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를 추구한 의병장 신돌석 1908년 3월, 일본군은 경북 영양의 시골 친척 집에 피신해 있던 의병장 신돌석의 아내 한씨 부인을 체포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한씨 부인과 아이를 안동의 고급 여관에 데려가 잘 먹이고 잘 대접해 주고는 편지 한 장을 쥐어주며 남편에게 전해 달라고 했다. 2년 가까이 태백산맥을 넘나들며 신출귀몰하던 신돌석을 도저히 잡을 수 없었던 일본군의 회유책이었다.
풀려난 부인은 아이를 업고 걸어서 남편을 찾아다니다 결국 어느 산골에서 남편을 만났다.
부인이 편지를 꺼내 보이자, 신돌석은 편지를 읽지도 않고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어찌 죽지 않고 여기까지 왔느냐? 하물며 왜놈의 편지를 갖고 왔단 말이냐!" 하고는 편지를 불 속에 던졌다.
"이는 필시 이(利)로써 나를 유혹하려는 것이다. 내 앞에 서 있지 말고 빨리 가라!"신돌석은 자기 아내를 쫓아 버리며 업혀 온 아들에게도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1896년 을미의병이 일어났을 때는 영해 의병의 대원으로, 1906년 4월에는 영릉 의병의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1908년 12월 현상금에 눈먼 부하에게 피살당할 때까지 30세의 짧은 나이를 불꽃처럼 살다 간 평민 출신 의병장 신돌석.
의병장으로 의병을 이끈 2년 8개월간 경상북도 영양, 봉화, 진보, 청송 등의 산골과 울진, 평해, 영해, 영덕 등의 동해안, 삼척 등 강원도 동해안을 넘나들며 일본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 놓은 각종 건물과 근거지를 공격하며 숱한 전투를 치르고, 2차에 걸친 일본군의 대규모 토벌작전과 신돌석 생포작전에도 끝끝내 잡히지 않고 산악을 근거지로 유격전을 벌였던 인물.
그는 아내가 자신을 찾아온 것이 일제의 회유책에 의한 것임을 금세 알아차리고 부하들 앞에서 의도적으로 매몰차게 대했다. 자기를 따르는 의병 대원들에 대한 일종의 메시지이기도 했을 것이며, 자기 뜻에 맞지 않게 일본군의 의도대로 움직인 아내에 대한 분노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곧이어 그는 자신의 부모를 태백산맥 산줄기 깊은 계곡 마을에, 자신의 처자식을 자기가 믿는 산골 마을 나루터지기 집에 숨기는 조치를 취했다.
그는 이런 인물이었다. 이(利)를 멀리하고 의(義)를 추구한 의지의 인물, 이 정도의 강단이 있었기에 처자식 앞에서 마음이 약해지지 않고 험한 세월과 강력한 일본군의 탄압을 이겨냈을 것이다.
평민 의병장이 갖는 의미 지금 20, 30대 나이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중·고등학교 시절 교과서에서 최초의 평민 의병장 신돌석에 대해 배운 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외교권을 빼앗긴 을사늑약의 체결 후 등장한 을사의병의 대표적 인물 중 한 명인 신돌석. '태백산 호랑이'로 불린 평민 출신 의병장. 그저 이 정도, 시험을 위해 공부했던 인물 정도로 기억했을 것이고, 이름이 외우기 쉬운 정도로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을까.
우리 역사에 가끔 등장하는 의병을 이끌었던 의병장은 거의 다 양반 출신이다. 왜 그랬을까. 단순히 지역 사회를 이끌었던 명망가였기 때문일까. 즉, 지배 신분이었던 양반의 영향력 때문이었을까. 분명히 그런 이유도 있다. 하지만 보다 실질적인 이유는 재산이 많아야 했기 때문이다.
의병이라는 것이 '의지'만 있다고 해서 일으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의병장은 자기 밑에 모인 의병 부대원들의 숙식을 해결해야 했다. 무기도 마련해서 쥐여줘야 한다. 이런 기본적인 조건을 충족하는 것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니다.
부대원들을 평균 300명이라고 하면 이들이 먹는 하루 식사의 양만 해도 얼마나 되겠는가. 요즘으로 따지면 300명을 거느린 회사의 사장 정도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아무런 산출을 바라지 않고 숙식에 들어가는 돈을 무한정 쏟아부어야 한다.
이러니 본인이 부자거나 최소한 뜻을 같이하는 인근 친인척들이 부자여야 한다. 더구나 아무런 조건 없이 '대의'를 위해서 비용을 지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나라에 대한 지식인의 의무를 져야 할 뿐 아니라 자기 집안 재산도 꽤 갖춘 인물, 즉 양반 지주라야 의병을 일으킬 수 있다.
평민 출신이 의병장이라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이 조건들을 충족시켜야 함을 의미한다. 집안 재산을 털어야 할 뿐 아니라 없으면 강제로 모금이라도 하든, 약탈이라도 하든 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민심을 얻을 수 없다. 지역을 기반으로 해야 할 의병이 지역 민심을 잃으면 활동을 할 수 없다.
평민 의병장 신돌석. 그는 이 조건들을 해결했다. 우선 그의 아버지가 피땀 흘려 모은 재산을 털어 의병 활동을 시작한 아들에게 주었다. 또, 이미 을미의병 당시부터 의병 부대원으로 활동을 시작하여 어느 정도 실력을 보인 그를 믿고 활동 자금을 지원한 양반들이 주변에 있었다. 게다가 실제 양반 집안사람들이 그의 부대원이 되어 생사고락을 같이했다. 그가 실력과 리더십을 갖고 있었다는 증거다. 그리고 그는 양반이나 지식인이 아니었지만, 일본의 국가 침탈에 분노했고, 기꺼이 '대의'에 자신을 던졌다.
그로 인해 신돌석 의병부대에 도움을 주었다는 이유로 퇴계 이황의 종택은 불탔고, 안동의 명문가 출신이자 후에 망명 독립운동가가 되는 이상룡이 검거되었으며, 훗날 조지훈 시인을 비롯해 수많은 학자와 인재를 배출한 영양 주실 마을의 조만기는 마을 앞에 거꾸로 매달려 고문을 당해야 했다.
당시 사회가 양반과 평민을 가르는 신분 의식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며, 일제의 한반도 강점에 저항하기 위해 다양한 신분, 계층의 사람들이 한데 뭉쳤음을 알 수 있는 증거이다. 평민 의병장의 등장은 큰 역사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신돌석 생가와 유적지, 월송정 답사 신돌석 생가에 들어가기에 앞서 월송정에 들렀다. 생가에 가는 것이 우선이겠지만, 그가 의병장이 되기 전, 1904년 27세 나이에 찾은 월송정에서 느낀 벅찬 감동과 비감의 복잡한 감정을 먼저 느끼고 싶어서였다.
누각에 오른 나그네, 갈 길을 잊고
폐허가 된 단군의 터전을 한탄하노라.
남아 27세 무엇을 이루었는가.
잠시 추풍에 기대니 감개만 이는구나.
관동 8경의 하나로 오래전부터 명승지였던 월송정. 수평선까지 뻗은 푸른 바다와 흰 모래밭, 그리고 그 모래 위에 울창하게 자라난 소나무숲. 그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그는 비탄에 젖어 한시를 하나 남겼다.
아름다운 풍경이 남의 땅이 될 위기에 처하여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과 가슴 속 응어리가 느껴진다. 결국 그는 1년여가 지난 뒤 한탄으로만 끝내지 않고 결단을 내려 본격적인 의병장으로서 활동을 전개했다. 그렇기에 그가 남긴 시는 의미를 얻었다.
이제 발길은 그의 생가로 이어진다.
신돌석 생가는 영덕에서 울진으로 향하는 동해안 7번 국도에서 가깝다. 국도를 벗어나 채 5분도 안 걸려 도착한다.
그는 경북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지번 주소) 복더미마을에서 태어났다. 이 마을은 평민들이 사는 마을이었다. 그의 선조들은 중인 신분으로 지역 향리의 일을 했다고 하지만, 그와 아버지 대에는 명백히 일반 농민이었다. 그래도 그의 아버지 신석주가 열심히 농사를 지어 꽤 많은 땅을 소유하고 넉넉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 덕에 그는 인근 마을 양반집 서당에도 다닐 수 있었다.
생가에는 두 채의 초가집이 있는데, 왼쪽 초가집이 그가 태어난 곳이다. 일제가 1940년경 불태워 버린 것을 1942년에 기와집으로 다시 지었고, 1995년 현재의 초가집으로 복원했다. 집 자체는 평범한 직사각형의 네 간짜리 초가집이다. 그가 태어나 자란 곳이라는 것 이외에 특별한 점은 발견할 수 없다.
집 주변 마을은 조용하고 야트막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마을 밖으로 조금 나가면 비교적 넓은 농토도 있었다. 신돌석 아버지 신석주의 농토도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이 집에서 태어난 신돌석의 본래 이름은 신태호이다. 어릴 적 이름은 돌선이었다고 한다. 의병장으로 활동할 때도 돌선이라는 이름을 썼다 하니 어느 시점에서 돌석으로 바뀌어 불린 셈이다. 아무래도 돌석이라는 이름이 더 호감을 주었을 듯싶다.
그가 처음 의병을 일으킨 곳이 주점이었다. 양반들처럼 명분과 장소에 얽매이지 않고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는 술집에서 의병을 일으킨 것은 그의 성격을 알 수 있게 하는 부분이다. 아마 지역민들에게 '돌석'이라는 이름은 그런 그의 평민적 성격을 드러나게 한 친근감 있는 호칭이었으리라.
한편, 7번 국도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신돌석 장군 유적지가 있다. 유적지 안에는 기념관과 기념비, 유허비, 충의사, 동재와 서재, 시비, 그리고 돌 들기 체험장과 활쏘기 체험장이 있다.
사당인 충의사 오르는 길에는 그가 월송정에 올라 지은 시를 기록한 큰 시비가 있어 발길을 멈추게 한다. 충의사 안에는 신돌석 초상화가 있는데, 체격이 장대하고 힘과 기운이 장사였다는 생전의 표현대로 굵직하고 강인한 인상을 하고 있다. 이미지에 맞게 그림 잘 그렸다 싶다.
기념관에는 그의 생애와 의병 활동이 간략하게 정리되어 있고, 당시 의병 관련 자료와 유물들 일부가 전시되어 있다. 의병들이 사용한 무기는 주로 화승총이었는데, 일본군이 사용한 무라타 소총이나 38식 소총에 비해 성능이 많이 떨어졌다.
1908년 일본군의 토벌 작전 당시 신돌석 의병군은 이러한 일본군에 대항하여 정면 대결을 벌이지 않고 소규모 단위로 나누어 유격전을 벌이는 방식을 택한다. 그러나 일본군이 우수한 무기로 압박하고, 귀순자 면죄 조칙 등의 회유책으로 양면 전술을 구사하는 총체적 진압 작전을 펼쳤기에 힘의 한계를 느낀 신돌석은 국내에서의 의병 활동을 접고 만주로 가고자 한다. 그러나 결국 믿었던 과거의 부하에게 배신당하고 짧은 일생을 마감한다.
아쉽다. 그가 만주로 건너가는 데 성공했다면, 함경도의 평민 의병장 출신 대한독립군 사령관 홍범도처럼 만주에서 독립군을 지휘하는 장군으로 항일 독립 투쟁의 선봉장이 되었을 것이다.
기념관과 충의사, 유허비를 둘러보면 신돌석 생가에서 느낀 아쉬움을 어느 정도 만회할 수 있다. 기왕이면 생가 바로 옆이나 주차장 자리에 하나 만들었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있다는 것 자체로도 나쁘지 않다. 생가를 방문하면 유적지도 반드시 방문해야 하겠다.
역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당대의 박은식은 그의 책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그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영해에서 봉기한 평민 출신 의병장 신돌석 의병 부대가 백암산을 근거지로 의병 부대의 규모를 강화하며 신출귀몰한 유격전을 전개하면서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답사 정보]* 주소: 생가(경북 영덕군 축산면 신돌석장군1길 31), 유적지(경북 영덕군 축산면 신돌석장군길 218)* 문의: 신돌석장군유적지 관리사무소 054-734-6397* 가는 법: 자가용으로는 당진-영덕 고속도로 영덕 종점에서 나와 7번 국도 영덕, 울진 방향으로 약 23km 진행 후 성내교차로에서 오른쪽 신돌석장군 유적지 간판을 보고 우회전, 200m 내려가면 신돌석장군 유적지가 있고, 여기서 입간판을 따라 약 1.5km 들어가면 생가가 나온다. 대중교통으로는 영덕에서 시외버스나 군내버스로 영해로 간 후, 영해에서 축산 행 군내버스(약 1시간에 한 대 정도 운행)를 이용, 신돌석장군 유적지 입구에서 내린다. 생가는 여기서 30분 정도 걸어가야 한다. * 멀리 영덕에 답사를 갔다면, 영해의 괴시리 전통마을에 가볍게 들러보아도 좋다. 동해안을 보고 가겠다면 대진항~축산항~강구항에 이르는 바닷길을 달려보면 좋다. 내내 수평선까지 이어지는 푸른 바다와 작은 어촌마을을 구경하며, 해맞이공원과 풍력 발전 단지, 창포말등대 등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