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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코

 부르고스를 배경으로 서 있는 프란체스코
부르고스를 배경으로 서 있는 프란체스코 ⓒ 차노휘

프란체스코의 몸이 흔들거리더니 왼쪽으로 살짝 기우뚱했다. 그는 누가 볼까 싶어 잽싸게 등을 세웠다. 옆에 앉은 나는 모른 척 해주었지만 입가에 절로 피는 웃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강철 같은 그도 피곤은 어쩔 수 없나보다. 이곳은 부르고스에 있는 병원 대기실이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가는 동안 세 군데 대도시를 지나가게 되는데 이곳이 두 번째이다. 병원에 갈 일이 있으면 이 세 도시에서 해결해야 한다.

나는 전날 발을 살폈을 때 심각한 왼쪽 발가락을 제쳐두고라도 총 다섯 군데에 물집이 잡혀 있다는 것을 알았다. 통증 없는 그것을 보고 있으려니, 과연 저 발가락이 내 발가락인가 싶었다. 근육통은 전혀 없었다. 단지 물집이 번거로울 뿐이었다. 왜 물집이 유독 많이 생기는가. 더군다나 왼쪽 새끼발가락은 밴드 붙이는 것조차 무서웠다. 어제 작은 상점에서 밴드보다 더 좋아 보이는, 피부처럼 말랑한 것을 6.5유로 주고 사서 붙였지만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감염이 걱정 되었다. 그런데도 진찰을 받아야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이곳은 우리나라 급으로 말하면 중형 병원 정도이다. 나는 외국인이라 여권을 제시했다. 그러자 두 가지 종이를 접수처에서 내주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뜻이다. 첫 번째는 의사 상담만 할 수 있었고(73.75유로), 두 번째는 상담과 처치를 받을 수 있는 요금이었다(92.18유로). 나는 두 번째 것을 선택했다. 그런 뒤 인적 사항을 적었다. 갑작스러운 병원행이라 영문 주소도 한참을 헤맨 다음에 적을 수 있었다.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유럽인들은 병원에 직접 병원비를 내지 않는다. 나는 외국인이다. 의사 진료와 처치를 받은 다음 병원에서 십분 거리인 지정된 은행에 현금으로만 돈을 입금한 다음 그 영수증을 병원에 다시 가져다 줘야 한다. 이런 내용을 프란체스코가 영어로 성심성의껏 통역해주어서 알았다.

아, 비싼 병원비와 복잡한 절차, 지루한 대기 시간. 절차를 받는 동안 몇 번이나 서류를 찢고 나가고 싶었다. 일찍 알베르게에서 발을 쉬면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를 위해 옆에서 인내심 있게 기다려주고 있는 프란체스코의 성의를 생각해서 참았다. 대기 순번까지 놓쳐서 대기실 모든 고객 순번이 끝난 다음에야 진찰을 받을 수 있었다. 처치 또한 별 것 없을 거라고 미리 나는 예단하고 있었다.

"프란체스코, 나, 꼭 진찰을 받아야할까?"

그는 잠이 확, 깨는 듯이 눈을 크게 뜨며 조금 언성을 높였다.

"무슨 말이니? 너는 꼭 의사에게 발 상태를 보여야 해. 염증이라도 생겨봐. 일이 더 커질 수가 있어. 그리고 항생제도 다 떨어졌다고 했잖아?"

"그러긴 해. 하지만 너무 복잡해. 약국에서 항생제만 사면 되지 않을까?"

"노휘, 네 발가락은 꼭 치료를 받아야 해. 약국 같은 곳에서는 치료를 해주지 않아."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맞은편에 앉은 백발 할아버지가 호기심 가득 한 눈으로 나를 훑어봤다. 나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갑자기 그가 부러웠다. 그는 여행자가 아니라 이곳 현지인이었다. 우리네 병원에 오는 어르신들처럼 느긋했다. 나도 동네 병원이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 의사와 직원들은 영어를 거의 하지 못했다. 스페인어와 영어를 능숙하게 하는 프란체스코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고작 나는 어제 그의 얼굴을 제대로 봤고 오늘 오전에 함께 걸어왔을 뿐이다. 그런데 그에게 많은 것을 의지하고 있었다. 

 첨탑 위 황새 둥지
첨탑 위 황새 둥지 ⓒ 차노휘

전날 저녁식사를 하면서 데이비드가 농담 삼아 그를 이탈리아 마피아라고 했는데 절반은 맞았다. 프란체스코는 이탈리아인이었지만 마피아가 아니라 46세 그래픽디자이너였다. 그가 일찍 일어나 길 떠날 채비를 하지 않았다면 그와 함께 병원에 올 일은 없었을 것이다.

부르고스에 도착하면 생일 맥주를 마시자던 데이비드는 알람이 울려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연석은 늘 그렇듯, 혼자서 잘 걸어올 것이다. 혼자 온 프란체스코와 맥스 그리고 나는 5시 30분에 아타푸에르카 알베르게를 떠났다. 그와 맥스에게 헤드랜턴이 있었다. 실은 길찾기를 조금 두려워한 맥스가 프란체스코와 함께 가자고 했다. 알베르게를 벗어나 3km 지점에 있는 십자가 고개(Alto Cruceiro, 1070m)를 해 뜨기 전에 지나야 했다. 프란체스코는 이번이 두 번째 순례길이었다. 처음에 나는 프란체스코에게 이름도 묻지 않았다. 날이 밝으면 각자의 걸음 속도에 따라 헤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이탈리아 사람들에게는 뭔가가 있었다. 우리네 어휘로 말하자면 '정' 이라고 할까. 이성적이기 보다는 감성적인 면이 더 강하다고 할까. 지극히 주관적인 내 평가다. 각국의 사람 몇과 동행해봤다. 그 중에서 아름답다, 라는 감탄사를 제일 많이 하고 멈춰서 사진도 제일 많이 찍는 사람은 이탈리아인이었다.
 1.070m에 있는 십자가 고개(Alto Cruceiro)
1.070m에 있는 십자가 고개(Alto Cruceiro) ⓒ 차노휘

워싱턴D.C. 출신 맥스는 산티아고 완주를 26일로 잡고 왔다. 그 계획에 충실하기 위해 바삐 걷기만 했다. 멈춰 서서 사진 찍는 일은 거의 없었다. 오늘 아침도 어김없이 4시 30분 즈음에 일어나 걸을 준비를 했다. 더우니깐 조금이라도 일찍 걸어서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였다.

4시 30분. 빵과 사과로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짐을 꾸릴 때 몸 풀기를 끝낸 프란체스코가 탁자에 앉았다. 여전히 나를 두고 굿 쉐프, 라고 했다. 그는 식탁에 과일을 종류 별로 늘어놓고 또, 두 가지나 되는 빵을 앞에 두고는 아침 식사를 한다면서 같이 먹자고 했다. 철저한 개인주의(특히나 미국) 서양인들은 자기가 준비한 것은 자기만 먹는다. 그게 아주 익숙하다. 나도 빵과 사과로 이미 요기를 한 참이라 고맙다는 인사만 했다. 그는 키위 하나를 기어코 내 손에 쥐어주었다.  

그는 걷기 전부터 다리가 아팠다고 했다. 물집은 아니었다. 종아리 안쪽에서 발목까지 멍이 들어 있었다.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아야했고, 부르고스를 지나니 그곳 병원에 들러 검사도 받고 먹던 약도 신청한다고 했다. 그는 꽤 괜찮은 병원을 아예 검색해놓고 있었다. 이왕 가는 병원, 같이 가도 별 부담이 없겠지 싶었다.  

 부르고스 야외 카페
부르고스 야외 카페 ⓒ 차노휘

부르고스는 큰 도시이고 아름다웠다. 거리마다 중세시대의 건축물이 있고 예술성이 뛰어난 조각상도 많았다. 유명한 성당도 있다. 거리를 걷다보면 런웨이를 방불케 하는 모델 같은 멋진 여자가 심심찮게 지나갔다. 하지만 그것은 내게 배경일 뿐이었다. 걷는 동안 참았던 통증을 치료해줄 병원에 가야했다. 맥스는 나와 헤어지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뭔가 하지 않고 걱정부터 하는 것은 에너지 낭비라고 생각해. 네가 걱정하는 것은 발의 감염이야. 항생제도 몇 알 남지 않았다고 했지? 하지만 너는 걷는 것 또한 포기하고 싶지 않잖아? 앞으로 20일 정도는 더 걸어야해. 그렇지? 그렇다면 한 가지 방법 밖에 없지 않니? 여러가지 일을 하고 싶어도 일의 순서가 있다고 나는 생각해. 지금, 네가 제일 먼저 해야할 일은 병원 가는 일이야."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내게 메일 주소를 남기고는 안아주었다. 서로, 길 위의 행운을 빌었다.

드디어 프란체스코와 나를 부르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우리는 벗어놓았던 배낭과 스틱을 들고 진찰실로 들어갔다.

진찰과 처치 결과이다. 첫 번째는 신발이 문제란다(프란체스코가 먼저 지적했다). 1년 동안 잘 길들인 등산화를 신고 왔는데 너무 무겁고 덥단다. 당장 '쿨' 한 신발로 바꿔란다(트레킹화나 스포츠 샌들). 둘째는 양말을 두 켤레나 신었다. 얇은 것과 두꺼운 것. 그런데 한 켤레만 신으란다. 양말 두 켤레가 서로 마찰을 일으킨단다. 또 다른 주의 사항도 있었다. 나는 프란체스코가 통역하는 내용을 끝까지 듣고 나서 물었다.

"계속 걸어도 되나요?"

그것은 괜찮단다.

마침내 의사와 상담이 끝나자 아래층에 있는 간호사실로 갔다. 그곳에서 간호사가 소독해주고 제2의 피부라 할 수 있는 밴드(?)를 가위로 잘라 새끼발가락에 잘 감싸주었다(이것을 3일에 한 번 교체하라고 했지만 숙소에서 보니 떨어져 나가버렸다). 간호사는 여분의 밴드를 한 장 더 주었다. 약국에서 처방 받은 약은 식사 후 한 알 씩 먹으라고 했다. 항생제 같았다.

이런 모든 상담과 통역, 은행을 찾아 돈을 지불하고 약국에 들러 약을 산 뒤 다시 병원으로 가서 영수증을 주는 일 등을 프란체스코가 동행하면서 도와주었다. 이렇게 더운날 무거운 배낭을 메고 은행 찾아가는 것도 번거롭기 그지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는 10km를 더 걸어가야 목적지에 닿을 수 있었다.
 길 위의 풍경
길 위의 풍경 ⓒ 차노휘

대가 없는 대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공립 알베르게에 나를 데려다줬다. 그리고 침대 번호를 받고 가방이 무거우니 가방을 맡기라고 했다. 배가 고프니 우선 식사를 하고 스포츠 매장에 가자고 했다. 우리는 바로 앞 식당으로 들어갔다. 이것저것을 골라먹을 수 있었다. 점심 정도는 사야 미안함이 덜 할 것 같아서 내 의사를 밝혔다. 그는 절대로 그러지 말라면서 계산을 했다. 그것도 이것저것 내가 먹어보지 못한 요리를 주문하고는 시원한 맥주 두 잔까지 시켰다.

식사하면서도 주의 할 사항과 어떤 신발을 사야하는지에 대해 잔소리(?)하기에 바빴다. 의사나 간호사한테 들었던 말을 되풀이했다. 스포츠 매장까지 가서 신발을 골라주어야 마음이 편하다며 기어코 앞장 서서 갔다.

첫 번째 간 스포츠 매장은 아디다스 매장이었다. 그는 곧바로 여기는 트레킹화를 팔지 않는다면서 그 직원한테 물어 전문 매장 위치를 알아냈다. 십분 정도 걸어서 도착한 그곳은 씨에스타(낮잠) 시간이라 문이 닫혀 있었다. 그는 신발을 직접 골라주지 못해 아쉬워했다. 그는 최선의 방법으로 유리 진열장에 진열된 신발을 보면서 저것은 안 되고 이것은 괜찮은데 밑창이 어떻고, 배낭이 무거우니 고어텍스는 선택하지 말고 등 한참을 또 설명을 해주었다. 꼭 내 손가락 정도 여유가 있는 신발을 사라면서 직접 내 신발 앞굽에 손가락을 대보게 하고는 이해시켰다. 그렇게 하고도 걱정되는지 사도 괜찮은 트레킹화 상품을 일일이 메모를 해주었다.

아, 그때 눈물이 글썽이는 것은 무슨 이유람(다행히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그는 다시 알베르게에 나를 데라다주고는 길을 떠났다. 그 시간이 4시 전이니 10km를 더 걷는다면 7시 전에나 다음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다. 나는 그가 떠나는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전선 줄에 앉아 있는 새
전선 줄에 앉아 있는 새 ⓒ 차노휘

부르고스 알베르게는 광장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광장은 온통 길거리 식당이었다. 밤새 알베르게 유리창 너머에서 술렁이는 소리를 어쩔 수 없이 들어야 했다. 그 많은 청춘들이 회포를 이곳에서만 푸는 것일까. 아침 5시가 되어서야 조용해졌다.

알람이 울려도 일어나지 않은 나는 고민을 했다. 아침 9시까지 기다려 트레킹화를 사서 길을 떠나야할지 아님 그냥 신었던 신발을 신고 걸어야할지. 오랜만에 5시 30분이 돼서도 누워있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이런 맛도 좋았다. 하지만 한두 사람이 일어나서 짐을 챙기는 소리가 들리자 내 마음은 괜스레 바빠지기 시작했다. 길을 떠나야 하나, 이대로 있어야 하나.

바깥의 어수선함에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이 두 눈을 감았다. 가슴을 쓸어내리고는 다리를 쭉 폈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려 보았다. 곧 마음이 평온해지면서 불안이 달아났다. 나는 살며시 두 눈을 뜨고, 프란체스코가 떠나기 전에 했던 말을 되새겨 봤다. 

"산티아고까지 완주하게 된다면 혼자만의 힘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 내가 내 발로 걷지만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알게 모르게 받잖아. 맥스와 걸으면서도 너는 도움을 받았을 거야. 맥스도 마찬가지야. 맥스도 너와 동행해서 외롭지 않았을 거니깐.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어. 길 위에서는 만남도 이별도 아무 대가 없이 다가오니깐. 또한 아무 대가 없이 베푼 인정과 여러 응원이 있으니깐. 이런 힘들이 모여서 완주를 해낼 수 있는 거야. 혼자가 아니라 여러 사람의 힘이지.

그러나 나는 아무 대가가 없지만 대가가 있다고 생각해. 내가 첫 번째 완주를 했을 때 프랑스인 노부부로부터 도움을 받은 적이 있어. 그때 지갑을 분실했거든. 내게 50유로를 선뜻 내주었어. 며칠 간 알베르게를 사용하고 음식을 사먹을 수 있는 돈이었어. 네가 내게 고마움을 느낀다면 노부부의 도움을 이제야 네게 줄 수 있어서야. 나도 그래서 네가 고마워. 그 은혜를 갚을 수 있게 해줘서 말이야."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이었다.

"길을 걸으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해야 한다는 거야. 그래야 누군가를 도와주고 싶을 때 도와줄 수 있어. 그게 가장 기본이야. 이미 너는 알고 있었지?"

말을 다 마치고 나서는 한없이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 뒤돌아섰다.

덧붙이는 글 | ‘산티아고 순례길 프랑스길’은 2017년 6월 13일에 걷기 시작해서 7월 12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했습니다. 30일만의 완주였습니다. 그 다음 날, ‘세상의 끝’이라는 피니스테레와 묵시아까지(100km)까지 내처 걸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34일 동안 900km 여정을 마쳤습니다. 몇 십 년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34일의 여정은 짧을 수 있으나 걸으면서 느꼈던 것들은 제게 인생의 축소판처럼 다가왔습니다. 움츠린 어깨를 펴게 하고 긍정적인 미래를 내다보게 했습니다. 이곳에서 34일 간의 힘들었지만 행복했던 시간들을 도란도란 풀어놓으면서 함께 공유하려고 합니다.



#산티아고 순례길#프랑스 길 #부르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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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이자 문학박사. 저서로는 소설집 《기차가 달린다》와 《투마이 투마이》, 장편소설 《죽음의 섬》과 《스노글로브, 당신이 사는 세상》, 여행에세이로는 《자유로운 영혼을 위한 시간들》, 《물공포증인데 스쿠버다이빙》 등이 있다. 현재에는 광주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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