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갈레트 풍찻간의 무도회
몽마르트르로 올라가는 퓌니끌레르 안의 승객은 우리 말고 몇 명 되지 않았다. 언덕 위에는 로마 비잔틴 양식의 웅장한 건물로 파리 어디서나 보이는 사크레쾨르 대성당(Basilique du Sacré-Cœur)이 자리 잡고 있었다.
에펠탑에 이어 두 번째로 인기 있는 명소라는 이 성당은 프랑스가 유럽의 주도권을 놓고 프로이센(독일)과 벌인 보불전쟁에서 패한 뒤 다시 파리코뮌과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치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파리 시민들이 성금을 모아 지은 건물이었다.
정면 천장에 두 팔을 벌린 예수의 승천 그림이 인상적인 내부를 구경하고 나서 나는 다른 관광객들처럼 대성당 앞의 계단에 아빠와 나란히 앉았다. 탁 트인 파리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높낮이 없이 일정한 높이의 지붕만 이어지는 시가지의 모습은 단조로워 그런지 그렇게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지만, 그러나 아빠와 나란히 붙어 앉은 그 순간이 내겐 소중하게 느껴졌다. 유치원? 초등학교? 그 뒤론 처음이었으니까.
"몽은 산이고 마르트르는 순교자를 뜻하는 영어의 마터(martyr)와 같은 단어죠?"
딸의 마음이 통한 것인지 아빠는 손을 꼭 잡으며 대답하셨다. 몽마르트르의 호칭은 순교자의 산이란 뜻을 지닌 Mons martyrium이란 라틴어에서 유래했는데, 그 이유는 생 드니라는 가톨릭 주교가 서기 250년 순교한 곳이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진 거라고.
바로 그런 이유로 몽마르트르에 수녀원이 세워졌던 모양이다. 아까 내가 내린 아베스역의 아베스(abbesse)나 그 부근에 있는 아베스광장의 아베스도 한때는 이곳에 설치되었던 수녀원의 흔적을 반영한 단어다. '수녀원장'이란 뜻의.
"이상해요. 순교자의 산 위에 수녀원이 지어지고, 다시 사크레쾨르 대성당이 세워지고..."
"살다 보면 땅에도 그런 운명 같은 게 있더구나. 한때는 이 일대가 다 밀밭이었다는데..."
"수녀원은 프랑스대혁명 때 파괴되었고, 수녀원에서 경작하던 밀밭이나 채소 밭도 모두 사라졌는데, 어떻게 이곳이 프랑스 현대예술의 발상지가 된 거에요?"
아빠는 도심과 다름없이 집들로 꽉 들어찬 일대를 내려다보며 말씀하셨다.
"집값 때문이다. 서울도 그러지 않았냐? 도시 재정비로 서민들이 외곽으로 밀려나는. 그와 똑같은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 파리에선 1854년에 일어났던 거야. 당시 파리 시장인 오스만 남작이 구불구불한 골목길과 허름한 집들을 모조리 부수면서 도심 땅은 전부 부자들 차지가 되고 서민들은 변두리 달동네로 쫓겨나게 된 거지. 그 달동네가 바로 지금의 몽마르트르다. 그때 가난한 예술가들도 서민들을 뒤따라 이 달동네에 삶의 웅지를 틀었다는 얘기야."
"지금도 차고나 창고 또는 버려진 공장지대에 예술가들의 창작공간이 만들어지는 일이 많아요."
"하긴 예술이 당장 돈 되는 일은 아니니까. 인구 유입으로 집들이 자꾸 늘어나면서 밀밭이 줄어드니 풍찻간 일감도 줄어들게 되었지. 그러자 방앗간 주인 한 사람이 아이디어를 짜냈어. 방앗간 부속건물을 개조해 싸구려 여관 겸 음식점을 열기로.
거기서 자신만의 레시피로 둥근 케이크 곧 갈레트를 구워 팔기 시작했는데, 이 갈레트가 맛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사람들이 몰려들자 상호를 아예 '갈레트 풍찻간'으로 바꾸었지. 주말이면 앞마당에서 무도회를 열었어. 열 명도 넘는 악사들이 흥겨운 곡을 연주하는 가운데 좋은 옷을 차려입은 청춘남녀들이 이 무도장에 와서 당시 유행하던 왈츠를 추거나 담소를 나누면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곤 했지."
"그럼 그게?" 내가 지피는 게 있다는 듯이 말하자 아빠가 눈빛을 빛내셨다.
"그래, 바로 그 풍경을 화폭에 담은 것이 르누아르의 <갈레트 풍찻간의 무도회(Bal du Moulin de la Galette)>야. 그 장소로 가볼까?"
나는 앞장서시는 아빠를 뒤따랐다.
[아빠의 이야기] 낮과 밤의 풍찻간
사크레쾨르 대성당 뒤쪽으로 돌아가서 아래로 내려가니 카페들이 보이고, 그 앞쪽에 이젤을 빽빽이 세운 무명화가들이 자리 잡은 테르트르광장(Place du Tertre)이 나타났다.
관광객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화가들과 에펠탑 등의 파리 풍경화를 파는 장사꾼들 사이에서 흘러간 샹송을 연주하는 거리의 악사도 있었다. 지금은 관광객에게 그림을 파는 상업적 현장으로 변해 광장 본래의 모습이 사라진 게 아쉬웠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지난날 거리 어딘가에서 그림을 그리던 르누아르나 드가를 떠올리면서 그림 속의 행인이 되어 보기도 하고, 에디뜨 피아프를 흉내 내는 샹송 가수의 보헤미안적 풍취에 잠기는 여로의 낭만을 잠시 누려보기도 했다.
광장을 지나 르픽로(Rue Lepic)로 내려가니 한 무리의 관광객들이 핸드폰을 꺼내 들고 왁자지껄 사진을 찍고 있었다. 오른쪽에 흰색의 5층 건물이 있고, 그 옆 나뭇가지에 가린 커다란 풍차가 보이고, 흰 색칠을 한 아치형 정문에는 'Le Moulin de la Galette(갈레트 풍찻간)'라고 쓰인 글씨가 보였다.
"여기죠?" 딸이 물었다. 내가 고개를 끄떡이며 핸드폰 갤러리에서 찾은 <갈레트 풍찻간의 무도회>를 보여주자 딸이 주변을 둘러보며 다시 물었다.
"그림에 나오는 풍찻간 앞마당은 어디예요? 무도장에서 춤추는 남녀가 수십 명은 되어 보이는데요. 위치로 보면 저 흰색 5층 건물자리가 아니었을까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지?"
나는 엇갈려 있는 딸과 내 렌즈의 초점을 맞추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는 조금 멋쩍은 생각마저 들었다.
"<갈레트 풍찻간의 무도회>에 그려진 사람들은 나뭇잎 사이로 떨어지는 햇살을 눈부시게 바라보는 것 같고 옷에 떨어진 빛도 반점처럼 아른거려요. 낮이었다는 얘기죠?"
"그래, 해가 움직이면서 나타나는 변화, 대기의 톤과 빛의 흐름이 느껴져. 그러니 아직 태양이 찬란한 오후 서너 시쯤이었을 거야. 모두들 잘 차려입고 걱정근심이라곤 조금도 없는 행복한 표정들이지?"
딸은 르누아르의 그림 속에 나오는 무도장의 분위기를 현실의 갈레트 풍찻간에 적용시켜보는 포즈를 취했다. 그림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모두 실존했던 르누아르의 친구들인데, 춤추며 흥겨운 분위기를 즐기던 르누아르와 그 일행의 모습을 떠올리는 우리도 그림 속의 그들 일행이 된 것 같았다. 음악도 그렇지만 그림은 때로 우리를 행복하게 해준다. 예술의 힘이다. 그 힘으로 딸과 나 사이의 칸막이마저 사라진 느낌이었다.
"서민들이 일을 안 하고 대낮에 무도회를 갖는다고요?"
"그래서 주말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거야. 정말 서민들의 즐거운 오후 한때를 그린 걸작이다. 보고 있으면 내가 행복해지는..."
"당시는 인상파 화가가 대세였죠?"
"그래, 파리 사람들의 생활을 정확하게 반영한 르누아르, 그리고 파리의 생활상에서 주제를 찾아 신선하고 화려한 색채감으로 근대감각을 표현한 에드가르 드가(Edgar Degas) 등이 19세기 말 몽마르트르에서 활동한 대표적 화가들이야. 말하자면 그들이 몽마르트르의 제1세대였던 셈이지."
"그럼 제2세대는 누구에요?"
"답의 열쇠는 풍차다. 르누아르를 위시하여 고흐, 로트레크, 동겐, 위트릴로 등 풍차를 그린 화가가 많았지. 한때는 풍찻간이 14군데나 있었다니까. 모두 사라지고 지금은 도심이나 다름없는 건물들로 들어찼지만 여기가 밀밭이었음을 알려주는 풍차가 상업적으로는 아직도 두 군데 존속하고 있는데, 하나가 여기 있는 이 낮의 갈레트 풍찻간이고, 다른 하나가 밤의 풍찻간인..."
"물랭루주(Moulin Rouge)!"
딸이 나지막이 외쳤다.
"하하, 그럼 다음 행선지는 저절로 정해진 셈이구나!"
딸이 즐거워하는 표정을 보고 나도 한결 가벼운 마음이 되어 물랭루주가 있는 언덕 아래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언덕을 내려가는 관광객들의 모습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