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게임회사에서 여성직원이 한국여성민우회의 SNS를 팔로우했다는 이유로 회사대표와 면담을 하고 그 내용을 온라인에 공개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여성직원은 본인이 왜 여성단체를 팔로우했는지, 페미니즘과 젠더이슈에 관심이 없음을 구구절절 이야기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게임업계의 '페미사냥'은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있습니다. 게임업계에 만연한 여성혐오 광풍 속에서 게임업계 직원들, 특히 여성직원들은 숨죽이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오마이뉴스>가 들어봤습니다. [편집자말] |
"'난 메갈리아와 관련이 없고 페미니즘을 지지하지 않는다'라는 트위터를 해줄 수 있나요?" 한 원화가가 게임회사로부터 들은 말이다. 그는 요구를 거절했다. 결과는 게임 속 그의 그림 삭제였다.
9년 차 원화가인 나르닥 작가는 지난 2월 게임 '벽람항로'를 한국에서 유통하는 게임회사 X.D.글로벌과 계약을 맺었다. 일본과 중국에서 유명한 게임 '벽람항로'의 한국 출시를 앞두고, 바이럴 마케팅용 그림을 그리기로 한 것이다. 작가가 본인의 SNS에 게임 캐릭터를 그려 올리면, 회사 공식 SNS계정이 이를 '좋아요' 하고 공유하기로 했다. 이와 더불어 회사측은 작가의 그림을 게임 로그인 화면에 넣기로 했다.
나르닥 작가의 그림이 게임 로그인 화면에 들어간 지난 4월 27일 해당 게임의 공식카페에는 항의글이 빗발쳤다. 게임 유저들이 작가의 SNS를 살펴본 뒤, '메갈'(과거 존재했던 페미니즘 관련 웹사이트 '메갈리아'에서 유래된 말) 딱지를 붙이고 '메갈 작가'가 참여한 게임은 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블랙컨슈머성 항의에 대한 게임회사의 조치
유저들이 문제 삼은 것은 별 게 아니다. '게임 내 사상 검증에 반대하는 민주노총 성명'을 공유한 것, 베스트셀러 <82년생 김지영>을 읽은 여자아이돌 관련 글을 공유했다는 이유로 '메갈'로 몰려 게임에서 캐릭터가 삭제된 한 원화가의 심경글을 '좋아요' 한 행위 등이다. 문제 삼는 게 더 이상한 활동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블랙컨슈머(고의적으로 악성 민원을 제기하는 소비자)'에 가까운 항의이건만, 회사측은 작가에게 화살을 돌렸다. 작가에게 '메갈, 페미니즘과 무관하다'는 식의 의견 표명을 요구한 것이다.
작가가 거절하자 회사는 게임에서 그의 그림을 삭제하고 "메갈 측이 아니라는 의견 표명이 없을 경우엔 추후 지속적인 협업이 어렵다"라고 통보했다. 그가 자신의 사상을 대중에게 알리고 검증받지 못 하면 그와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사상검증이다.
나르닥 작가는 <오마이뉴스>기자에게 "페미니즘은 지지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그런 의견 표명을 왜 요구하는지 모르겠다"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오마이뉴스>는 벽람항로 측에 반론을 요청했다. 하지만 장난스러운 어투로 트위터를 참고하라는 말이 돌아왔다. 벽람항로의 트위터는 "논란이 된 부분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상당히 민감한 문제라는 걸 저희도 인식하고 있다"라며 "이와 같은 일이 생길 시 저희는 '벽람항로'를 사랑해주시는 유저분들을 더 우선시하는 방향을 고수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나르닥님을 존중하며 권익을 지켜드리고자 당시 저희가 '논란이 된 부분을 부정하는 공지'를 올려도 될지 여쭤본 것"이라며 "커뮤니케이션 과정 중에 생긴 일련의 문제에 대한 심심한 사과 말씀 드린다"라고 해명했다.
한 두 회사의 일이 아니다... 두 달 사이 피해 원화가만 7명 넘어게임 유저들에 의한 페미니즘 색출과 그로 인한 캐릭터 교체와 계약해지, 사과문 게재 등은 나르닥 작가만의 일이 아니다. 프리랜서로 계약한 외주 원화가는 계약해지와 캐릭터 교체로, 회사 직원일 경우는 사과문 게재 등의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게임회사의 규모도 상관이 없다. 중소, 대기업 할 것 없이 '페미사냥'의 희생자가 속출하고 있다. 대기업 넥슨이 퍼블리셔로 유통을 맡은 게임 '트리 오브 세이비어' 원화가는 페미니즘과 무관함을 공공연하게 알려야 했다. 지난 2016년 '5억 달러 수출의 탑'을 수상한 회사 스마일게이트가 퍼블리싱하는 게임 '소울워커' 원화가는 게임에서 캐릭터가 삭제됐다. 이렇게 지난 두 달 사이 '메갈 딱지'에 피해를 입은 원화가만 7명이 넘는다.
나르닥 작가는 "프리랜서, 회사 소속을 떠나서 사회 분위기가 (페미니즘에 관심있는) '그런 작가들과는 일하지 않는다'라는 쪽으로 가면 답이 없다"라면서 "지금이 21세기가 맞는지 모르겠다"라고 반문했다.
한국여성민우회 관계자는 "게임 원화가는 프리랜서라 업무가 SNS로 수주되는 경우가 많다"라며 "개인계정이 노출돼 표적이 되는 것 같다"라고 했다. 이어 그는 "부당한 사상검증 행위로 일할 권리가 위협되면 안된다"라면서 "이를 막아줘야 하는것이 사업주인데, 되레 사업주가 나서서 사상을 검증하고 있으니 더 문제"라고 비판했다.
김수경 민주노총 여성국장은 "사상검증이고 현대판 빨갱이 사냥이라고 생각한다"라며 "대놓고 페미니스트라고 해서 탄압하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김 국장은 "특정 정치적 성향으로 고용 관계에 위협을 줄 수 없듯, 사상으로도 불이익을 줘서는 안된다"라며 "(불이익, 차별을 받은) 사례들을 모아 시정요구, 구제신청을 할 필요가 있다"라고 지적했다.
김 국장은 또 "게임산업, 특히 아트계열 쪽은 여성 일자리가 집중되는 곳인데, 대부분 특수고용형태인 프리랜서가 많다"라며 "그러다보니 ('페미사냥'이 일어나면) 회사는 계약해지를 일반적으로 하고 있다"라고 우려를 전했다. 그러면서 그는 "여성들의 일자리가 집중되는 산업에서 일어나는 이 같은 여혐 문화, 사상에 따른 노동탄압을 방치하거나 간과해서는 안 된다"라며 "민주노총, 여성가족부, 고용노동부가 나서야 할 필요가 있다"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