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내가 이런 글을 쓸 수 있으리란 건 상상도 못 했었다. 40대 후반까지 펜으로 글을 쓸 기회가 거의 없었고, 필체도 썩 좋질 않아 혹시라도 누가 내 노트를 들여다볼까 두려워 글을 쓸 엄두를 못 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살아오며 함부로 발설하지 않았던 나만의 얘기를 어딘가 직접 기록해보고 싶단 생각은 늘 갖고 있었다.
어느덧 컴퓨터가 없는 집이 없을 만큼 잘 사는 세상을 만나게 되어 이젠 때가 된 듯이 보였지만, 어린 두 아이에게 PC를 빼앗길 때가 다반사였고 어쩌다가 모니터 앞에 앉아 글을 좀 써 보려고 하면 무슨 이유 때문인지 집중이 안 되었다. 그러다 보니 A4 용지에 완성된 글 한편을 내 손에 쥐어 보는 것이 간절한 소망인 적도 있었다.
1979년 봄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한 나는 14살 어린 나이에 철공소에 취직이 되어 점심 도시락을 싸가는 조건으로 하루 일당 천 원을 받는 소년 노동자가 되었다. 몇 년 뒤 큰형과 모아 둔 전세 보증금을 아버지에게 넘겨드린 뒤 부산에 있는 친구네 집 부엌 위 다락방에서 고향의 아는 형과 함께 지내며 신발을 만들어 수출 하던 국제상사를 다녔다.
한때였지만 음식 배달도 하다가 꽃이 피어 있는 지역을 벌과 같이 떠돌며 양봉 기술도 익혔다. 그러다 1984년 말엔 가난을 극복할 목적으로 두 형과 함께 서울 구로공단으로 올라왔다. 우리 삼 형제는 가리봉시장 근처의 다세대 주택에서 월세로 단칸방 생활을 하였다. 이 근처에서 1990년 중반까지 6년을 열심히 버티고 있었지만 방 두 칸짜리 전세를 구하고 부모님의 빚을 갚아 나가느라 우리의 생활 형편은 크게 나아지질 않았다.
더구나 나는 지난 10년 동안 힘든 노동을 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평생을 이런 식으로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런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를 늘 고민하며 지냈다. 어느덧 우리 삼 형제는 고난에도 몇 년 동안 야간 학원을 다니며 열심히 공부한 결과 고입과 대입 검정고시를 합격하였다. 그리곤 이듬해 한국방송통신대학을 모두 입학했다.
나는 그것이 계기가 되어 1990년 중반에 국내 주택 보급률 1~2위를 겨루던 종합건설회사의 타워크레인 조종사 직업훈련생으로 선발되어 기술을 익힌 뒤 그 회사의 직원이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지금까지 다수의 건설 현장과 조선업에서 타워크레인 조종사로 근무해 왔다. 그럼에도 여태껏 나의 속내를 툭 터놓고 얘기할 만한 상대를 못 찾았다.
어린 시절을 가난하게 살아온 것도 서러운 마당에, 내가 믿었던 사람마저 나의 이런 부끄러운 삶을 알고는 혹시라도 맘이 변하여 업신여기지 않을까 두려워 발설할 엄두를 못 냈다. 그럴수록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것을 대나무 숲에서 발설하였던 신하처럼 나만의 얘기를 어딘가 쏟아 버리고 싶은 욕구는 더욱 강하게 잃었다.
손바닥 안 작은 일기장에 삶을 기록하다
최근 시대가 바뀌어 나의 손바닥 안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2013년 장문의 글을 쓴 뒤 언제든 수정도 되고 저장도 되며 복사와 전송도 가능한, 일명 '김연아 폰'으로 바꾸면서부터다. 스마트 폰은 내가 쓴 글을 누가 몰래 들여다볼 수도 없고 삐뚤거리는 필체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많이 배우고 적게 배운 차별도 없이 스마트폰 소유자의 생각을 그대로 기록하고 수시로 인쇄도 가능하기 때문에 내게 없어선 안 될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눈만 뜨면 스마트 폰을 손에 들고 다니며 어느 때고 글 쓰는 일이 나의 취미가 되어 버렸다. 이렇게 짧은 글이 한편씩 완성되어 스마트 폰에 저장될 때마다 나름 뿌듯함이 느껴졌다. 그런 반면에 잘 정리된 글을 이대로 썩히긴 싫었다. 그래서 방송국으로 보내어 생방송으로 여러 편이 읽히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방송이 녹음된 CD와 택배로 오는 선물은 덤이었고 글 쓰는 취미를 갖길 참 잘 했단 생각을 갖게 됐다.
그러나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지 여성시대라는 라디오 프로에서 나의 이름이 21 차례나 불렸는데도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결국 2년 전부터는 글을 쓰기 시작 했을 땐 엄두도 못 내던 신인문학상까지 도전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실제로 어느 단체에선 신인문학상에 당선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신인문학상을 받기 위해선 행사를 주최한 단체가 발행한 문예지를 일정 부수 구매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결국 나는 신인문학상을 돈으로 사고파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연락 온 두 곳의 상은 아쉽지만 포기했다. 그래도 운이 좀 있었는지 2016년 4월 마지막 날 청정 문예지를 발행하는 단체에서 수여한 신인문학상을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았다. 그해 겨울 11월엔 전태일문학상도 수상했다.
좀 특이했던 것은 두 작품 모두 글을 쓰기 시작할 무렵부터 이런 성과를 가져올 줄은 정말 몰랐다. 보통 다른 글은 늦어도 1주일 안에 완성이 되곤 했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왠지 처음 구상했던 대로 글이 잘 써지질 않아 탈고하는데 몇 년이나 걸렸다. 그렇다고 해서 포기 한 체 계속 내버려 둔 것은 절대 아니다.
나는 이 글이 생각날 때마다 들여다보며 읽고 쓰고 수정하는 작업을 거듭하였다. 특히 전태일문학상에 응모한 <가리봉 청춘들의 삶>은 나의 한계를 느끼면서도 백 번 이상 읽고 수정한 글이다. 이러한 작품 속에 나의 노력과 정성이 깃들어 있는 것을 심사위원단이 놓치질 않았던 모양이다. 수상식이 있던 날 나는 뭐든 포기하질 않고 끝까지 물고 늘어지면 '안 되는 일이 없구나' 하는 것을 실감했다.
가리봉 청춘들의 삶은 34년 전 우리 삼 형제가 돈을 벌기 위해 서울 구로공단으로 올라와 가리봉시장 근처의 다세대 주택에서 단칸방 생활하던 때를 떠올리며 쓴 글이다. 그 당시 공돌이 공순이로 불리던 젊은 처녀 총각들이 닭장 집 또는 벌집으로 불리던 열악한 주택에서 생활하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리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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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갓 올라온 사람 대부분은 이러한 집에서 1~3년 정도 월세로 둥지를 튼 채 돈을 아껴 모아 전셋집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마음이 맞는 두세 사람이 모여 자취 생활을 하며 살아간다. 당시 우리 삼 형제가 둥지를 틀었던 곳에선 생활비를 조금이라도 아껴보기 위해 몹시 추운 겨울에도 연탄불을 전혀 피우지 않았다. 그래서 잠을 잘 때 세 사람의 체온으로만 추위를 견뎌냈으니 우리도 그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집 주택의 삐걱 거리는 철 대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서면 가운데 주인집을 마주한 건물 입구에서부터 ㄷ자로 빙 돌아가며 늘어선 같은 색 같은 모양을 한 여러 방문이 비슷한 크기의 구릿빛 자물통을 하나씩 차고서 밖으로 일하러 나간 주인이 현재 그곳에 없다는 표시를 내곤 하였다. 그 바로 안쪽엔 폭 1m가량 되어 보이는 기다란 부엌이 딸린 작은 방 하나가 있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천정엔 언제 갈아 끼웠는지도 모를 빛바랜 형광등 하나에 키가 작은 사람도 쉽게 켜고 끌 수 있는 굵은 도토리 모양의 전기 스위치가 허공에 매달려 있다. (중략)가리봉 시장은 없는 물건이 없을 만큼 다양한 점포와 노점이 다 모여 있기 때문에 주머니 사정이 얇은 사람은 누구를 만날 일이 생기면 약속 장소를 일부러 그곳으로 정하곤 했다. 전국 팔도에서 고향을 등지고 구로 공단으로 모여든 누군가에게 편안한 잠자리를 제공하며 따스한 밥을 지어먹을 수 있는 작은 방 한 칸은 밝은 미레와 꿈이 영글어가는 보금자리가 되었고, 가리봉 시장은 그런 사람들에게 목마른 갈증을 해소시켜주는 오아시스와 같은 역할을 묵묵히 해주던 곳이다. 이 나라 산업체의 든든한 수출 역군이 되어 청춘을 다 바친 그 많은 처녀 총각 모두는 시집 장가를 들어서 아들과 딸들을 낳아 이젠 자식들이 그 또래가 되었을 것이다." (본문 중에서)"이 작품에는 1980년대 가리봉 벌집 혹은 닭장 집 풍경이 바로 눈앞에 보이듯 잘 묘사되어 있다. 도배지, 공동 화장실, 부엌문 및 토요일 오거리 정경 등 세부묘사와 이웃의 모습과 공장 노동자들의 활기찬 모습이 활동사진처럼 살아 움직인다. 누추하되 천하지 않으며, 가난하되 빈곤으로 찌들지 않고, 노동밖에 낭만과 관계와 사랑과 꿈이 있다. 디지털 한 문명과 오늘의 노동자들이 잃어버린 풍경을 돋을새김 하는 능력은 글 쓰는 이의 소박하고 진솔하며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이웃의 삶을 사랑하는 태도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좋은 기록은 미사여구나 감상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과장도 엄살도 배제하고 미화의 욕구조차 벗어버리고 대상에 핍진하게 다가간 작품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심사평 중에서)
이처럼, 나에게 소중한 상을 안겨준 전태일문학상이 올해로 26회를 맞이하여 다시 작품을 모집한다.
모집은 시와 소설 그리고 생활글/기록문 부문이다. 시는 3편 이상이며 장편시의 경우 1편 이상도 응모 가능하다. 소설은 1편 이상 단편, 중편, 장편 모두 가능하다. 생활글은 1편 이상 삶의 이야기를 자유로운 형식(산문, 일기, 편지 등)으로 쓰면 되고, 기록문은 1편 이상 자유로운 형식(평전, 인터뷰, 일기, 르포 등)으로 분량의 제한 없이 쓰면 된다.
기록문을 제외한 시, 소설, 생활글은 다른 매체에 발표되지 않은 창작품이어야 하고 수상자에게는 소정의 상금이 주어진다. 또 수상 작품은 단행본으로 출간할 예정이며 공모 마감일은 오는 7월 15일 (우편접수는 당일 도착분에 한함)이다. 우편 발송 시 겉봉투에 「제26회 전태일문학상 공모 - ○○부문」을 적고 공정한 심사를 위해 작품이 아닌 표지에만 이름, 전화번호, 주소, 이메일 주소를 적어야 한다.
만약 표절이나 대필 등의 사실이 확인될 경우 수상을 취소한다. 출품된 원고는 반송하지 않으며 이메일
chuntaeil@chuntaeil.org 또는 우편접수 (03101) 서울시 종로구 창신길 39-10 「전태일 재단」 전태일문학상 담당자 앞이며 기타 문의는 전화 02-3672-4138로 하면 된다.
처음부터 큰 목적을 갖고 글을 쓰라 말하고 싶진 않다. 그랬다가는 몇 차례 수상에서 멀어질 경우 쉽게 포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자신이 체험하여 가장 잘 알고 있는 이야기를 솔직하게 써내려 갈 것을 조언한다. 많은 감동과 정성이 담겨 있는 아름다운 글은 어느 누가 읽더라도 한눈에 띄게 마련이다.
비록 한 편의 짧은 글이지만 글쓴이가 그동안 살아온 삶이 영화처럼 생생하게 느껴질수록 더 좋은 반응을 얻을 것으로 확신한다. 글 쓰는 좋은 재능을 갖고도 아직 흙속의 진주처럼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는 문학계의 샛별을 하루빨리 만나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