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알다시피 그날은 4월 16일이었다. 나는 그때 재수생이었다. 기숙학원에 있었기 때문에 세상과 단절되어 공부에 전념하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수업을 받고 있었는데, 당시 윤리와 사상 수업이었던 것으로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쉬는 시간이 끝나고 선생님이 들어와 하시는 말씀이 의외였다. 이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제주도 가던 배가 사고가 났대."아, 그렇구나. 하고 늘 그랬듯 넘어갔다. 사고야 늘 나는 거니까.
그런데 저녁이 되자 담임 선생님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은 뭔가 이상했다. 사고가 난 배가 침몰을 했고, 자발적으로 탈출한 사람 말고는 한 사람도 나오지 못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사이에는 전원 구출이라는 역대급 오보도 나왔다는 것을.
그 다음 날 학원 어디선가 본 중앙일보 1면에는 대문짝하게 촛불을 든 학생들의 사진이 실렸다. 지금의 보수언론과는 달리, 당시에는 안타까움을 지면에 한껏 담았다.
세상이 무너지는 경험
그 이후 우리가 딛고 있는 세계는 무너졌다. 모든 것은 점점 더 이상하게 돌아가기만 했다. 304명의 꺼져간 생명들이 차디찬 바다 속에서 떠오르기까지, 우리는 절망을 퍼 나르고 있었을 뿐이었다. '골든타임'이라는 말을 그때 처음 들었던 것 같다. 골든타임이 지나고 나서부터 였나, 선생님들의 표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누가 그러더라. 세월호 참사로 인해 온 국민이 상처받고 트라우마에 빠졌다고. 그 상처와 트라우마를, 나는 기숙학원에 갇혀 살면서도 느낄 수 있었다. 선생님들 흡연실에 켜 놓은 텔레비전에는 세월호 이야기 뿐이었다.
4월에 있었던 모의고사가 끝나고 할 예정이었던 삼겹살 파티는 당시 바깥의 많은 공식적인 행사들처럼 취소가 되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물론 우리는 그 와중에도 공부를 해야만 했다. 우린 재수생이니까. 하지만 그 누구도 제대로 정신을 차리고 수능을 향해 달려갈 수 있는 기력이 남아있는 아이들은 없었다. 적어도 그 당시에는. 물론 표면적으로는 공부는 계속되었으며, 강의는 계속되었다. 살아남아서 숨 쉬는 사람들은 늘 그렇듯 살아가야 했으니까.
그러던 와중에 세월호 얘기를 꺼내던 논술 선생님이 갑자기 오열을 한 적도 있었다. 그때 선생님은 울음을 멈추고 수업시간에 안 좋은 모습을 보여줘서 미안하다고 했지만, 모두가 납득하는 분위기였다. 그땐 세월호 얘기만 하면 눈물이 쏟아져서 주체를 못할 것 같았던 그런 때였으니까.
그렇게, 세상이 무너짐을 알렸던 세월호 참사는 각자의 방식대로 많은 상처를 남겼다. 참사 자체가 상처기도 했지만, 학원에 갇혀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은 더 큰 절망이기도 했다. 당시 교무실에 있던 신문을 몰래 가져다가 봤던 건, 뭐라도 바뀌길, 조금이라도 좋은 소식이 있길 바라는 마음이지 않았을까.
처음 사고 소식을 알려줬던 윤리와 사상 선생님은 그땐 몰랐지만 뼛속까지 국가주의자였다. 윤리와 철학을 가르치면서 광주를 진압한 전두환과 신자유주의 정책을 펼친 마가렛 대처를 칭찬하던 그는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이기적이고 반국가적인'이라는 딱지를 기어이 붙이고 말았다. 기숙학원에 있던 탓에 벗어나지도 못하고 수능이 오기까지 그런 반인권적인 말을 들어야 했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바깥 세상은 참 이상하게 흘러갔던 것 같다. 참사가 있은 뒤 첫 1박 2일의 외출에서 가족들과 만났을 때 대화의 주제가 세월호였던 건 어쩌면 당연했다. 아무도 구하지 못했다는데,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는데, 이게 말이 되는거냐, 라고 했지만 부모님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문재인이 대통령이 됐으면 막을 수 있었겠냐"라는 말을 했다.
나는 문재인의 이름을 거론한 적도 없었는데 말이다. 그건 내 부모님만의 생각이 아니었던 것 같다. 많은 이들이 정부에 책임을 묻는 사람들을 빨갱이 혹은 시위꾼으로 몰아갔으니까.
당신은 그 때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많은 이들이 세월호를 기억하자고 한다. 잊지 말고 행동하자고 한다. 그렇게 각자의 방식대로 기억하고 행동하는 일이 필요하다. 재수가 끝난 뒤에 만난 사람들마다 나는 묻고 다녔다. 당신의 4월 16일은 어땠냐고. 그때 무엇을 하고 있었냐고. 대학생이었던 친구는 중간고사를 준비하다가 뉴스를 보고 충격에 빠졌다고 했다. 선생님이었던 분은 며칠 동안 아이들을 보기 힘들었다고 했다.
이것은 나의 개인적인 경험이자 잊을 수 없는 일에 대한 기록이다. 좀 더 잘 분노하고 좀 더 잘 슬퍼하기 위해,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던 절망의 순간을 기억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이 비극을 기억해 내는 하나의 방식인 셈이다. 4년이 지난 지금, 그 날의 기억에 대해 사람들과 이야기 나눠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