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수) 14시, 한반도 평화만들기 1000인 순례단 일행이 여수를 방문했다. 도법스님과 대화문화아카데미 이삼열 이사장을 비롯한 15명의 은빛순례단 일행이 선택한 여수 순례길은 여순항쟁 관련 행적을 찾는 길이다.
순례의 해설은 주철희 박사가 진행했다. 해설을 맡은 주철희 박사는 여수에서 나고 자란 역사학자이며, 여순사건 전문가이다. 그는 <불량 국민들>,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 등의 여순사건 관련 저서와 많은 연구 논문이 있다.
순례단의 첫 번째 행보는 신월동에 소재한 제14연대 현장이다. 제14연대의 현장은 한화여수공장이 위치해 깨끗이 정돈되어 있다. 공장주변은 잘 다듬어진 가로수 길과 정원수가 어우러져 녹음이 짙게 우거져 있다.
공장 앞 파란바닷물이 넘실대며 하늘이 유난히 밝다. 바다는 70년 전 여수를 피바다로 물들였던 사건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무심히 흐르고 있다. 다만 일제강점기에 세웠던 공장굴뚝이 높이 솟아 이곳이 역사의 현장이란 걸 증명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역사는 또 있다. 정문 앞 인근 언덕아래 일제가 파놓은 무기고와 방공호들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 해군202 부대가 있었던 이곳은 해방 후 국방경비대들이 사용했고 국군으로 개명한 제14연대가 주둔한 곳이다.
제주도 출동을 거부하며 시작된 제14연대 봉기여순사건은 국군 제14연대 병사들이 동포의 학살을 거부하며 제주4·3사건 진압명령을 거부면서 발발하였다. 그들은 <애국인민에게 호소함>이란 성명서에 '동족상잔 절대반대'와 '미군 즉시철수'를 주장하며 여수, 순천 등 전라남도 동부지역을 점령한 사건이다. 이 사건을 진압한 이승만 정부는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강력한 반공국가를 구축했다.
신월동을 떠난 일행의 다음 행선지는 여수서초등학교이다. 이곳은 토벌군에 점령당한 후 부역자심사가 이뤄진 후 학살이 있었던 곳이다. 일행은 봉기군과 경찰 간에 최초 총격전이 있었던 충무지서를 경유하여 당시 여수 우체국과 금융조합 등이 있었던 여수 시내 중심지로 이동하였다.
제14연대 병사들이 여수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길을 따라 걷다가 화단 앞에 조선수군복장을 한 인형이 세워진 의자에 앉아 주철희 박사의 설명을 들었다.
"여기서 20여미터 떨어진 OO통만두집이 당시 여수우체국이며, 그 옆이 여수일보 건물이 있었던 곳으로 10월 24일에 '여수인민보'로 개명한 후 신문이 발행된 곳입니다. 당시 여수 시내는 모두 불바다가 되었습니다."중앙동 진남관을 지나 여수경찰서를 거쳐 여수중앙초등학교로 간 일행은 학교나무그늘에서 주철희 박사로부터 강의를 들었다. 중앙초등학교는 여순사건 당시 김종원 대위의 제5연대가 주둔해 부역혐의자들을 총살하거나 일본도로 죽인 곳이다. 여수중앙초등학교 바로 뒤에는 여수여중이 있다. 나무그늘아래 앉은 일행들에게 주철희 박사가 강의를 계속했다.
"여순사건에 있어 여수중앙초등학교와 여수여중은 중요한 곳입니다. 당시 뉴스보도를 보면 제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보도했습니다. 군대가 반란을 일으켰으면 군인반란의 책임은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 있습니다. 그걸 깨달았는지 10월 27일 이후 보도내용이 달라졌습니다. '전남지역 좌익분자들이 반란을 했는데 일부 군인들이 동조했다' 즉, 군인 반란을 민간인 반란으로 책임을 전가한 것이지요. 그러면서 반란의 총지휘자로 여수여중 송욱 교장을 지목하여 숱한 고문을 당하고 그는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총살되었을 것입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금지곡 <여수야화>여순사건이 끝난 뒤 이 사실을 지켜봤던 당시 여수여중 국어교사였던 전병순이 여순사건을 그린 <절망 뒤에 오는 것>이란 소설을 썼다. 주철희 박사는 여순사건과 관련된 노래가 세 곡이 있으며 그 중 한곡은 대한민국 최초의 금지곡이 되었다고 설명했다. 남인수가 부른 '여수야화'는 민심에 악영향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최초의 금지곡이 되었다.
오죽했으면 억울한 죽음을 목격한 경찰이 노래를 지었을까? 여수경찰인 강석호가 작곡한 '여수부르스', 전북 경찰인 정성수 작곡인 '산동애가'가 나머지 두 곡이다.
할 말을 못 다한 두 개의 비석순례의 마지막 코스는 만성리다. 한 때 검은모래로 유명했던 만성리 인근 산에는 여순사건 당시 희생된 사람들의 묘지가 있다. 여수에서 마래터널을 지나 백여미터 왼쪽에는 차량 대여섯 대가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나오고 자그마한 산기슭에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가 있다. 그런데 뒤쪽 비문이 여느 비문과 다르다.
"1948년 10월 19일 ㆍㆍㆍㆍㆍㆍ2009년 10월 19일"당시 비석을 세웠던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이오성 여순사건위원장은 "여수시가 비를 세워주면서 '학살'이라는 단어를 제한했기 때문에 점 6개로 유족들의 못다한 말과 울분을 함축시키기로 했다"고 했다.
당시 여수시청 관계자에 의하면 "정부차원에서 진상규명이 끝나지 않았고 일부 단체에서 '학살'이라는 견해를 반대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위령비를 지나 만성리 해수욕장 쪽으로 20여미터 가다 계단을 20여미터 올라가면 형제묘가 있다. 군인들은 부역혐의가 있는 민간인 125명을 끌고 와 학살한 후 시체를 불에 태웠다.
사건이 끝난 후 시신을 수습하려던 유족들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자 죽어서라도 형제처럼 지내라는 의미에서 비석을 세우고 형제묘라고 이름 지었다. 초기에 세워진 비석 뒷면에는 희생된 125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지만 희생자 유족 중 한 명이 좌익불순분자 집안으로 낙인찍혀 평생 고생하는 게 지겨워 희생자 이름을 지워버렸다. 희생자 이름이 지워진 뒷면 내용이다.
"이정최문자쓰다" 이정은 호이고 최문자는 유족이름이다. 저녁식사를 마친 일행은 신기동으로 자리를 옮겨 주철희 박사의 '여순항쟁과 국가'란 주제의 추가 강의를 듣고 난 후 이삼열 교수와 도법스님으로부터 평화순례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도법스님의 얘기다.
"우리가 과거문제만 논의해서는 답이 없습니다. 전쟁은 전쟁방식으로 해결되지 않으며, 핵을 핵방식으로, 분노와 증오를 분노와 증오로 푸는 것은 불로 불을 끄는 것이며, 피를 피로 씻는 것과 같습니다. 다들 세계평화, 남북평화 이야기를 하면서도 일상의 평화, 내안의 평화를 이야기하지 않아요. 평화가 깨지면 어떤 것도 풀어지지 않아요. 인내와 관용 평화방식으로 풀어나가야 합니다. 남북정상회담을 보면서 아! 바로 저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까이 있는 부부간, 이웃간, 지역간에도 평화를 위한 정상회담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