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아파서 누워있을 자유도 없어!" 엄마들끼리 모이면 흔히들 주고받는 말입니다. 더 이상 이 말이 사실이 아닌 세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엄마들도 돌봄받는 세상을 위해 지극히 개인적인 독박돌봄노동 탈출기를 시작합니다. [편집자말] |
우리 부부는 아이를 무척 기다리고 있었다. 설레면서도 두려운 마음으로 임신을 확인했고 기쁨과 감사로 가득했다. 하지만 기쁨으로만 충만했던 순간은 아주 잠깐이었다. 아이의 심장소리를 확인한 직후부터 나는 메스꺼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먹으면 구토가 나고, 먹지 않으면 속이 쓰려서 잠도 잘 수 없는 상태로 5개월을 버텼다. 그러던 임신 7개월 차에 나는 직장암 말기 투병 중이었던 친정엄마를 하늘로 보내드려야만 했다.
만삭이 되었던 어느 날 밤이었다. 어떤 자세로 잠을 청해도 편히 잘 수 없는 만삭의 신체구조 때문에 잠들기를 포기하고 회식이 있어 늦게 돌아오는 남편을 기다리면서 다림질을 시작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계속 쏟아졌다. 몸의 변화도 감당하기 힘들었고, 엄마가 된다는 부담감, 출산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친정엄마도 이런 과정을 거쳤을까 생각하면서 장례식 때보다도 더 펑펑 울었다. 함께 부모가 되는 것인데 왠지 나 혼자 감당해야 하는 변화들이 많은 것 같아 외롭고 억울하기도 했다.
당시 막 대학원에 입학했을 때였는데 이제야 시작한 공부는 출산 후 도대체 얼마나 쉬어야 하는지 예측 불가능한 나의 미래도 두려웠다. 동시에 아이를 만난다는 설렘도 함께 느끼면서 그렇게 난 엄마가 됐다.
엄마가 된다는 것
아이를 낳은 바로 그 날부터, 절대 믿지 않았던 "임신했을 때가 젤 편해"라는 친구들의 말이 진실이었음을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매일 밤 2~3시간 간격으로 깨며 수유를 해야 했고, 유난히 등센서가 예민한 아이를 눕혀놓고 밥 먹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늘 수면이 부족했다. 식사는 아기띠에 아기를 맨 채 서서 찬밥을 물에 말아 후루룩 마시거나, 그도 안 되면 쿠키나 빵으로 때우기 일쑤였다. 화장실을 가는 것 역시 아이가 울까봐 늘 조마조마했다.
신체적인 것뿐 만이 아니었다. 심리학자 Ryan과 Deci는 자율성(내 삶을 내가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것), 유능감(내가 잘 할 수 있다고 느끼는 것), 연결감(다른 사람, 사회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의 세 가지 기본심리욕구의 충족이 한 개인의 삶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이 시기 나는 아이에게 나의 일상을 온전히 맞추며 내 삶에 대한 자율성을 상실했고, 육아는 물론 내 삶의 방향성에 대해 자신감(유능감)을 잃었다. 또한 출산 전 직장생활과 대학원생활을 병행하면서 강하게 느끼고 있었던 사회적 연결감을 상실하는 경험을 했다. 처음 경험한 엄마로서의 삶은,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신체적, 심리적 욕구마저 억눌러야 하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난 남편에게 늘 미안했다. 밤에는 아이 울음소리에 남편이 깰까봐 아주 작은 소리에도 아이를 거실로 데리고 나가 수유를 했다. 남편은 잠을 푹 자는 편이라 아이가 웬만큼 울어도 깨는 일이 없었지만, 난 늘 조심스러웠다.
신혼시절 그토록 정성을 들였던 아침밥도 아이가 출근 시간 무렵 깨어 우는 날에는 챙겨 줄 수 없었다. 어쩌다 남편이 일찍 들어와 함께 저녁을 먹는 날에도 미리 음식을 차려 놓는 것은 불가능했다. 남편이 퇴근한 후에 아이를 봐줘야만 비로소 제대로 된 식사 준비를 할 수 있었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종종 배달음식을 시켜 먹었다.
그 때마다 나는 또 미안해했다. 출근할 때 예전처럼 와이셔츠, 넥타이, 양말을 챙겨줄 수 없는 것도 미안했고, 어쩌다 남편이 아침에 양말 빨아 놓은 게 없다고 한마디 할 때면, 아내로서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 같아 죄책감마저 들었다.
죄책감의 이면에는 늘 분노가 있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적으로 화를 표현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 분노를 느낄 때 이를 죄책감으로 바꾸어 표현한다. 당시 나의 죄책감은 분노를 위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때문에 늘 미안해하면서도 동시에 짜증이 났다.
그토록 원했던 심리학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출산 후 계속 휴학상태를 유지하며 육아에 매달리고 있는, 여기 저기 쑤시고 아프지만 내 몸을 돌볼 겨를 조차 없는 나. 아빠가 되었지만 여전히 직장생활에 매진할 수 있고, 때로는 주말에 골프 모임도 가고 운동도 할 수 있는 남편의 처지를 비교하면 자꾸만 화가 났다.
왜 함께 부모가 되었는데, 아이를 돌보는 것은 온통 나만 책임을 지는지, 나만 사회적 삶은 물론, 먹고 자고 씻는 일상생활마저 포기해야 하는지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좋은 아빠 vs. 책임감 있는 아빠 남편은 아이가 2시간 간격으로 자다 깨는 신생아 시기에도 아이 곁에서 잠자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당시 비슷한 시기에 출산한 내 친구의 남편들은 대부분 숙면을 위해 각방을 썼다) 좋은 아빠이자 남편이었다.
남편은 직장에서도 최선을 다했고, 집에 오면 최선을 다해 나를 '도왔다'. 내가 씻을 수 있고, 우리의 식사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아이를 돌봤고, 기저귀를 갈고, 분유를 먹이는 일도 '내가 부탁하는 대로' 척척 잘해냈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아이가 이유식을 먹고, 물건을 붙잡고 일어서고 할 무렵이었다. 나는 주방에서 이유식을 만들고 있었고, 남편은 거실에서 TV를 보았다. 남편의 바로 옆에서 아이는 놀고 있었다. 아이는 무엇인가를 잡고 걸어보려고 했는데, 아마 뜻대로 되지 않았나 보다. 곧 '꽈당' 소리와 함께 울음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주방에서 뜨거운 냄비를 저어가며 이유식을 끓이는 중이어서 아이에게 곧바로 달려갈 수가 없었다. 바로 옆에서 남편이 TV를 보고 있었기에 당연히 남편이 아이를 달랠 줄 알았다. 하지만, 아이의 울음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난 얼른 가스를 끄고 아이에게 달려갔다. 그런데 남편은 여전히 TV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이가 바로 옆에서 울고 있는데도 말이다.
아이가 크게 다친 것은 아니었지만, 이 사건은 내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남편은 한국사회에서 좋은 아빠였지만, 남편에게 아빠로서의 역할은 지극히 수동적인 것이었음을 이 사건은 보여주고 있었다.
육아에 대해 1차적인 책임을 지고 있는 내가, 그러니까 아이의 엄마가 집에 있으니 아이가 울 때 달려와야 하는 것은 당연히 엄마인 나의 몫이었던 것이다. 남편에게 아빠로서의 역할은 아빠로서 정체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했던 것이 아니라 나를 '도와주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난 이 사건을 비슷한 시기에 함께 엄마가 되어 서로에게 많은 지지가 되어 주었던 내 친구들과 공유했다. 그리고 알았다. 이런 일이 우리 집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모든 아빠들이 돌봄에 책임감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상당수의 가정에서 일어나는 매우 일반적인 현상임을 말이다.
그 후 난 '왜 아빠들은 아빠로서의 정체감과 책임감을 갖지 못할까?'라는 의문을 품고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회식이야 늘 있는 일이었지만 그 날은 남편이 유난히 늦었다. 새벽 1시가 넘었는데도 소식이 없어 나는 불안한 마음에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그런데 '여보세요' 소리와 함께 '퍽'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전화가 끊겼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 같아, 잠든 아이를 그대로 둔 채 나는 현관문을 열었다. 그런데! 거기 우리 집 앞 아파트 복도에 남편이 누워있었다. 잘 먹지 못하는 술을 얼마나 마신 건지 인사불성인 남편을 간신히 집으로 데리고 들어와 눕혔다.
아이와 하루 종일 씨름하고 있었던 나는 술에 취한 남편이 밉기도 했지만, 만신창이가 된 남편이 무척이나 측은하게 느껴졌다. 다음 날 아침. 남편은 해장국도 제대로 못 먹고(역시 아이가 아침 무렵에 일어나 보채서 아침 준비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까칠한 모습을 출근을 했다.
개인의 온전한 삶을 방해하는 가부장제
그 날 이후 난 우리 사회에서 부모로 살아가는 일, 가정을 꾸려가는 일,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에 대해 곰곰이 생각을 하면서 아이를 돌보는 틈틈이 책을 찾아 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느낀 분노의 대상은 남편이 아니라 세상의 가부장적 질서임을, 남편의 아빠로서의 책임감 부재 역시 이런 가부장제 사회의 산물임을 말이다.
권력과 힘에 의한 서열을 중시하고 남성/여성, 인간/동물, 강자/약자 등으로 세상을 이분화하는 가부장제는 여성을 타자화하고 집에 머물며 돌봄을 제공하는 자로 규정한다. 반면, 남성은 주체가 되고 바깥일을 하며 여성을 지배한다. 나아가 여성의 돌봄노동은 약하고 하찮은 것으로, 남성의 사회활동은 강하고 중요한 경제활동으로 간주된다.
때문에 여성의 돌봄노동은 존중받지 못하며, 남성이 가정과 아이를 돌보는 아빠로서의 정체감을 갖는다는 것은 열등한 일로 인식되는 것이다. 때문에 남성은 아빠가 되어도 여전히 사회활동에만 전념하며 강요된 회식에 가야한다. 모든 조직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한국 사회에서 남자가 아이나 아내를 돌보기 위해 회식을 거부하는 것은 여전히 비난받는 행위이다.
이런 가부장적 분위기 속에서 남편은 아빠로서의 정체감을 발달시킬 기회를 박탈 당했다. 오직 직장에서의 정체감만 갖게 되는 불완전한 삶을 살게 된 것이었다. 심지어 스스로 음식을 해먹거나 옷을 빨아 입는 기본적인 '자기돌봄' 능력조차 상실해가고 있었다.
나 역시, 여성은 돌봄을 제공하는 엄마 혹은 아내로서의 정체감으로만 인정받는 가부장적 질서를 따르면서, 사회적 정체감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내가 느끼는 분노와 죄책감은 이런 오래된 가부장제를 향한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이 시기 우리 부부는 둘 다 자신의 다양한 정체감을 발달시키고, 보다 온전한 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박탈 당한 가부장제의 희생양이었던 것이다. 나는 이런 생각을 남편과 나누었고 남편은 인지적으로 동의해주었다. 그리고 무언가 변화가 필요하다고 행동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필자의 개인블로그에도 게재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