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그랬다. 언제나 고향 가는 길은...
길이 계속 되었다. 끝이 없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도로에 차의 행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지나갔다. 계속되는 것은 길만이 아니었다. 봄소식을 전하는 물기어린 나뭇가지, 노란 개나리, 끝을 알 수 없는 산자락이 재빠르게 눈길을 잡다가 서서히 뒤로 멀어져 갔다.
날은 흐렸다. 뒷자리에 앉아 그저 무심하게 멀어져가는 나무와 산과 도로표지판과 간판을 바라보았다. 흐린 하늘이 시간과 더불어 점점 더 탁해지고 있었다. 탁한 하늘 사이로 순간순간, 언뜻언뜻, 끊임없이 해가 고개를 내밀었다. 오후 1시 30분, 서울 출발시간을 기점으로 해서 3시간 30여분이 소요될 것이라고 내비게이션이 알려준다. 멀다. 먼 곳이다. '너무 멀다!'라는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은 서울에서 태어나 자라고 단 한 번도 서울을 떠나 살아본 적이 없는 서울토박이, 서울여자가 거리에 대해 느끼는 생경함 때문일 것이다.
어느덧 차는 중부고속도로를 지나 호남고속도로로 들어섰다. 스쳐지나가는 물먹은 나뭇가지 사이로 환한 햇살이 차창을 타고 들어왔다. 마치 가는 방향을 안다는 듯, 해도 산등성을 타고 계속 따라왔다. 곧 해가 산 너머로 기울고 있었다. 환한 햇살은 어느새 쓸쓸한 아쉬움을 남기고 황혼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 빛이 너무나 고요해 마음을 아프게 했다.
황혼녘 들판에 한 남자와 여자가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올린다. 밀레의 <만종> 배경이다. 밀레는 어떤 기도를 표현하고 싶었을까 자문하며 마음으로 황혼을 바라보았다. 그 황혼에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높은 나뭇가지에 까치집이 도드라져 보였다. 그 모습이 아주 고고했다.
차는 계속 달렸다. 잠시 쉬자고 삼촌(시동생)이 이서 휴게소에 차를 세운다. 서울여자는 핫도그와 커피를 사서 시동생과 조카에게 건넸다. 휴게소에서 먹는 간식은 유난히 맛이 있다. 어린애처럼 핫도그를 음미하던 마음을 접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직 갈 길이 멀다. 조급한 마음이 자꾸자꾸 갈 길을 재촉한다.
내비게이션이 알려준 도착 예정 시간인 오후 3시간 30분을 훨씬 지나 마을 어귀에 도착했다. 마을로 들어서는데 까치집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어서 오라'며 하늘을 향해 높이 뻗은 나뭇가지에 까치 두 마리가 앉아 정답게 지저귀며 반긴다. 마을의 까치집은 오면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높다. 고고함이 하늘을 찌를 듯하다.
드디어 남편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 고창에 왔다. 시제를 모시러. 고창의 봄은 초록빛이었다. 날이 저무는 시간에도 불구하고 온통 밭과 논에 가득한 초록빛의 향연이 살아있는 생동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응암경로회당, 응암복지회관, 방사능 비상시 집결지(고창군)라는 팻말을 단 마을회관 앞에 차를 세운다. 이 복지회관은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라 도회지로 떠난 사람들이 마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낸 기부금으로 지어진 곳이다. 그런 마음을 알리는 헌성비(2004년 12월 5일)가 자랑스레 마을회관 앞에 세워져 있고, 거기에 남편의 이름도 중앙에 또렷이 새겨져있다. 고향에 오면 늘 이곳에 차를 세운다. 기부금으로 세워진 복지회관은 딱히 마을사람들만의 것이 아니다. 고향이 이곳인 누구라도 오면 잘 수 있고, 쉴 수 있고, 식사할 수 있고, 차를 세울 수도 있다. 너, 나, 모두의 공간이다.
하나, 둘 시제를 드리러 온 자손들의 자가용이 도착하는 순서대로 마을회관 앞에 선다. 마을회관을 돌면 바로 뒷집이 시댁이다. 부모님은 다 세상을 떠나시고, 지금 고향을 지키고 계시는 작은아버님과 작은어머님이 "왔느냐!"고 웃으며 맞으신다. 뒤이어 저녁 준비로 바쁜 작은 집 큰삼촌과 큰동서가 반긴다. 공항에서 바로 오기로 한 남편(큰집에 둘째)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아마 늦게야 도착할 것이다. 더 늦으면 새벽에나 오려나?
새벽에 눈을 뜨고 시계를 보았다. 어김없이 오전 5시다. 시골의 새벽은 깊었다. 멀리 닭이 홰치는 소리가 들린다. 모두 깰까봐 조심스레 일어났다. 어두워 더듬거리며 물 한 잔을 찾아 마셨다. 겉옷을 걸치고 집을 나섰다. 새벽공기가 아주 신선했다. 청회색의 하늘이 먼 곳에서부터 조금씩 열리고 있었다. 조용히 새벽이 밤의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다.
제법 싸늘한 공기를 마시며 골목길을 걸었다. 개들이 발자국 소리에 컹컹 짖으며 목청을 높인다. 지붕 위를 지나는 전깃줄에 새 한 마리가 앉더니 이내 한 마리가 더 날아와 앉는다. 곧 세 마리가 되더니, 이어 네 마리가 되어 모두 한 줄에 나란히 앉아 "짹 짹 짹 짹" 경쾌한 아침 노래를 부른다. 아름다웠다. 자연을 소재로 한 폭의 풍경화였다. 전깃줄이 없는 위례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다른 골목으로 들어섰다. 누군가 트랙터를 끌고 새벽일을 시작하러간다. 아무도 없던 길에 작업복을 입은 한 사람이 나타나 걷는다. 순간 긴장한다. 그 순간 오늘 점심은 "누구누구가 준비했으니 꼭 마을회관에서 드시라"는 이장님의 안내방송이 메아리가 되어 하늘로 울려 퍼진다. 이제 오전 6시 반인데 벌써 점심을 이야기하다니 예상치 못한 내용에 그저 후후 웃음이 나온다.
아침을 마치자 모두 분주했다. 누구보다 집안일을 잘 하는 작은집 맏동서가 제수음식을 빠짐없이 챙긴다. 음식을 차에 옮기고 남자들은 모두 차에 탔다. 작은집 큰삼촌과 맏동서가 약속이나 한듯 "형수", "형님" "묘지까지 걸어가요" 한다. 시골길을 걷고 싶었다. 묘지까지는 15분 거리이다. 처음으로 걸었다. 동서랑 이 얘기 저 얘기 나누며 묘지에 도착하니 아주버님이 기다리고 계신다.
4대 조상까지 시제를 올린다. 맨 윗대부터 제를 올리고 3대, 2대 그리고 아버님과 어머님까지 다. 묘지 옆에 아이들을 위해 심은 나무가 잘 자라고 있었다. 묘지봉분을 따라 장식이라도 한 것처럼 가지런히 둥글게 노란 민들레가 피어 있었다. 민들레의 모습이 마치 '왔니! 그리웠다'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 같았다.
큰집과 작은집에 자손들이 모였다. 작은 아버님, 큰집의 삼형제인 아주버님, 남편, 시동생과 조카(시동생의 셋째 아들) 그리고 작은집 제일 큰 삼촌, 모두 여섯 명이 정중히 시제를 올렸다. 숙연해져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절을 한다.
그런데 한 사람이 절을 하지 않고 서 있다. 모두가 안다. 그 한 사람이 누구인지. 기독교인인 시동생이다. 한 집안의 자손들이 추구하는 종교가 다르다. 유교적 전통을 고수하며 조상을 섬기는 사람들과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이 한 자리에 서서 시제를 올린다. 어느 편도 다른 한 편을 무시하거나 대적하지 않는다. 그저 지금은 집안의 과도기 시점에 있다. 종교는 어느 누구도 함부로 정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언제나 힘이 되는 시동생이 너무 고맙다. 집안 모두 서로 다름에 대해 조심스럽게 조율을 하고 있는 지점에 있다. 모두가 지금은 그렇게 조금씩 다름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곧 어느 순간 분명히 평화롭게 누구도 마음 다치지 않으며 접점을 찾을 것이라 확신하며 기다리고 있다. 간절히...
집, 서울로 돌아오는 길. 가장 먼저 "오냐고" 반겼던 까치집을 뒤로 두고 점점 멀어져 온다. 다시 논밭을 지나고 고속도로에 접어든다.
삶, 생도 까치집과 다르지 않다고 느낀다. 먼저 온 순서대로 세상과 멀어진다. 거리만이 아니라 마음도 시간의 지남에 따라 거리감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단 한 번도 아버님 얼굴을 뵌 적이 없기에, 멀어지는 어머님 묘소를 보며 "자손들 잘 되게 해주세요. 편안하시고요" 마음으로 건네는 작별인사는 더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