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공간을 마련하고, 그곳에서 소박하게나마 하고 싶은 일을 꾸려가며 사는 것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80년이 넘은 한옥과의 첫만남부터 고치고, 수선하는 과정을 담아갈 이 연재는 앞으로 공간의 완성, 그 이후 공간에서 만들어갈 일들을 담아낼 예정입니다. - 기자말
이 집을 처음 본 날은 더운 여름, 토요일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마음 먹고 부암동, 구기동, 성북동을 훑었다. 그 이전에 은평구, 서대문구 등을 훑으며 깨달은 바가 있다. 남아 있는 개별 주택들 대부분의 사이즈가 나 혼자 감당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작으면 70~80여 평, 크면 100평을 훌쩍 넘는 집에 평당 단가를 곱하면 내게는 천문학적 숫자다.
그렇다면 아예 맘에 맞는 누군가와 함께 집을 짓는 건 어떨까, 생각했다. 하나의 필지에 집의 구조를 두 채로 나누어 짓고 마당을 공유하는 방식을 떠올렸다. 여러 모로 장점도 많지만, 어느 한쪽이 이사를 가야 할 상황이 생기면 서로 참 대략 난감일 듯했다. 문제가 없을 것 같아도 늘 문제가 일어나는 게 세상사다.
그렇다면 아예 큰 집을 사서 다 허물고, 처음부터 필지를 두 개로 쪼개 각자의 집을 짓는 방법을 써보면 어떨까 싶었다. 손에 쥔 것이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이 엇비슷한 형편의 친구와 재미 반 진심 반으로 함께 집을 보러 다녔다. 말처럼 쉽지는 않은 일이겠지만, 그래도 한 번 알아나 보자 생각했다.
그날 하루만 집을 한 네다섯 채쯤 본 것 같다. 예상은 했지만 상황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우리에게 맞는 집은 없었다. 대강 동네 분위기와 시세를 알았다는 걸로 만족하고, 밥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그런데 가는 길에 이 친구가 무심코 한 마디를 툭, 던졌다.
"내가 어제 지나가다 부동산에 붙은 광고지를 봤는데, 한옥 한 채가 아주 싸게 나왔던데? 혹시 관심 있으면 가보는 게 어때?""한옥?"귀가 솔깃해졌다. 한옥에서 살아보려고 경복궁 서촌의 한옥을 찾아다니곤 했다. 한옥이 있던 자리는 몇 달 뒤 가보면 다른 누군가에게 팔려 공사 중인 경우가 많았다. 해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나게 값이 뛰어오른 건 물론이었다.
은평한옥마을 조성에도 관심을 가졌다가 포기했다. 서울에 남아 있는 한옥이 얼마 되지도 않았고, 그걸 찾아 다니는 것도 매우 지난한 일이었다. 나와 한옥은 연이 닿지 않는 모양이라며 내심 마음을 접고 있었다. 그랬는데 한옥이라고?
그 친구는 다시 회사로, 나는 그 부동산으로 향했다. 마침 근처 갈 일이 있으니 같이 가보자고 하시는 부동산 사장님을 따라 집 바깥에서 구경을 했다. 무엇보다 크기가 적당했다. 일제강점기, 먹고 살 길을 찾아 몰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경성에는 집이 모자랐다. 집장사들은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사들여 필지를 네다섯 개로 쪼개, 어떤 집은 고치고 어떤 집은 다시 지어 몇 채의 집으로 나눠 팔았다.
우리가 오늘날 흔히 보게 되는 서울 도심의 한옥들은 고관대작의 문화재급 한옥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1930년대 중반 이렇게 지어진 집들이다. 이른바 도시형한옥이라고 불리는 집들. 내가 본 집 역시 그 중 하나였다. 이 집은 대지 면적이 약 26평이었다. 집 크기는 더 작았다. 여러모로 감당할 수 있는 사이즈였다. 서촌도 북촌도 아닌데 이런 집이 남아 있다는 게 매우 신기했다.
밖에서 보기만 해도 집은 매우 낡았다. 이미 나는 서울시 한옥지원프로그램에 대해 알고 있었다. 어차피 그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아 다시 짓거나 고칠 예정이나 오래되고 낡은 것이야 문제될 게 없었다.
다소 흥분되는 감정을 억누르고 마침 출타 중인 집주인분과 내부를 보기 위해 며칠 뒤 다시 찾겠다는 약속을 잡았다. 다만, 이 집을 사는 게 잘하는 건지에 대해서는 판단이 필요했다. 내가 아는 건 '1930년대 사대문 안에 지어진 기와집들이 나무며 돌을 튼튼한 걸 썼다더라' 하는 귓동냥 하나였다. SOS를 쳐야 할 때였다.
"제가 한옥을 한 채 봐뒀는데요. 혹시 시간 되시면 같이 봐주실 수 있을까요?"바로 내가 만든 책의 저자이자 서촌, 은평한옥마을 등을 비롯해 서울과 지역 곳곳에서 한옥을 몇 채째 짓고 계시는 목수님이셨다. 두말할 것도 없이 흔쾌히 그러마고 하셨다. 일주일쯤 뒤. 집주인 어르신과 만나기로 한 날이 되었다.
직장을 다니고 있던 나는 퇴근 후 일부러 그 동네를 찾아 몇 번이나 그 골목을 가봤다. 부동산 사장님 따라서 들어간 길 말고 지하철역에서 걸어서는 얼마나 걸리는지, 인근 동네 분위기는 어떤지 등등 '아마추어'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을 체크했다. 감점 요인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조금만 걸어가면 지하철이 있었고, 서울 도심 어디든 가닿는 버스 노선도 많았다. 조금만 걸어가면 아주 번화한 거리가 나오는데, 집 근처는 놀랍도록 조용했다. 한양도성 가는 길도 걸어서 지척이고, 성북동도 언덕 하나만 넘으면 바로였다. 구청에서 운영하는 체육관도 지척이고, 근처에 초중고등학교가 많아 유해시설도 없었다.
다만, 대형마트와 주차장이 없다는 것이 조금 걸렸고 가까이에 서울대병원이 있었서 그런지 쉽게 갈 수 있는 동네병원이 없다는 게 아쉬웠을 뿐이다. 아파트 단지에서 사는 게 익숙해진 나로서는 어릴 때 살던 '동네'로 다시 귀환하는 느낌이 들어 반갑기도 했다.
집주인 어르신을 뵙기 전, 함께 집을 봐주시기로 한 선생님을 먼저 만나기로 했다. 그 시간보다 먼저 도착해서 주변을 살피려 했는데, 선생님은 나보다도 훨씬 먼저 와계셨다. 이미 주변의 점검을 마치신 상태셨다.
"이런 집을 어디서 구하셨어요?"그걸로 일단 게임은 끝이었다. 함께 들어가서 본 내부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낡았다. 길가 쪽 담은 허물어지기 시작한 지 오래 되었다. 벽을 슬쩍 쳐보니, 그때 그 시절 지어진 집답게 추위를 막기에는 너무나 빈약한 두께였다. 딱 봐도 화장실과 장독대 쪽은 불법증축물이었다. 천장은 기울어지기 시작해서 문짝의 위아래가 눌려 제대로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실망할 일이 아니었다.
이 지붕의 기와를 타고 흐르는 선은 매우 고왔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말은 집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세월의 힘에 밀려 낡고 허물어지고는 있을지언정 이 집을 처음 짓는 이들은 매우 정성을 다했음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주춧돌의 반듯함도 그렇고, 창호의 규칙성도 그랬다.
서울시 한옥 지원프로그램을 이용하려면 이 집의 기둥과 주춧돌, 기본 구조를 존중해야 한다. 오래전, 지어진 그대로의 집의 원형을 존중하고, 거기에 덧대 벽체와 지붕, 내부 공사를 진행해야 한다. 그러니, 세월의 힘으로 낡고 부서진 것들은 다시 고치면 될 것이고 정작 눈에 보이지 않는, 감춰진 것들이 더 중요했다.
이 집의 장점은 또 있었다. 한옥뿐만 아니라 서울 시내 오래된 단독주택들은 옆집과의 경계가 불분명한 일이 많았다. 담 하나를 같이 쓰는 경우도 있고, 심하면 지붕이 서로 포개지는 일도 있다. 골목 안에 있는 집일수록, 작은 집일수록 더 그랬다. 집들이 처음 지어질 때는 서로 가까운 이웃이었을 테니 사이좋게 나눠 쓰기로 했겠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주인들도 바뀌고 그렇게 '서로 좋은 게 좋은' 걸로 안 되는 세상이 된 뒤로는 이런 문제는 매우 민감한 분쟁의 소지가 되기 일쑤라고들 했다.
대문 쪽은 길가에 접하고, 나머지 세 면이 이웃과 매우 가깝게 붙어 있는 이 집은 매우 다행스럽게도 좁긴 하지만 옆집과의 경계가 매우 분명하게 나뉘어 있었다. 대문 앞으로 차가 들어오지 못하고, 주차 공간이 없다는 것이 역시 핸디캡이라면 핸디캡이었다.
내가 집주인 어르신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선생님은 여기저기 꼼꼼하게 세밀하게 한참을 살피셨다. 슬쩍 곁눈질해보니 선생님의 표정이 좋았다.
나는 봐도 모르는 부분을 세밀하게 살피신 '전문가'의 진단까지 받고 나자 집은 마냥 복덩어리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자리에서 마음을 정했다. 그 집을 나와 부동산 사무실에 들러 계약서를 쓰기 전 가계약금 일부를 송금했다.
부동산 사무실에서는 정식 계약서를 쓰자고 했지만, 잠시만 시간을 달라고 했다. 생각보다 일이 지나치게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어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게다가 계약서는 나 혼자 쓰는 게 아니다. 큰 돈이 오가는 일에는 당연히 은행의 도움이 필요하다. 여러 상황이 맞아떨어져야만 이 집이 내 것이 될 수 있었다.
여러 상황을 살피는 며칠새. 감당하기에는 아무래도 버거운 게 사실이었다. 수십 번 계산기를 두드려도, 변수가 너무 많아 어디 한군데에서 어긋나면 큰일이었다. 이럴까, 저럴까 고민의 시간이 이어졌다. 그러는 동안 이 집이 몇 번이나 꿈에 나왔다.
마음은 이미 풍선처럼 부풀 만큼 부풀어 있었다. 여기에서 이 집을 놓치면 몸살이 날 것 같았다. 나는 지금껏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인생 최대의 모험을 해보기로 결정했다. 무척 겁이 났지만, 놓치면 정말 후회할 것 같았다. 부동산 사무실에 전화했다.
"계약서 쓰러 언제 갈까요?"부동산 사무실 사장님은 정말 잘한 결정이라고, 가계약금 걸고 간 뒤 예전에 집 보고 간 사람이 다시 와서 사고 싶다고 했다고, 그 이후에도 몇 사람이 와서 보고 갔다고, 가계약금 물어줄 테니 자신들과 계약하자고 조른 사람들도 있었다고, 나의 결정이 얼마나 훌륭한 것인지 극찬을 거듭하셨다.
당장 눈앞에 닥친 계약금과 중도금과 잔금을 어떻게 치러야 할까로 머리가 복잡해진 나로서는, 나의 선택이 옳았다는 부동산 사장님의 말씀이 그렇게 위안이 될 수 없었다.
'잘한 거야, 정말 잘한 거야.'이렇게 나도 몇 번이나 되뇌였다. 도장을 찍기 전 함께 집을 보러 다닌 친구에게 양해를 구한 것은 물론이었다. 같이 뭔가를 도모하기로 했는데, 마치 혼자만 빠진 것 같아 마음이 쓰였다.
"그럴 거 없어. 어차피 엄두가 안 나서 당장 시작할 수는 없는 일이었어."하긴 나 역시도 이렇게 급물살을 탈 줄 미처 몰랐던 일이니까. 계약서 도장을 찍은 날, 이 친구와 혜화동 로터리 인근 유명한 칼국수집에서 칼국수와 불고기를 사먹었다. 이 집과의 인연을 맺게 해준 것이 이 친구였으니 그 첫 순간을 함께 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날은 무척 더웠다. 밥 먹고 차를 마시는 내내 내 목소리 톤은 자꾸만 높아만 갔다. 여전히 얼떨떨한 채로 도장 찍힌 계약서를 몇 번이나 들여다 봤다. 보고 또 봐도 그저 좋기만 했다.
덧붙이는 글 | 사진을 찍은 황우섭은 주로 인물과 건축물을 찍는다. 사람도 건물도 기교와 치장 대신 있는 그대로의 표정을 카메라에 담는 걸 좋아한다. 오래된 것에 집착하고, 동적인 것보다 정적인 것에 주로 관심을 갖는다. 산티아고 순례와 나오시마 여행의 기록을 사진으로 남긴 단행본이 국내에 출간되었고, '조병수 건축사무소' 전속 사진작가로 활동하면서 찍은 사진이 영국 'Thames&Hudson'에서 펴낸 조병수 건축가의 작품집 『BYOUNG CHO』의 표지 및 본문에 실렸다.
*이 글은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되었다.(https://blog.naver.com/hyehwa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