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5년 11월 24일 남북 마라톤 선수들이 평양 시내를 함께 달렸습니다. 당시 오마이뉴스가 주최한 평양-남포 통일마라톤 대회는 분단 이후 남북 선수들이 함께 평양을 달린 첫 마라톤 대회였지만, 그 뒤로 계속 이어지지 못 했습니다. 13년 전 북측 선수 손을 잡고 골인점까지 함께 달렸던 유원진 시민기자의 회고록을 싣습니다. [편집자말] |
사람들은 만나면 손을 잡는다. 업무상 만나서 나누는 악수도 있고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친구와 나누는 악수도 있고, 심지어는 전쟁 중인 적과 하는 악수도 있다. 내 손에 전해오는 상대편의 촉감과 체온이 상황에 따라 매번 다 다른 것은 물론이다. 놓기 싫을 정도로 따뜻하고 감미로운 느낌이 있는가 하면 그저 무덤덤한 스킨십에 지나지 않는 악수도 있고 심지어는 자신도 모르게 얼른 놓아버리는 손도 있다.
2005년과 2018년, 남과 북이 맞잡은 손문재인 대통령이 잡은 김정은 위원장의 손은 어땠을까? 살집이 좋아서 두툼한 그의 손을 그 날 하루, 족히 열 번은 넘게 잡았을 텐데도 문 대통령은 악수를 나눌 때마다 처음인 듯이 반갑게 살갑게 따뜻하게 잡았다. 김정은 위원장은 한 술 더 떠서 깜짝 월경을 하면서는 문대통령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판문점 선언문에 서명을 마치고 악수를 나눌 때는 두 손을 잡은 채로 머리 위로 높이 들어 올려 동반 승리의 기쁨을 표현했다.
2005년 11월 24일 평양에서 오마이뉴스 주최로 '평양-남포 통일 마라톤(마라손) 대회'가 열렸다. 당시 마라톤을 즐기는 이들에겐 이번 남북정상회담만큼이나 엄청난 사건이었다. 남북 시민 수백 명이 팬티 하나 걸치고 같이 평양 시내 한복판을 달린다는 것을 상상해보라. 당장에 CNN 속보로 전 세계에 타전될 일이다.
그러나 당시는 행사의 상징성 뿐만 아니라 남북 당국자들의 진정성도 제대로 평가되지 못했다. 참여정부의 흠결을 찾아내는 것을 사운으로까지 걸었던 보수 언론들은 침묵했고 국민들은 제대로 사실을 알지 못했다. 13년이 흐른 지금 3박 4일 동안 있었던 많은 일들은 사진 속만큼 또렷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두 번의 따뜻했던 악수는 지금도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21km를 달리는 하프 코스이긴 하나 처음 뛰는 마라톤이라 멀리 반환점이 보일 때는 거의 지쳐 쓰러질 지경이었다. 반환점을 돌아 맞은 편 쪽에서 거꾸로 달려오고 있는 사람들을 부럽게 쳐다보고 있는데 북한 여자 선수 하나가 팔을 뻗고 달려오며 웃는다. 나도 손을 뻗어 내밀었다. 양쪽에서 마주 달려오던 두 손이 마주치며 짝 하고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그 미소와 소리가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관련기사:
[평양 마라톤대회 참가기] "손 놨다가 통일 안되면 책임지시라요!")
평양 버스운전기사의 손을 잡고 끝까지 달리다천근만근이던 다리는 마법같이 풀려서 가벼워졌고 가쁘던 호흡도 '조선은 하나다'라는 구호를 따라 할 만큼 편안해졌다. 따지고 보면 손을 잡고 흔든 악수도 아닌데 무엇이 그토록 강력한 힘을 주었을까? 그저 손바닥 한 번 마주쳤을 뿐인데...
그리고 그 마법 같은 힘은 반환점을 돌아 얼마 가지 않아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또 다른 북한 남자 선수에게로 전해졌다. 버스 운전을 한다는 그는 다리에 쥐가 나서 고통스러워 하고 있었는데 내 손을 잡고 일어나 천천히 뛰기 시작하여 결국 끝까지 같이 뛰었다. 두 사람이 손을 잡은 채로 뛴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뛰어 본 사람만 안다. 얼마 안되어 잡은 두 손에 땀이 차서 자꾸 미끌어졌지만 우리는 골인 지점을 통과할 때까지 서로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당시에는 금방 통일까지는 아니더라도 이토록 오랜 세월 동안 남북의 화해 분위기가 거꾸로 갈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평양시내를 돌아다니고 고려호텔 지하의 노래방에서 북측 동무들과 술을 마시면서, 마치 서울의 여느 술집에 있는 듯이 편안하고 즐거웠다. 그것은 북측의 동포들이 보여준 따뜻한 미소와 그 미소보다 더 따뜻했던 손잡음의 촉감 때문이었다. 여기가 내 땅이고 우리 집이며 한민족이라는 편안함 때문이었다.
잃어버린 보수 반동의 10년을 넘어 우리는 다시 손을 잡았다. 아무런 언급이 없었어도 나는 두 정상이 잡았던 손의 촉감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내가 부딪혔던 북측 선수의 손바닥이나 오래도록 같이 잡고 뛰었던 평양의 버스운전기사의 손과 다르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때로 무언의 느낌은 그 어느 소통 수단보다 강력하다. 그러나 그런 느낌은 나누어 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심보가 뒤틀어진, 이 땅의 어느 누군가에게는 아무리 설명을 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특별기획] 오마이뉴스 평양마라톤 바로 가기 덧붙이는 글 | 당시에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남북 통일마라톤의 위업이 계속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