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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가 중학교 2학년 때 경기도 구리에서 다시 대전으로 이사를 했다. 20평 조금 넘는 빌라에 방이 두 칸이었다. 딸애한테 따로 방을 만들어줄 수 없어서 궁리하던 중, 커텐을 막아 초등학생인 아들아이와 방을 구분 해주었다.

딸애는 별 불만 없이(답이 없다는 걸 잘 아는지라) 자기만의 방에서 나름대로 공간을 꾸렸다. 그 때 딸애가 자기 방 벽의 한 면에 걸어놓은 유화그림이 있었다. 40호 일반형(F사이즈, 가로세로 100cm x 80cm 정도의 크기)의 이 그림의 제목은 따로 없지만 뒷면에 영어로 Ecstasy(엑스터시)라고 써 있었다. 그림을 그린 작가 S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삶의 환희'를 기원하면서 그리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엑스터시', 유화와 아크릴, 천 등으로 세밀하게 작업한 그림이다.
'엑스터시', 유화와 아크릴, 천 등으로 세밀하게 작업한 그림이다. ⓒ 한미숙

이사를 다니면서 이웃에게 우리가 정을 나눌 수 있는 선물은 주로 집에 있던 그림이었다. 액자에 넣은 그림은 아니었다. 또 액자에 넣어 줄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주로 캔버스 천이 그림틀 뒤로 넘어가게끔 타카(캔버스천과 나무틀을 이어줄 때 사용하는 도구)로 박아서 유화물감이 앞면뿐만 아니라 뒤로 넘어가는 옆 부분까지 칠해진 그림이었다. 그래서 액자가 따로 필요 없이 벽에 걸 수 있다. 나는 오히려 액자에 들어간 그림보다 옆으로도 이어지는 느낌이라 그림에만 집중하게 된다는 것이 장점으로 보였다.

한 때, 대학교 앞에서 화방을 운영했다. 서른 살부터 서른아홉 살 12월에 정리를 했으니 꼬박 10년을 한 자리에 있었던 셈이다. 주로 미대생들이 자주 드나들다 보니 몇몇의 학생들 사정이 어떤지도 눈여겨 보게 되었다. 미술재료가 수입품이 많고 수채화 2절 크기의 종이 한 장이라도 전문가용은 90년대 기준 3천~4천 원이었다.

어디 그 뿐인가, 국산 유화물감 50미리 1개당 1300원으로 주로 많이 사용하는 흰색은 붓질 서너 번에 튜브는 쭈글쭈글해진다. 재료비가 비싸다 보니 외상을 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 중에 S가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하면서 화방을 드나들며 알게 모르게 도움을 주고받았다. 그 때 학생들로부터 받은 것은 유화뿐만 아니라 아크릴, 동판, 판화 등 다양한 '작품'들이었다.

자주 집을 옮기고 옹색한 곳을 돌아다니면서도 '나중에 넓은 곳에 살게 되면 이 유화는 거실 정면에, 이 판화는 작은아이 방에, 은은한 수채화는 서재에 걸어 놓고' 싶은 이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그러나 생각 뿐, 현실은 넓은 공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락같은 곳에 그림을 쟁여두면서도 꼭 한 그림만은 우리 집과 다른 사람들의 공간을 드나들었다. 그 '엑스터시'의 그림은 아들아이가 첫 돌이 되기 전에 받았고 처음으로 집의 마루에 걸렸다. 그 다음 몇 번의 이동이 있었지만 그 그림은 벽에 걸리거나 한쪽에 보관되어 우리와 동고동락했다.

"그림이 수학적이에요~"

그러다 친정 언니가 식당을 한다고 했을 때 '엑스터시'를 선물로 주었다. 따로 예약손님을 받는 방의 벽에 '엑스터시'는 잠시 붙박였다. 그리고 2년 정도 시간이 지났다.

"니가 준 그림 다시 가져갈래?"

식당을 정리하던 언니한테 연락이 왔다. '엑스터시'는 다시 우리 집 주방 맞은 편 벽에 걸렸다. 작은 아이 학습지 방문교사가 일주일에 한 번씩 올 때마다 그림을 보며 한 마디 했다.

"그림이 수학적이에요~"

그때 나는 같은 그림을 보면서도 사람마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나 작업을 통해 느끼는구나 싶었다. 어쩌면 방문교사에게 '엑스터시'는 기하학의 점, 선, 면으로 먼저 다가왔을 것 같다. 그는 수학담당이었다.

딸아이 방에 걸린 '엑스터시'는 가뜩이나 커튼으로 막은 곳을 답답하게 했다. 그 그림을 떼어 다른 곳에 걸어 둘 마땅한 곳도 없었다. 그러던 중, 모임에서 오래전 알고 지내던 언니가 우리와 이웃해 살고 있는 걸 알았다. 30평대 아파트에 혼자 살며 직장에 다니고 있던 그 언니네 휑한 거실엔 '엑스터시'가 걸렸다.

"알 같다. 알에 뭔가 채워져서 어떤 게 탄생할 것만 같아."

그림을 걸고 나자 그 언니가 말했다. 이후에 한동안 '엑스터시'는 잊고 지냈다. 우리는 좁은 빌라에서 그 언니네 맞은편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어느 날, 연락도 없이 그 언니는 내가 준 '엑스터시'를 들고 왔다.

"갑자기 그림을 들고 와서 미안해. 나 집 내놨어. 아직 얘기하지 못했는데 만나고 있는 사람이랑 결혼을 하기로 했어. 지금 짐 정리하다가 이 그림은 주고가야 할 것 같아서..."

그 언니는 정년으로 퇴직을 하고 좋은 사람을 만나 새 가정을 이루었다. '엑스터시'는 다시 돌아와 우리 집 거실에 걸렸다. 우리는 그곳에서 또 세 번의 이사를 했다. 그동안 쭉 우리와 함께 했던 '엑스터시'는 불어난 살림과 함께 하기에는 버거웠다. 공간이 다시 좁아진 것이다.

마침 지인 소개로 지역에서 문해교육을 하는 사람을 소개받았다. 남녀노소가 모여 공부하는 공간, 좋은 뜻을 펼치는 그 곳에 '엑스터시'뿐만 아니라 집에 있던 다양한 크기의 그림 '작품'들이 책과 함께 그곳으로 옮겨졌다. 직장생활로 바쁜 일상에 묻혀 살면서 '엑스터시'는 시나브로 잊혀졌다.

계절이 몇 번 바뀌고 시간이 지나있었다. 그러는 중에 그렇게 좋은 뜻을 펼치리라 여겼던 문해교육에 대한 불편한 소식이 들렸다. 그러자 내 눈앞에 '엑스터시'가 먼저 아른거렸다. 잠을 설칠 정도였다.

'다시 그 그림을 달라고 해볼까?' 이미 줬던 걸 다시 뺏는 것 같아 무척이나 쪽팔릴(?)일이었지만, 왠지 '엑스터시'만큼은 나한테 돌아와야 할 것 같았다. 용기를 내서 찾아갔다.

"미안하지만, 저 그림은 내가 다시 가져가고 싶어요."
"아, 네~ 그러세요."

간절함이 통했다. '엑스터시'를 벽에서 떼어 내 손에 잡힐 때까지 상대방 마음이 바뀔까봐 나는 조바심까지 났다.

    '엑스터씨'가 거실에 걸려있다.
'엑스터씨'가 거실에 걸려있다. ⓒ 한미숙

'엑스터씨'는 현재, 내가 4년 가까이 근무했던 복지기관(그룹홈-공동생활가정)에 걸려있다. 작년 하반기, 퇴사 직전 그곳에 그림을 기꺼이 기증했다. 세상에 '작품'으로 나온 지 스물다섯 해. '엑스터시'는 그동안 남의 손에 혹은 내 손에 이끌려 여러 곳을 전전했다. 떠났다 싶으면 다시 돌아왔고, 돌아왔나 하면 또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초중고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며 생활하는 그룹홈에서 '엑스터씨'는 아이들과 함께 안착된 것 같다. '엑스터시' 정녕 내게 돌아올 일은 다시 없겠지. 너의 자리를 확인하고 떠난 내 마음은 이제 평안하다. 너도 그러하길!

덧붙이는 글 | 유어스테이지에도 송고합니다.



#그림#엑스터씨#유화#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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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가면을 줘보게, 그럼 진실을 말하게 될 테니까. 오스카와일드<거짓의 쇠락>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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