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 청룡부대는 중부 꽝남 지역을 주요 작전지역으로 삼습니다. 청룡부대 병력 5000명이 이 지역에 들어온 후 1968년 한 해에만 2000명이 넘는 민간인이 학살 당했습니다. 학살이 일어난 지 올해로 50년, 꽝남 지역에서는 합동 제사와 위령제가 연이어 열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한국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와 공식적인 사과가 이루어지기는 요원한 상태입니다. <오마이TV>가 베트남 꽝남을 찾아 50주기를 맞는 주민들을 만났습니다. 그 비극적인 이야기와 민간차원에서 이뤄지고 있는 사죄와 화해를 위한 활동을 3차례에 걸쳐 보도합니다. '3화 : 사죄와 치유, 베트남으로 간 의료인들'에서는 베트남평화의료연대 19기 진료단으로 참여한 송창동 한의사의 글을 영상과 함께 싣습니다. [편집자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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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TV] [씬 로이, 꽝남!] 3화 : 사죄와 치유, 베트남으로 간 의료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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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민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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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고 시끄럽고 복잡하고 치열했던 7년간의 학교생활을 마무리한 뒤, 올해 초 내 삶에서 어느 때보다도 평화로운 공중보건의 1년 차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선배로부터 베트남에 가자는 제안을 받았다. 베트남평화의료연대(평연) 19기 진료단에 참여하자는 것이었다. 2000년부터 베트남 중부지역을 찾아 의료봉사를 해 온 평연의 활동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어 선배의 제안에 거부감은 없었다.
다만 고민이 있었다. 베트남에 가려면 모아두었다가 해외여행에 탕진(?)하려고 했던 1년 차 연가 6일 중에 무려 4일을 사용해야 했다. 하지만 같이 가자고 한 선배는 학교 다닐 때부터 매우 존경하던 분, 믿고 참여하기로 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선배는 한의원을 새로 개원하게 됐고 결국 베트남에 갈 수 없게 되었다. 아는 사람 한 명 없이 혼자, 그것도 진료단 오리엔테이션도 가지 못한 채 베트남에 가게 되면서 슬슬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베트남에 가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2월 25일 기대 반 걱정 반의 마음으로 다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처음엔 모든 것이 낯설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다가올지 감이 잡히지 않아 불안했다. 다낭 공항에 내려 숙소로 가는 버스 안에서 실시간으로 바뀌는 나의 일정과 역할을 보면서 불안은 증폭되었다.
하지만 걱정과 달리 진료팀에서의 모든 일은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면 됐고 내가 모자라는 부분은 함께 일하는 '팀'이 채워주었다.
진료 첫 날인 2월 26일 먼저 빈찌 서검진센터(꽝남성 탕빈현)의 진료실을 세팅했다. 나의 첫 역할은 진료를 받으러 온 베트남 주민들을 예진하는 것이었다. 놀랐던 점은 통역단으로 참가한 베트남 대학생들의 한국어 실력이었다. 의료계에 종사하지 않으면 알기 힘든 증상이나 병명을 막힘없이 설명해 줬다.
알고 보니 통역을 하기 위해 어려운 의학용어들을 미리 공부해 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중간중간 모르는 것이 있으면 나에게 물어 스스로 공부하기도 했다.
진료 둘째 날부터는 초대장을 받지 않은 사람들도 진료소를 찾고, 전날에 왔던 환자들이 재진을 위해 다시 오면서 업무가 많아졌다. 나도 예진을 맡는 대신 환자를 진료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말이 직접 통하지 않아 당황했지만, 작년부터 진료단에 참여했던 노련한 통역단 덕분에 진료소는 원활하게 돌아갔다.
이날 오후에는 베트남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성장 수업'이 예정돼 있었다. 한방 진료팀에서 새로운 사업으로 야심차게(?) 준비한 이 수업은 초등학교, 중학교를 방문하여 성장기에 있는 학생들에게 키 크는 생활 습관 및 체조 방법 등을 알려주는 내용이었다.
처음엔 수업에 참관했고 나중에는 내가 직접 수업을 진행했다. 아이들 앞에 서는 게 부담이 됐지만 아이들이 조용히 집중해주었고 수업 내용을 통역해준 베테랑 통역단 레 응옥 헌씨가 내가 버벅 거릴 때마다 잘 이끌어 줘서 큰 무리 없이 수업을 마칠 수 있었다. 선물로 줄넘기를 나누어주고 학교를 떠날 때 학생들이 우르르 쫓아 나와서 손 흔들고 배웅을 해주었다. 학생들에게 고마웠다.
이번 진료기간동안 가장 울림이 있었던 순간은 2월 28일 퐁니퐁넛 마을과 하미 마을을 방문해 베트남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문제를 직접 마주했을 때다. 민간인 학살 문제는 그동안 글로만 접해 어렴풋이 알고만 있었다.
하지만 생존자분들로부터 이야기를 직접 듣고 현지에 세워진 위령비를 보면서 글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참담함이 밀려왔다. 대학교 1학년 때, 문헌을 통해서 접했던 5.18 민주화운동을 광주를 방문해 처음 직접 접했던 당시의 느낌과 비슷했다.
구수정 한베평화재단 이사는 이날 희생자 숫자를 설명하면서 "희생자 숫자만 이야기하면 결국 숫자만 기억에 남는다"고 우려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마찬가지로 그동안 숫자로만 전쟁을 이해하고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에는 숫자로 표현될 수 없는 사람이 있었다. 생존자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헤어지면서 서로 안아주었을 때,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과 삶이 더 없이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과 삶을 그저 뭉뚱그려 숫자로 만들어버리는 게 전쟁의 무서움이었다.
사실 단기간에 진료해야할 환자들이 몰리면서 힘들고 지치는 순간이 많았다. 하지만 두 마을을 다녀온 뒤로 정신없이 환자를 진료하다가도 차트에 적힌 환자들의 나이를 보면 '아, 이분도 전쟁 때 살아계셨던 분이구나, 이렇게 찾아와서 진료하는 나를 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라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었다. 그 때마다 내가 조금 더 잘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돌아보면 진료단 활동은 나에게 많은 것을 남겨준 시간이었다. 베트남에 온 첫날 "사람이 남는 일주일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실제로 함께 참가하신 선생님들 그리고 통역단들, 나에게는 다음에도 다시 보고 싶은 분들로 남았다.
앞으로도 이 인연을 소중하게 잘 이어나가고 싶다. 또 곧 한의사가 될 후배들에게도 평연 진료단 활동에 참가하라고 꼭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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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씬 로이, 꽝남!] 2화 : 전쟁을 기념하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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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씬 로이, 꽝남] 1화 : 연꽃 뒤에 가려진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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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제작: 이승훈 조민웅 기자 / 글 : 송창동 / 그래픽: 박소영 기자 / 자료 제공: 베트남평화의료연대·시민평화법정준비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