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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말에는 힘이 있다'고 한다. 어떤 말에는 힘을 얻고 어떤 말에는 상처를 받는다. 모든 말에 힘이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 예를 들면, "나는 오늘 출근한다", "날씨가 맑다", "너는 사람이다"와 같은 말들을 듣는다고 해서 힘을 얻거나 상처를 받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말이 힘을 갖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주디스 버틀러의 <혐오 발언>
주디스 버틀러의 <혐오 발언> ⓒ 알렙

주디스 버틀러는 <혐오발언>에서 우리가 왜 말에 상처를 받는지, 모욕과 같은 언어적 상처가 언제 어떻게 힘을 가지게 되는지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발언의 순간에 어떤 관습이 어떻게 적용되고, 그것을 적용하는 사람이 가진 권력은 무엇이며, 그러한 상황이 타당한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말이 가지는 힘, 즉 언어가 가지는 행위 능력은 특정한 상황과 맥락 속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모든 '이름 부르기/욕하기(name-calling)(12쪽)'가 상처를 주지 않는다는 데 주목한다. 상처를 주는 말은 '특정한 시간성(12쪽)'을 가진다고 봤기 때문이다.

말이 상처가 되는 순간은 개별적이고 한시적인 것이 아니라 '순간'으로 압축된 시간의 역사이다. '검둥이'라는 말이 상처가 되는 것은 오랫동안 이어져온 인종 차별이 말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상처가 되는 말은 반복적으로 인용되고 사용되면서 모멸의 의미가 각인된다.

대개 혐오 발언을 하는 사람은 권력을 가지고 있고, 혐오 발언을 수신하는 사람은 권력이 없다. 여기서 혐오 발언자의 권력이 절대적이거나 독립적인 것이 아니다. 혐오 발언이 힘을 가지려면 말하는 사람이 어떤 의미를 말에 담고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권력을 가져야 하다. 그런데 그것은 말하는 사람을 초월해 있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혐오 발언이 반복적으로 사용될 때만 가능하다.

버틀러는 또 '혐오하는 말이 발화되면 무조건 전달되고 상처로 작용하는 것일까?'라고 질문한다. 대답은 '아니다'이다. 말에 힘이 있다는 명제는 말의 효과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라고 비판한다. 이 말은 혐오 발언이 별 것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혐오 발언이 의도한 혐오를 실패하게 될 가능성을 말하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무슨 말을 누군가에게 한다는 것은, 단지 말하는 사람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말을 듣는 사람이 "수신" 할 때만 말이 전달된다. 그러므로 혐오하는 말을 듣는 사람이 수신하지 않는다면 혐오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없다.

"우리가 불리는 이름은 우리를 종속시키기도 하지만 행위능력의 장면을 양가성으로부터 생산함으로써 그 부름이 발생한 의도를 넘어서는 일련의 효과들 또한 가능하게 한다. (중략) 상처를 주는 말은 그것이 작동했던 과거의 영토를 파괴하는 재배치(redeployment) 속에서 저항의 도구가 된다."(302쪽)

 그런 점에서 버틀러는 언어 행위가 가지는 힘이 "사회적 맥락에 의해서 정의될 뿐 아니라, 또한 맥락과 단절할 수 있는 그 능력에 의해서도 표시(84쪽)" 된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양가적인 구조에 의해서 상처주는 말이라는 언어 행위를 전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말에 의한 상처에 저항한다는 것은 말이 주는 상처를 실행하지 않으면서 상처주는 말을 반복하면 된다.

예를 들면, 퀴어(queer)라는 말은 이상한, 기괴한 등의 의미로 처음에는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적 표현이었다. 그런데 이 말을 모욕적이고 편견에 가득찬 표현으로 수신하는 대신 되받아쳐 말함으로써 퀴어를 이성애주의적인 사회 문화에 일침을 가하는 급진적인 사람들로 의미가 바뀌었다.

"만일 동일한 발언이 되받아쳐 말하기(speaking back)와 그것으로 말하기(speaking through)의 계기가 됨으로써 그 발언을 건네받은 자에 의해 차지되고 변하게 된다면, 인종차별 발언은 어느 정도는 자신의 인종차별적 기원으로부터 이탈되지 않을까? 의도가 그것이 '마음에 품고 있던' 그 행동에서 실현되고 해석이 의도 그 자체에 의해 미리 통제되는 일종의 효과적인 말하기를 보장하려는 노력은 더이상 진실이 아니며 전혀 진실이 아니었을 언어에 대한 어떤 주권적인 그림으로 회귀하려는 희망적인 노력에 해당하며, 그것은 정치적인 이유들 때문에 진실이 아닌 것을 환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발언이 변화될 수 있다는 것, 자신의 기원으로부터 이탈할 수 있다는 것은 그런 발언과 관련된 권위의 장소를 변경시키는 하나의 방식이다."(178쪽)

이처럼 혐오 발언은 언제나 의도한 대로 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혐오 발언의 효력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전유와 전복에 취약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이 작동하는 맥락에서의 이탈이 가능하다. 심지어는 그 말을 반복해서 사용하는 미학적 재연만으로도 어떤 효과를 낳을 수도 있다. 따라서 버틀러는 혐오 발언이 수신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형태로만 존재하지 않고 저항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고 본다.

버틀러가 혐오 발언에 대한 전유와 전복, 그것을 통한 저항이 가능하다고 본 이유 중 하나는 혐오 발언이 비합리적이고 편집증적이기 때문이다. 편집증적 사고란 "자아를 향한 어떤 지각된 위협과 관련된 박해나 음모에 대한 믿음을 포함(204쪽)" 하는 비합리적인 망상이다. 역사적으로 혐오는 특정 집단을 배척하기 위해서 이용되었다. 유대인, 여성, 동성애자 등에 대해서 '정상적 인간' 범주 바깥으로 밀어내면서 '정상 인간'을 위협하고 오염시키는 존재로 여겨왔다.

버틀러는 3장(전염되는 말: 편집증과 동성애)에서 혐오와 혐오 발언이 비합리적이고 상상의 허구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근거로 DADT(Don't ask, Don't tell: 미국 군대에서 동성애자의 입대를 허용하기 위해서 입대시 성적지향을 묻지 않고, 스스로 동성애자임을 말하지 못하도록 하게 한 정책)를 예로 들었다.

DADT는 언뜻보면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 발언을 규제한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에는 동성애 혐오가 전제되어 있다. 왜냐하면 군대 내에서 동성애자이기 때문에 차별을 하지는 않지만, 동성애자라는 정체성은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 군대에서 '나는 동성애자다'라고 말하는 것 자체를 동성애 행위와 같은 것으로 간주하고, 동성애 행위는 다시 전염적이고 공격적인 행동으로 해석했다.

그렇기 때문에 동성애자라는 말을 하지 못하게 하는 규제적 담론은 동성애자 발언에 대한 망상(동성애자라고 말하는 것=동성애 행위=전염적이고 공격적인 것) 속에서만 가능해진다. 그런 맥락에서 버틀러는 혐오 발언 자체에 대한 규제나 처벌에 대해 부정적이다. 왜냐하면 동성애에 대한 혐오가 그대로인 상황에서 말의 규제는 규제적인 동시에 혐오를 반복하면서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물론 혐오 발언은 소수자를 침묵하게 할 수 있다. 버틀러가 이를 부정하진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침묵당한 상태에서도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혐오하는 말과 그것으로 인한 상처 사이의 잠재적 간격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사이의 공간을 저항의 장소로 활용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곳에서 발언 행위와 상처의 연결을 풀어놓고 해체할 수 있으며, 그곳에서 되받아쳐 말하거나 의미를 비틀어버리는 저항발언(counter-speech)이 가능하다고 본다.

혐오 발언에 대한 저항발언(conuter-speech)은 한 개인이 개별적으로 하는 것은 어렵기도 하거니와 외롭고 공허한 외침으로 전락되기 쉽다. 그러므로 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과 그들과 연대하려는 사람'들'의 집단적 노력이 필요하다.

일본에서는 극렬한 혐한시위에 맞선 '카운터스(일본 내 혐한 세력에 맞서는 행동대)'가 있다. 우리나라에는 여성혐오에 미러링이라는 전략으로 대응한 메갈리아가 있다. 정희진은 "메갈리아는 일베에 조직적으로 대응한 유일한 당사자"라고 말했다(2016.7.31. 한겨레신문). 그 뿐인가 최근 번지고 있는 미투와 위드유도 같은 맥락이다.

그와 같은 집단적 움직임이 혐오 발언과 상처 사이의 연결을 느슨하게 할 수 있으며, 더 많은 개별 주체들이 혐오 발언에 대해 "전유하고(appropriating), 전복하며(reversing), 재맥락화하는(recontextualizing)(82쪽)"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게재할 예정입니다.



혐오 발언 - 너와 나를 격분시키는 말 그리고 수행성의 정치학

주디스 버틀러 지음, 유민석 옮김, 알렙(2016)


#혐오발언#주디스버틀러#COUNTER-SPEECH#저항발언#혐오발언의양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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