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이 대통령 4선에 성공했다. 푸틴은 한국전쟁 중인 1952년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가난한 노동자 가정에서 출생했다. 1971년 레닌그라드대학 법학부에 입학한 푸틴은 1975년 졸업과 동시에 KGB라는 약자로 유명한 국가보안위원회에 들어갔다.
그가 KGB에서 승승장구한 비결에 관해 한국외국어대 러시아어과 기연수 명예교수의 <러시아의 정체성:푸틴과 표트르 대제 그리고 러시아인의 의식구조>는 이렇게 말한다.
"그가 이렇게 잘 나간 것은 무슨 큰 공로나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어서가 아니고, 평소 강한 집념과 세심하고 집요한 성격으로 성실하게 일한 결과였다는 것이 푸틴 자신이나 주위의 증언이다."'강한 집념, 집요한 성격'이란 평가와 어울릴 만한 것이 있다. KGB 요원 발탁 뒤 첩보 아카데미에서 훈련받을 당시 그가 받은 평가다. 위 책은 <푸틴 자서전>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한다.
"겁이 없는 편인 그는 첩보 아카데미에서 저돌적으로 열심히 훈련에 임해, 단점으로 '위험 불감증'이라는 평가를 받기까지 했다."위험불감증이 단점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무모하게 일해서인지, 1998년(46세)에 KGB의 후신인 러시아연방보안국 국장이 되고 이듬해인 1999년 8월 총리직에 올랐다. 초대 및 제2대 러시아 대통령인 보리스 옐친이 그해 12월 사임하자, 이번에는 대통령권한대행으로 격상됐다.
2000년(48세) 대선에서 제3대 대통령이 된 푸틴은 2004년 재선에 성공했다. 2008년(56세)에는 3연임을 금지한 헌법 규정 때문에 드미트리 메드베데프(43세)를 제4대 대통령으로 만든 뒤 자신은 실세 총리로서 국정을 이끌었다.
한국의 이승만과 박정희는 3선 개헌을 무리하게 추진한 일을 계기로 국민적 신망을 한층 더 잃고, 결국 권좌에서 쫓겨나거나 죽임을 당했다. 두 사람은 더 하고 싶을 때 참지 못하고 더 하다가 인망을 잃었다. 푸틴은 더 하고 싶을 때 참았다가 4년 뒤에 다시 했다. 법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헌법적 가치를 함부로 훼손하기 힘들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총리로 있은 4년간도 실제로는 대통령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권력욕을 자제했다기보다는 형식상의 지위 격하에 개의치 않았다고 봐야 할 것 같다. 4년간의 총리 생활을 끝낸 뒤인 2012년(60세), 제5대 대통령이 됐다. 메드베데트 재임 중의 개헌으로 이때부터는 임기가 6년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이번 제6대 대선에서 4번째 당선에 성공했다. 임기는 72세 때인 2024년까지다.
KGB 요원 발탁에서부터 대통령이 되기까지...
조선이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겪을 때만 해도 러시아는 대단치 않은 나라였다. 유럽 내에서도 강자가 아니었다. 그랬던 러시아가 오늘날의 강대국으로 성장하게 된 계기는 1689년 표트르 대제(표트르 1세)의 등극이었다. 숙종의 부인인 장희빈이 정1품 후궁인 빈(嬪)이 되던 해의 일이었다.
표트르 대제를 보면 푸틴의 지향점을 읽을 수 있다. 푸틴의 우상이기 때문이다. 푸틴이 집무실에 표트르 초상화를 걸어둔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40년간 캘리포니아대학에서 역사학 교수로 근무한 니콜라스 랴자놉스키의 <러시아의 역사>에 이런 대목이 있다.
"표트르 1세가 당대인들에게 심어준 인상은 엄청난 힘과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2미터가 넘는 키와 단단한 체구를 가진 차르(황제)는 깜짝 놀랄 만한 육체적 힘과 활력을 소유했다. 이런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는 그의 통치기 전체를 상징하는 개인적인 특성이었다."이따금 푸틴이 근육질 상체를 드러내며 체력을 과시하는 장면이 언론에 보도된다. 자신을 표트르 대제와 동일시하고 싶어 하는 푸틴의 심리와 무관치 않은 장면이다.
즉위 당시 17세였던 표트르는 서유럽을 모방해 경제·사회·문화 개혁을 단행해 러시아의 국가 체질을 개조했다. 즉위 8년 뒤인 1697년에 차르 신분을 숨기고 약 250명의 사신단에 끼어 서유럽을 순방한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다. 신분을 숨긴 상태에서 그는 외국인들과 자유롭게 토론했다. 가능한 한 많은 것을 배우고자 했던 것이다.
표트르는 지주 계층을 견제하고 상인 계층을 우대했다. 상인의 위상이 부각되는 서유럽 상황과 보조를 맞춘 조치였다. 지주 자체는 나쁜 사람들이 아니지만, 당시는 지주보다는 상인을 경제적 지배층으로 띄우는 게 유리했다. 지주들이 이를 환영할 리 없었으므로, 표트르는 강압을 써서 의지를 관철시켰다. 대한민국에서 재벌개혁을 하는 것만큼 어려운 그런 일을 해낸 것은 특유의 과단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표트르는 국가를 개조하는 가운데, 대외팽창에도 힘썼다. 바다로 나가는 길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콜럼버스, 바스코 다가마, 마젤란 등의 활약으로 16세기 초반에 세계 바닷길이 통합된 뒤로, 유럽 국가들은 바닷길을 장악하는 데 국력을 쏟아 부었다. 후발 주자 러시아를 이끄는 표트르는 지중해와 발틱해(스웨덴·핀란드 남쪽)로 진출하고자 전쟁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를 위해 17세기 후반부터 동지중해·동유럽·중동·북아프리카 최강국인 오스만투르크(터키)와 전쟁을 벌여 승리를 거두고, 18세기 초반에는 북유럽 최강국인 스웨덴과 전쟁을 벌여 승리를 거뒀다. 이로써 러시아는 유럽 강대국으로 부상했고, 이는 19세기에 러시아가 영국과 더불어 세계 최강이 되는 데 밑바탕이 되었다.
표트르를 열렬히 따라하는 푸틴
그렇지만 표트르의 행적에 명(明)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암(暗)도 있었다. '강한 러시아' 건설이란 목표 하에 백성들을 가혹하게 동원했다. 특히 하층 농노(영주에게 종속된 농민)와 빈민 노동자들을 괴롭혔다. 고통에 못 이긴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표트르는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지금까지는 부국강병을 위해 백성을 희생시킨 군주들이 비난보다는 칭송을 더 많이 받았다. 하지만, 일반 대중의 힘이 강해지고 이들의 관점이 역사 평가에 투영되면서, 그런 부류의 군주들이 점점 더 부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 대중이 온전히 권력을 접수하는 날에는 그들이 한층 더 낮은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이런 추세를 감안하면, 표트르는 지금까지는 러시아의 도약을 위해 초석을 놓은 군주로 평가됐지만, 앞으로는 그런 면보다는 '위험하고 무자비한 군주'라는 면이 점더 많이 부각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런 표트르를 푸틴이 모방하고 있다. 아주 열렬히 따라하고 있다. 2004년에 한국외대 러시아연구소가 발행하는 <슬라브 연구> 제20권 제1호에 수록된 김현택 교수의 논문 '상트 페테르부르크 창건 300주년이 주는 역사적·정치적 함의-표트르 대제와 푸틴과의 유비(類比)'에 이런 글이 있다.
"푸틴이 등장했다...... 이 젊은 지도자는 제2의 표트르 대제를 자처하고 나섰다...... 두 통치자가 전임자로부터 물려받은 정치·경제적 혼란도 그렇거니와, 위대한 강국 러시아 건설 의지를 천명하면서 공통적으로 그 해결책을 서구 발전 모델에서 찾고 있는 것도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두 지도자 모두 개혁적인 대내외 정책을 펼치고 있다는 점도 공통된 특징이다."푸틴이 표트르의 긍정적인 측면만 따라하는 것은 아니다. 공격적인 대외정책에서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러시아는 구소련 해체 이후 미국에 뒤떨어진 자신의 처지에 불만을 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푸틴은 조건만 충족된다면 표트르 때처럼 노골적인 대외팽창을 추진할 가능성이 있다.
첩보 아카데미 때부터 푸틴은 '위험 불감증'이란 평가를 받았다. 실제로도 그는 위험을 무시하고 달려왔다. 그런 그가 대통령 4선의 기운을 앞세워, 보다 적극적으로 대외관계에 임한다면 전 세계는 한층 더 긴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아베 신조의 일본이 군사대국화를 목표로 정력적으로 움직이고 김정은의 북한이 북미수교를 목표로 미국을 흔들어대는 상태에서, 2017년부터는 미국의 트럼프가 강한 미국을 목표로 저돌적으로 움직이더니, 2018년 들어서는 시진핑의 중국이 국가주석 장기집권 가능성을 열어둔 데 이어 푸틴의 러시아가 '현대판 표트르'에게 대통령 4선을 선물했다.
한국을 둘러싼 국가들이 지도부에 힘을 몰아주는 것은 세계 공기가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대외적 위기에 맞서 내부를 응집할 필요성이 있다는 인식이 각국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과 한국인들의 삶은 국내적인 경기침체뿐 아니라 이런 외적인 요인 때문에도 한층 더 각박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