고 그 결과는 여성들의 대학 진학률이 남성들의 그것과 차이나지 않는다는 사실로 증명되었다.
그러나 정치와 노동, 건강권과 가족 문제에서의 차별은 여전하며, 이는 '여자의 복지와 권익'이라는 불투명한 단어로 여성의 삶을 축소시켜 서술한 현행 헌법에도 책임이 있다. 문재인 정부가 내각의 30%를 여성으로 꾸리고, 원내 5당 중 세 개 정당의 당대표가 여성인 점은 여성들이 드디어 정치에서도 어느 정도 대표성을 쟁취했다고 해석할 수 있지만, 20대 국회는 여전히 전체 의석의 17%만을 여성에게 내주었다. 임명직이 아닌 선출직에서 여성의 비율이 확연히 낮아지는 것은 정당과 유권자 모두의 인식 개선이 필요한 문제다.
취업 시장과 노동 현장에서의 불이익, 성별 임금격차, 출산과 육아로 인한 경력 단절 모두가 여성을 향하고 있으며, 낙태죄의 존재는 여성의 건강과 신체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위협하고 있다. 견고한 성별 이분법 구조와 인구 재생산 중심의 가족계획 아래에선, 남녀 한 쌍과 자녀로 이루어진 '정상가족'을 향한 사회적 강요는 지속되고 다양한 가족 구성을 인정하는 '파트너 등록법'은 계속 표류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의 열 번째 헌법은 조금 더 두껍고, 조금 더 자세히 쓰일 필요가 있다. 모든 국민들이 쉽게 읽고 쉽게 이해하고 가볍게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헌법의 미덕임을 안다. 하지만 우리 헌법이 더 두꺼워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법이라는 그물망은 소수자를 향해서는 미처 촘촘하게 짜여있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1987년 제정된 현행 헌법은 지금껏 여성에게 그래왔고, 장애인과 동물과 자연에게 그래왔다.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 시절부터 실현하겠다 천명한 이번 10차 개헌은,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아주 특별한 사건이 되어야 한다. 9차 헌법은 기나긴 독재를 끝내고 대통령 직선제를 최초로 보장했다는 점에서 가치있지만, 민주화 운동 직후 '다급하게' 제정되어 약자와 소수자의 삶에 깊숙이 들어가지 못했다.
각 정당들의 이익 논리에 묻혀 개헌은 계속해서 미뤄졌고, 우리는 미숙한 헌법 아래에서 지난 31년을 살아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성평등과 여성인권 이슈가 다시 우리 곁을 찾아온 이 시기에, 국민이자 여성으로서 헌법 개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은 어찌 보면 행운이고 기가 막힌 타이밍이다.
생에 처음으로 31년 만의 개헌의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지난 1987년처럼 이제는 누군가의 죽음을 담보해야 하는 것이 아닌, 공적 영역에서의 진지한 토의와 자유로운 의사 표명으로 공정하고 평등한 헌법을 직접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벅차게 감격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