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상상하는 북한과 달랐다. 재미동포 아줌마가 공개한 실상은 파격적(?)이었다. 난 보리밥만 먹고 사는 나라인 줄 알았는데, 그는 햄버거도 사고파는 국가라고 했다. 반공교육을 받고 자란 그도 "도깨비"가 사는 땅덩어리로 여겼는데, 그리운 "수양딸"을 두고 온 북녘땅으로 삼게 됐단다. 이런 북한 이야기,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다.
여기 북한을 여행한 재미동포 아줌마가 있다. 그는 지난 2011년부터 2017년까지 총 9차례에 걸쳐 140여 일간 북한 곳곳을 누볐다. 혼자만 기록을 간직하진 않았다. <오마이뉴스>에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 '재미동포 아줌마, 또 북한에 가다', '수양딸을 찾아서 북한으로'라는 연재기사를 통해 세상에 알렸다.
그는 북한의 열병식을 처음으로 취재한 시민기자이기도 하다. 외신기자 완장을 차고 페이스북으로 이산가족 상봉을 돕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그는 수식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대구에서 태어난 보수적인 기독교 집안의 딸, 한때 보수·반공주의자였던 평범한 주부, 남북한의 평화를 바라는 이민자, 신은미 <오마이뉴스> 시민기자의 이야기다.
재미동포 아줌마가 들려주는 북한 여행기, 지금부터 시작한다.
'도깨비' 나라로 여행?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
거긴 '미지의 나라'였다. 신은미 기자는 남편이 처음 북한여행을 제안했을 때 설렘보다는 두려움이 컸단다. '반공교육'을 받고 자란 그에게 북한은 무시무시한 나라였다. 주변 사람들의 반응도 똑같았다. 오죽하면 "어머, 돌았나 봐. 거기가 어디라고 여행을 가!"라며 뜯어 말렸다.
신은미 기자는 썩 내키지 않았으나 짐을 쌌다. 남편은 공들여 준비한 여행을 포기할 리 없었다. 그냥 따라나서는 수밖에. 지난 2011년 10월, 남편과 함께 중국 베이징을 거쳐 평양으로 향하는 고려항공에 몸을 실었다. 그의 생에 첫 북한 여행이었다.
"휴가 여행으로 조국을 찾아주신 우리 동포님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조선국제여행사의 관광안내원은 가방을 낚아채며, 말을 걸었다. 딴에는 어색함을 덜어내려 이런 소리를 했다고 짐작했으나 신은미 기자는 '조국'이란 단어가 신경 쓰였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그는 미국 시민권자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었다. 그는 당혹스러웠단다.
처음 본 평양의 아침도 상상과 달랐다. 신은미 기자는 손 잡고 출근하는 부부, 팔짱을 낀 여인들을 보며, 자신이 밟고 있는 땅을 의심했다. 거긴, 인터넷에서 본 나라가 아니었다. '북한사람들은 공개된 장소에서 손을 잡는다든가 해는 애정 표현도 할 수 없다'라고 했는데, 사실이 아니었다. 그에겐 충격적이었단다.
평양을 벗어나서도 그랬다. 신은미 기자가 탄 자동차가 북한 원산 시내를 누빌 때다. 초등학교 학생들이 그를 향해 "헬로, 헬로"하며 손을 흔들었다. '철천지 원쑤 미제국주의자 놈들'의 말이 어린아이들의 입에서 나온 거다. 그는 믿을 수 없었단다. 김설경 관광안내원은 "영화 <타이타닉>을 영어 시간에 교재로 썼다"라고도 했다. 그가 알던 북한이 아니었다.
"예전 남조선 관광객들이 붐비던 그 시절이 꿈만 같습니다. 너무나 그립습니다."
금강산 호텔 직원의 말에 신은미 기자는 놀랐다. 북한 사람에게 이런 소리를 들을 줄 몰랐다. 금강산 관광객이 끊기면서 호텔이 텅 비게 됐다며, 직원은 아쉬운 소리를 했다. 아무리 그래도 북한 사람이 그 시절이 그립다는 말을 할 줄, 그는 상상도 못 했다.
금강산은 신은미 기자의 가슴을 뛰게 했단다. 산을 오르내리느라 숨이 가빠져서가 아니다. 풍경이 아름다워서도 아니다. 목련관 기념품 상점에 갔는데, 유니폼을 차려입은 아가씨 세 명이 그에게 다가와 사진을 찍자고 했다. 그는 이런 뜻밖의 제안에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이들이 쏟아낸 말에 가슴이 뜨거워졌단다.
"오랜만에 우리 동포들을 보니 너무 반가워서... 전에는 남조선 동포들이 수도 없이 왔는데, 그때는 곧 통일될 줄 알았어요. 얼마나 흥분했는지..."
신은미 기자의 첫 북한 여행은 이렇게 기대(?)와 어긋났다.
[관련기사] 처음 가본 북한...숨이나 제대로 쉴 수 있을까"남조선 관광객들이 너무 그립습니다"남편의 폭탄 발언, 싸늘했던 기억
남편은 시한폭탄이었단다. 북한 여행을 갈 때면, 신은미 기자를 가슴 졸이게 했다. 지난 2011년 평양 봉수교회를 찾았을 때도 그랬다. 목사님에게 대뜸 이런 질문을 했단다.
"목사님, 이 교회 진짜 교회 맞습니까? 혹시 가짜 교회 아닙니까?"(남편)
"그렇지 않습니다. 하루빨리 북과 남의 교회가 한 마음으로 서로 교통하며, 예배 볼 수 있을 날을 내 살아생전 희망하며 기도할 뿐입네다."(목사님)
언젠가 인터넷에서 본 글이 화근이었다. 북한은 종교 생활이 금지돼 있고, 종교를 가졌다가 적발되면 감옥에 간다는 글을 읽었다. 주위에서도 이들 부부가 평양의 교회에 간다고 하니 가짜인지 진짜인지 잘 살펴보라고 했단다. 와보니 그가 인터넷 글로 알게 된 북한은 없었다.
여기서 끝났으면 좋은데, 남편의 돌직구 발언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단다. 지난 2013년 다시 떠난 북한 여행에선 아찔한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단다. 대학살의 현장인 신천박물관을 관광하고 돌아온 후였다. 호텔에서 관광안내원 '영길 아우'에게 이런 도발적인(?) 질문을 했다.
"그래, 근데 왜 연평도에 폭탄을 퍼부었어?"
"그래, 좋아. 근데 금강산에 온 여자 관광객은 왜 쏴 죽였어?"
"천안함은 어떻게 할 거야?"
신은미 기자에겐 살얼음판을 걷는 것 마냥 싸늘했던 기억이다.
'영길 아우'의 대답이 궁금하다면, 기사 '북한 주민에게 천안함 따져 물었더니...'를 클릭해주길 바란다.
[관련기사]"이 교회 가짜죠?" 평양 목사의 반응은...북한 주민에게 '천안함' 따져 물었더니...수양딸 찾아 북한으로 가다
"오마니"
지난 2013년 신은미 기자는 수양딸을 부둥켜안고 울었다. 김설경, 그는 신은미 기자가 지난 2011년 '뿔난 도깨비들이 사는 나라'에서 만난 첫 '도깨비'였다. '설경이'는 지난 2011년 1월, 부부의 북한 여행을 도운 첫 번째 관광안내원이었다. 아래 영상은 신은미 기자가 수양딸 '설경이'와 상봉하는 순간을 기록한 영상이다.
신은미 기자가 북한의 실상을 공개할 때마다 수양딸이 곁에 있었다. 지금껏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북한 주민의 생생한 사는 이야기를 기록하게 된 것도 수양딸을 둔 덕분(?)이다. 첫째 수양딸 '설경이'를 통해 북한 신혼부부가 사는 아파트를 엿볼 수 있었고, 출산을 앞둔 평범한 북한 예비 엄마의 고민도 들을 수 있었다.
둘째 수양딸 '설향이'는 평양판 '맥도날드' 메뉴판이 있는 햄버거 가게와 에스프레소를 파는 찻집으로 신은미 기자를 끌고 갔다. 백두산 천지를 오를 때는 곁에서 힘이 돼줬다. '설향이'와 함께 간 맥줏집에선 술을 마시는 평양 여성을 카메라에 담기도 했다. 훗날 이 사진을 <로이터> 통신의 서울 특파원 제임스 피어슨(James Pearson)이 자신의 책에 싣고 싶다며, 연락이 오기도 했다.
이게 다가 아니다. 지난 2015년 6월, 두 수양딸을 찾아 북한으로 간 이야기를 <오마이뉴스>에 지난해 12월까지 연재,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북한의 '오늘'을 기록하고 알렸다. 여기서 셋째 수양딸 '최경미' 관광안내원을 만나 이산가족의 페이스북 상봉, 북한 열병식 취재 등 극적인 순간을 함께했다.
이런 이야기, 북한 정부는 어떻게 바라볼까? 그는 첫 번째 연재기사를 마치고 한 통의 연락을 받았다. 뉴욕의 UN 주재 북한 대표부의 한 외교관에서 온 거였다. 내용은 대충 이랬단다.
"잘 읽었습니다. 녀사님께서 남조선에서 태어나 미국에 살고 있어서 조국(북한)에 대해 잘 몰라 일부 틀린 점들이 있긴 하지만 녀사님의 동포애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관련기사]북한 신혼집 직접 가봤더니...눈물이 왈칵평양판 '맥도날드' 메뉴판을 공개합니다북한 열병식 처음으로 취재한 시민기자
'북한 열병식, 제가 눈앞에서 직접 봤습니다'
신은미 기자를 떠올리면, 내 머릿속에 그려지는 문장이다. 지난 2015년 10월 10일, <오마이뉴스>에 게재된 기사 제목이기도 하다. 우리에겐 낯선 땅이자 아무나 발 디딜 수 없는 나라, 핵무기로 무장한 두려운 땅덩어리, 거기에 직업 기자가 아닌 시민기자가 카메라와 취재 수첩을 들고 갔다. 이런 일, 어떻게 가능했던 걸까?
때는 지난 2015년이다. 신은미 기자는 또다시 북한 여행을 떠나며, 북한 당국에 '외신 기자' 자격을 요청했다. 남편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서였다. 앞선 2013년 9월 북한여행 당시 남편은 북한 열병식을 카메라에 담지 못한 걸 아쉬워했단다. 사진을 찍는 건, 기자에게만 허락됐다. UN 북한 대표부에 연락했다.
돌아온 대답은 거부였다. 기자가 아니면 외신기자 자격을 줄 수 없다고 했단다. "나는 비록 개인 기고가이지만 <오마이뉴스>라는 한국 뉴스매체의 시민기자"라며 마음을 담아 다시 요청했단다. 그리고 확답을 받지 못한 채 신은미 기자는 예정대로 북한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긴데 어제 드린 상자를 안 열어보신 것 같습니다"
지난 2015년 10월 9일, 셋째 수양딸 '경미'는 신은미 기자에게 아침부터 의문을 말을 했단다.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그는 당장 호텔 방에 올라가 상자를 풀어봤다. 그 속에는 청색 완장 2개가 들어 있었다. 그는 '기자'라고 적힌 띠를 보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북한의 열병식에 남편과 함께 '기자'라고 적힌 완장을 차고 갔다. 부부는 이날 평양 김일성 광장에서 있었던 '조선노동당 창건 70년 기념 열병식'을 카메라에 담아 <오마이뉴스>에 쐈다.
이게 끝이 아니다. 열병식을 앞뒤로 분주했던 평양의 풍경과 횃불행진도 기록했다. 모란봉악단 공연과 대공연, 추수 끝난 북한 농경지, 북한의 발전소, 신의주 아파트를 담은 사진도 직접 산 SIM 카드로 모바일 인터넷에 접속해 <오마이뉴스>에 곧바로 쐈다.
이 시각, 우리나라 언론은 북한 관영 <조선중앙TV>에서 제공하는 화면에 의존해 북한 열병식 소식만 다뤘다.
그래서다. 내게 그는 생생한 북한 소식을 전하고, 누구도 들려주지 않는 북한을 보여준 특별한 시민기자다.
[관련기사] "어떻게 남한 언론사가 평양에 왔습니까?"북한 열병식, 다시 보는 기인한 현장페이스북으로 이산가족 상봉, 불안했다
신은미 기자는 나와 다른 기억을 꺼냈다. 북한 여행 중 '나만의 특종'을 뽑아달라고 했더니 페이스북 이산가족 상봉 이야기를 했다. 사실 그가 '외신 기자' 완장을 요구한 것도 이런 꿍꿍이가 있어서였단다.
지난 2015년 10월 15일, 북한의 '해외동포사업국' 건물에서 있었던 일을 그는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안녕하세요, 신은미입니다. 지금 가족을 만나고 있습니다. 사진 보이나요?"(신은미 기자)
"와~~~ 너무 감사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우리 딸 너무 예쁘네요."(김련희 씨)
페이스북 메신저로 남과 북을 잇는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졌다.
하지만 신은미 기자는 불안했단다. 북한 정부의 처벌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휴대폰을 들고 나갔던 셋째 수양딸 '경미'가 통화결과를 말해줬다.
"걱정 마십시오. 저도 놀라서 전화를 들고 상부에 보고했더니 가만히 듣더니만 '잘하셨다 전해 드리라'고 했습니다. 헤어진 모녀가 대화를 나누는 게 당연한 일이지, 뭐..."
[관련기사] 평양에서 대구로 '페북 통화'를 시도해봤다"북한, 내 생에 가장 아름답고도 슬픈 여행"
지난달 19일, 미국에 있는 신은미 기자에게 이메일로 인터뷰 질문지를 보냈다. 그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다. 두 차례에 나눠 도착한 이메일엔 글자가 빼곡했다. 난 그제야 알았다.
북한여행이 외국에선 인터넷으로 신청 가능하고, 패키지 상품도, 개인 관광도 모두 가능하다는 것을. 국제 여행상품 전시회에 참가해 '세계에서 몇 안 되는 사회주의 국가'를 홍보하며, 여행객을 모으고 있다는 것을. 그들의 지도자를 비방하는 일만 없으면,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라는 것을...
그래서 물었다. '북한 여행, 어땠냐'고. 신은미 기자의 대답은 이랬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민족의 비극적 운명을 체험하고 민족애를 느꼈으며, 통일의 염원을 갖게 된 아름다운 여행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얼마나 우리와 다를까?' 하는 호기심을 갖고 간 북한에서 '이들은 어쩌면 우리와 이토록 똑같을까'라는 동질감을 느끼게 됐다. 동질감을 느끼면 느낄수록 조국이 분단되어 있다는 생각에 슬픔은 배가 됐다. 그래서 북한 여행은 아름답고도 슬픈 여행이었다."
이런 파격적(?) 실상을 다룬 북한 이야기, 지금껏 들어본 적이 없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신은미 기자의 여행기를 묶어 만든 책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를 지난 2014년 우수문학 도서로 선정해 전국의 공공도서관에 배포했다. 서점가에선 베스트셀러로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2014년 말, 보수언론의 '종북몰이'가 거세지면서, 그는 대한민국에서 추방당하고 책은 우수문학도서 지정을 취소당했다. 그해 12월 15일, 박근혜 전 대통령이 수석 비서관 회의에서 "최근 소위 종북 콘서트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 우려스러운 수준에 달하고 있습니다"라는 발언 후, 검경의 조사까지 받아야 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국정농단 사건이 터졌다.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수첩이 법원에서 중요한 증거로 채택되고 언론에 공개됐다. 박근혜 청와대가 '종북 콘서트를 통합진보당 해산에 이용하겠다'란 의도로 읽히는 대목이 수첩에 적혀 있었다.
"아, 사랑하는 나의 조국 영원하리라!"
난 진심으로 바란다. 신은미 기자의 북한 여행기가 계속 이어지길. 그리고 대한민국에 북한은 '도깨비'가 사는 나라가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사는 국가라고 말하는 그의 이야기가 널리 퍼지길.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말한다고 국가의 안보가 위협당하는 건, 아니기에. 남과 북의 소통을 가로막은 건, 가는 철조망이지만 단절된 대화는 두꺼운 마음의 벽을 쌓는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난 7일, 4월 말 판문점서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거란 소식이 전해졌다. 신은미 기자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런 내용을 담은 내용을 게시하며, 이렇게 썼다.
'고통이 스르르...,눈물이 주르르...
아, 사랑하는 나의 조국 영원하리라!'
다음 편은 신은미 기자를 향한 보수언론의 종북몰이와 그 후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와 관련한 모든 연재기사가 궁금하다면, 링크를 클릭해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