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선거 분위기가 한창이다. 선거 후보의 절실함이 남 일 같지 않다. 왜냐하면, 나도 10월에는 5년 임기가 끝나 임용시험을 봐야 하는 '임기'제 공무원이기 때문이다. 내 첫 '임기'는 내 삶처럼 매우 운명적이었다.
IMF 학번인 나는 아버지가 실직하셔서 대학 생활 내내 아르바이트와 휴학을 하며 6년 만에 지방 국립대를 졸업했다. 아르바이트하면서 무엇을 하든 살 수는 있구나 하는 자신감을 얻고 졸업하자마자 큰 꿈을 품고 서울로 상경했다. 하지만 뭔가 있어 보이는 직장은 번번이 떨어지고 중소기업에 취직했다.
사실 나에겐 안산이든 수원이든 부천이든 지하철 다니는 곳은 모두 서울인데 서울 사람은 경기도와 서울, 강남과 강북을 명확히 구분했다. 지방과 서울, 중소기업과 대기업, 지방대와 인서울대 차이를 그 때 알았다. 주5일 근무를 시행하지 않고 직원이 5명인 중소무역회사를 다니다가 '이렇게 해서는 결혼도 못하고 아이를 낳으면 일을 그만두어야 하겠구나'하는 암울한 생각이 들었다.
고향에서는 서울에서 직장 다니는 아이인데…. 1300만 원 전세 쪽방에 살면서 주경야독을 하여 명문대 전문대학원에 입학했다. 하지만 산 넘어 산, 명문사립대 학비는 국립대보다 정말 비쌌다. 그 때 학생회장은 정문에서 학비 인하를 외치며 고공 시위를 벌이곤 했다. 학자금 대출 이자는 왜 이리 비싼지 7~8%, 나는 학교 근처 옥탑 방에 살면서 휴학해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2년제 대학원을 4년 만에 졸업했다. 학자금 대출, 보험 약관대출, 친구에게 꾼 돈, 카드 대금 등 졸업과 동시에 빚 4000만 원, 내 나이 곧 서른.
하지만 노력은 삶을 속이지 않는다! 졸업 한 달 전에 스모그마저도 신부의 하얀 베일 같던 내 꿈의 도시, 쭉 달리면 천안문까지 이어지는 중국 수도 베이징의 중심 거리 장안(長安)에 있는 세계 500대 기업에 취직했다. 월급으로 중국 펀드를 사고 싶었지만 착실하게 학자금 대출부터 갚았다. 조직문화가 개방적이라서 회사에서 유연근무제를 하여 박사과정도 밟게 해주었다. 스모그 속 장밋빛 내 인생.
그런데 고향에 계신 아버지께서 아주 편찮아지셨다. 학자금대출 갚느라 해외여행도 못 보내드렸는데….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마음이 자꾸 고향을 향했고 중국 국경절 연휴라 고향에 왔을 때, 공공기관에서 중화권 교류와 통•번역을 담당하는 전문계약직 공무원을 뽑고 있었다. 면접을 보고 나오는데 벽에 '어버이 살아신제 섬길 일란 다 하여라'가 붙어있었다. 합격하겠군! 세계 500대 기업에서 치열하게 쌓은 전문성을 인정받아 당당히 전문 계약직 다급 공무원이 되었다(지금은 일반임기제 공무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지방 외교관'이란 사명감으로 열심히 기획한 사업이 외교부 사업으로 선정되어 약 3000만 원을 지원받기도 했다. 한중 관계가 유사 이래 최고라 바쁜 와중에도 읍내 오빠랑 연애를 하고 서른여섯 살에 결혼해서 갓난 아기 때부터 나를 봐온 동네 어르신들의 걱정도 덜어드렸다. 서른 일곱 살에는 아기도 낳았다. 일, 효, 사랑을 모두 이룬 것이다.
출산 시점까지 고민해야 하는 임기제 공무원의 슬픔
하지만 올 초 서른 아홉 내 생애 두 번째 임신을 하고 임기제 공무원이 된 것을 가슴 아파했다. 우리 부부의 자녀 계획은 '아들 둘, 딸 둘, 건강이 허락하는 한 낳자!'이다. 서른 시간 산고 끝에 출산한 나에게 둘째 이야기를 꺼낸 시아버님께도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했었다. 그런데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임기제 공무원은 출산, 고용보험, 평가 등이 사각지대에 있다. 남녀고용평등법을 적용하는 비공공 부문 계약직은 육아휴직 기간을 계약기간에 포함하지 않으며, 육아휴직 기간에는 해고할 수 없다. 현실은 어떨지 모르지만 제도는 여성 근로자를 보호한다. 그러나 임기제 공무원은 제도마저 육아휴직 기간이 계약 기간에 포함되고 육아휴직 중 계약 만기가 도래하면 퇴직해야 한다. 그래서 육아휴직 중에 계약을 연장하기 위해 복직해야 한다.
현재 규정에는 유급육아 휴직을 1회에 한해서만 나눠 쓸 수 있어 시기를 선택할 폭이 좁아진다. 또한 휴직 기간 동안 실적이 없는데 그 기간도 평가를 받는 것도 부담이 된다. 정규직 공무원은 육아휴직 등으로 2개월 미만 근무하면 직전 년도 2년 평균 이하를 받을 수 없도록 규정되어 있지만, 계약 기간 만료 전 복직을 해야 하는 임기제는 10개월 휴직을 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나는 계약 기간이 끝나기 전 국제행사가 많은 9월에 조기 복직해서 실적을 쌓아 계약 기간을 연장하고 평가를 받았다.
게다가 임기제 공무원은 임신 기간을 계약 기간에 잘 맞춰야 한다. 왜냐하면 평가점수 평균 A이상을 받으면 2년 연장, B는 1년 연장, C이면 연장 불가인데, 육아휴직을 하려면 계약 잔여기간이 6개월 이상이어야 한다. 임신 열 달, 출산휴가 3개월까지 생각하면 A를 받아 2년을 연장했더라도 기간이 얼마 남지 않는다. 출산 휴가를 갔다가 잔여기간이 6개월이 남지 않아 100일도 안 된 아이를 두고 복직 후 만기 도래까지 수개월 근무를 한 후 계약 연장을 하고 다시 육아휴직을 신청한 임기제 공무원도 보았다(최근 국가임기제 공무원은 6개월 제한 조항이 삭제되었지만 지방임기제 공무원은 그대로다).
난 정말 다행으로 계약 기간이 2년 연장되었을 때 첫 아이가 생겨서 출산휴가 3개월, 육아휴직 9개월 총 1년을 쉬는 행운을 누렸다. 하지만 계약 만료 날짜는 다가오는데 거주 지역 어린이집에서는 3살이 되어야 자리가 난다고 해서 정말 초조했다. 아이가 10개월로 접어들 무렵 거주 지역이 아니어서 차량운행은 안 되지만 그나마 가까운 곳에 자리가 나서 극적으로 복직할 수 있었다. '뭐, 대기업이든 공공기관이든 정규직도 육아휴직 쓰는 것을 눈치 보는데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하면서도 불안한 마음에 국민신문고에 제도 개선을 건의하고 연구기관에 정책 제안을 했다.
동네 어르신들께서 "붙여서 어서 동생을 낳으라"고 하실 때마다 '지금 생기면 임기만료랑 겹쳐서 육아휴직도 못 가고 아이 낳고 바로 재임용 시험도 봐야 하니 조금 늦추는 게 좋겠지' 하면서도 나이가 곧 마흔이라 계약 기간과 가임 기간 사이를 갈등하며 임신을 미루고 있었다.
그러다 지난 1월 둘째가 생긴 걸 알았다. 그런데 출산 예정일이 8월 30일, 임기만료 직전으로 임용시험을 봐야할 때다. 출산 직전이나 제왕절개해서 3주 정도 입원했을 시기가 시험기간이랑 겹칠 것이 뻔했다. 대담한 성격인데도 임신 초기라 예민해졌는지 시험 날 출산하는 꿈을 꾸고, 자꾸 달력에 눈이 갔다.
그러다 하루는 밤에 배가 너무 아파 병원에 갔는데 더 이상 아가 심장 소리가 들리지 않는단다. 몇 번이고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울음을 터트렸다. '정말 미안하다 아가야.' 아마 영점 일초쯤은 '(아이가) 조금 있다가 생기면 좋았을텐데'라고 생각한 것 같다. 유산 원인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난 그 영점 일초와 달력을 보던 스스로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마음놓고 출산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세요
근무를 하며 사용할 수 있는 육아휴직 기간이 남았는데도 퇴사하는 임기제 여성 공무원들도 보았고 나도 앞으로 임신과 출산이 계약 기간과 맞지 않아 출산•육아와 일할 기회를 맞교환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난 고용보험에도 들어있지 않다. 임기제 공무원은 고용보험 임의 가입대상으로 소속단체장이 가입 의사를 지체 없이 확인해야 한다고 법에 명시되어 있으나 내 소속기관에서는 내게 가입의사를 확인하지 않아서 가입 시기를 놓쳐버렸다.
사람이 하는 일이니 그럴 수 있는데 법에 문제가 있다. 소속기관에서 의사를 확인하지 않아 가입을 못하더라도 구제 조항이 없다. 처음 임용되고 90일이 지나면 가입할 수 없다. 상위법에서는 계약직공무원 보호하라고 정했는데 하위법 시행령에서는 90일 제한을 두어 상위법 취지를 위반한다.
2016년, 만삭의 몸으로 고용센터에 가고 출산 후에 고용노동부에 가서 의사를 확인했더라면 고용보험에 가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고용보험에 가입하게 해달라고 했지만 '제척기간 도과'로 매번 가입 거절당했다. 사업주가 가입을 하지 않았을 시 의무가입자는 3년 간 소급징수 할 수 있는 것과 비교했을 때 이는 형평성에 어긋난다.
내가 계약직인 것을 알고 들어왔으니 실적이 좋지 않아서 계약 연장이 되지 않는 것은 수용할 수 있다. 하지만 고용불안이 있는 노동자이니 고용보험에 가입하게 해주었으면 한다. 여러 제도가 개선되려면 시간이 걸리고 여러 상황을 제도가 다 보호하지 못하니 고용보험이라도 들어서 최소한의 사회 안전망을 만들어 달라고 2년 동안 외치고 있다.
혹자는 공무원 연금도 가입하고 고용보험도 가입하느냐고 하지만 어느 보험이나 그렇듯 피해가 발생했을 때만 보험금을 받을 수 있다. 즉 비자발적 퇴사, 잘렸을 때만 실업급여를 준다는 전제 하에 정규직 공무원은 정년을 보장하지만 임기제 공무원은 정년을 보장하지 않기 때문에 임의 가입할 수 있게 법으로 정한 것이다. 게다가 정규직 공무원 육아휴직 사용과 비정규직 공무원 육아휴직 사용 여건은 차이가 있어 고용 불안을 가중한다.
비록 난 임기가 있는 계약직이지만 아이를 많이 낳고 싶다. 하지만 IMF, 서브프라임을 이겨내며 키워 온 내 꿈도 이루고 싶다. 공공기관 계약직이 이러할 진데, 민간부문 계약직은 더 하겠지…. 헌법 32조 4항에는 여자의 근로는 특별한 보호를 받으며 고용, 임금 및 근로조건에 있어서 부당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고 되어 있다. 출산을 장려하는 정부에게…. 저 아이 많이 낳을게요! 도와주세요! 참고로 좀 빨리요! 저 곧 마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