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활짝 만개했네'라고 생각했는데 금방 날씨가 후끈후끈 해지고 있네요. 사랑스런 봄을 충분히 즐길 수 없어 살짝 짜증이 나려고 합니다. 봄을 즐기는 마음은 초봄 들뜬 벚꽃놀이로부터 시작하지요. 따뜻한 햇살에 움츠렸던 땅이 새싹들을 내어놓고, 말랐던 가지에 연둣빛 잎들이 쏙쏙 고개를 내밀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만 어린 잎들과 여린 꽃들의 잔치에 마음을 빼앗기고 맙니다.
봄나들이 떠나는 가족들이 점점 많아지게 됩니다. 미세먼지 경보가 무섭기도 하지만 겨울을 이기고 다시 피어난 꽃들이 대견하기만 한 이 순간을 놓칠 수 없어 떠나기로 결심 합니다. '봄의 전령사'라 불리는 꽃들, 꽃들은 팍팍한 세상살이에 탈수 증상이 일어날 것 같은 우리 마음에 시원한 물을 공급해줍니다. 꽃줄기가 뿌리에서 쭉 빨아들인 물을 꽃 샤워기로 시원하게 뿌려주는 것 같지요.
'꽃을 선물할게'라고 말을 건네는 이 그림책 <꽃을 선물할게>(강경수, 창비)는 화려한 꽃다발을 배경으로 투박한 곰의 손끝과 그 날카로운 손톱 위에 앉아 미소 짓는 무당벌레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꽃을 선물하겠다고 하는 존재가 곰인지, 무당벌레인지 궁금해지지 않나요?
"이것은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난 이야기입니다"라고 시작하지만 사실 이 이야기는 어느 날 하루 동안 생긴 일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덩치 큰 곰이 어느 날 아침 산책을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곰을 부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아주 작은 소리지만 다급함이 느껴지는 소리였지요. 그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무당벌레였습니다. 거미줄에 걸린 작은 무당벌레가 거미가 돌아오기 전에 자신을 구해달라고 곰에게 애원합니다. 곰은 잠시 생각합니다.
"내가 너를 살려 준다면 거미가 굶겠지? 그건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는 일이야.""거미님은 뛰어난 사냥꾼이라 저를 놔줘도 굶지 않으실 거예요." 곰은 무당벌레의 애원을 뒤로 하고 사라집니다. 무당벌레는 이렇게 생각하지요.
'하늘에 구름이 몰리면 날이 흐린 건 자연의 법칙이죠. 태풍이 불면 나무가 뽑히는 건 자연의 법칙이죠. 그렇게 큰 걸 바라는 게 아닌데. 그저 곰님이 그 큰 손을 아무렇게나 흔들어 거미줄이 찢기는 정도면 될 텐데. 당신은 성큼성큼 사라지네요.'
곰과 무당벌레의 이야기를 보면서 나는 왜 자꾸 미생의 삶이 생각나는 걸까요? '을'의 절박함을 모르는 '갑'들의 경제발전이니 정치안정이니 하는 논리들 때문에 깊은 좌절감을 느껴야 하는 미생들의 삶 말입니다. '그렇게 큰 걸 바라는 게 아닌데, 갑님들의 그 큰 손을 좀 만 흔들어 을을 꼼짝 못하게 하는 잘못된 관행들을 끊어달라는 건데 갑님은 본 척도 안하시네요'라고 자꾸 귓전에 울리는 것 같습니다.
몇 시간 후 점심때가 되었는데 곰은 무당벌레가 있는 곳을 또 지나가게 됩니다. 거미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무당벌레는 곰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소리칩니다. 자기를 구하러 돌아왔냐고요. 곰은 그게 아니라 여자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합니다. 다시 구해달라고 하자 곰은 미안하지만 역시 널 살려줄 수 없다고 말하지요. 무당벌레는 나름의 꾀를 냅니다.
"아하, 그렇군요. 제 생을 여기서 이렇게 마감해야 하다니. 애벌레로 땅 속에서 칠 년 동안 지내고 나와 이제 멋진 날만 펼쳐질 거라 생각했는데...""그건 매미 이야기 아니야?"무당벌레가 무리수를 두었네요. 얼굴이 붉어진 무당벌레는 아무 말도 못하고 곰은 또 이내 사라집니다. 무당벌레를 떠나며 곰은 이렇게 자신을 변론합니다. '어설픈 아첨은 그만 안녕. 난 그저 자연의 일부이자 방관자. 무리한 부탁은 그만 안녕. 성냥불 하나가 온 산을 다 태우는 법. 거짓말 하는 너는 그만 안녕. 자연은 위대해. 모든 걸 다 꿰뚫고 있지. 누군가는 거미에게 먹히는 것도 자연의 법칙. 올 여름 통통하게 살찐 거미가 사악한 모기들을 막아주기를.'
절박해진 무당벌레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거짓말'이라는 수단을 사용합니다. 이 선택은 무당벌레를 더 궁지에 몰아넣는 결과를 가지고 오지요. 곰에게 '구해주지 않을' 더 큰 구실을 만들어 준 셈이 되었으니까요. 거미가 금방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무당벌레는 다시 절망의 거미줄에 홀로 남게 되었습니다.
힘없는 을들이 저지르게 되는 '흔한 실수'를 무당벌레가 저지른 듯 합니다. 그리고 다시 저녁이 됩니다. 곰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무당벌레를 만납니다. 무당벌레는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애원을 합니다.
"저 좀 살려 주시면 안 될까요?""아까도 말했잖아. 너를 놔주면 거미가 굶을 거야. 거미는 좋은 동물이야."이번엔 곰이 무리수를 두었네요. 좋은 동물이라니요. '좋다', '나쁘다'의 기준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요? 순전히 그 기준은 말하는 그에게서 나오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곰은 말합니다. 자기는 모기를 아주 싫어하고 거미가 모기를 처리해주니 좋은 동물이라고요.
무당벌레는 곰에게 묻지요. 거미만 좋은 동물일까 하고요. 그리고 곰이 꽃을 좋아하는지 묻습니다. 곰은 꽃을 싫어하는 동물은 없다고 말합니다. 무당벌레는 드디어 의기양양하게 말합니다.
"그럼 저도 좋은 동물이에요. 거미님은 못된 모기를 잡지만 저는 꽃을 못살게 구는 진딧물을 잡아먹어요." 그리고 다시 말하지요. "만약 저를 살려 주신다면 다음 해에 수많은 꽃들을 보실 수 있을 거예요."
어떻게 되었을까요? 곰은 정말 곰답게 '곰곰이' 생각에 잠깁니다. 그리고 얼마 후 숲의 적막을 깬 것은 망가진 거미줄에서 거미가 씩씩대는 소리였지요. 겨울이 지나고 다시 봄이 왔을 때 곰은 꽃들이 만발한 들판 가운데서 여자 친구와 데이트를 즐겼습니다.
이야기가 참 절묘합니다. 살아남기 위해 때로는 애원하고 거짓말도 하지만 결국 상대의 허점을 기막히게 간파하여 살아남는 무당벌레의 기지에 왠지 모를 통쾌함을 느낍니다. 거미와 무당벌레 사이를 묵직하게 오가며 온갖 거창한 이유를 들이대지만 결국 자신에게 돌아올 이점을 가늠해보는 곰의 모습도 고개를 끄덕이게 되지요.
무슨 일이든 자신에게 이로운 것을 선택하기 마련인 인간의 속성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당벌레는 곰 덕분에 살아남지요. 갑의 손짓 하나에 생사가 달린 을의 미약한 삶이지만 갑은 할 수 없는 세상의 소중한 일을 무기 삼아 살아남았습니다.
우리들 삶도 이렇게 절묘합니다. 나에게 좋은 일이 타인에게 좋지 않을 수도 있고, 나에게 좋지 않은 일이 누군가에겐 기막히게 좋은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곰이 만난 삶의 양면성을 우리도 일상처럼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순간에도 자비를 놓지 마시길! 꽃을 선물 받게 될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