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70) 전 대법원장이 지난 2015년 8월 박근혜 대통령 독대 시 상고법원 법관 임명에 관한 대통령 권한을 다룬 문건을 들고간 것으로 드러나 '사법부 블랙리스트' 파문이 온 나라를 강타하고 있다. 이런 양승태의 사법부 독립성 파괴행위에 대해 평화당 박지원 의원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대국민 사과하고 검찰 조사를 받으라"고 촉구했고, 민주·평화·정의 3당은 "양승태의 '재판거래'에 경악하며 수사가 필요하다"며 강력하게 비판했다.
"나무는 그 열매로 안다"는 말이 있고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는 말이 있다. 지난 시절 양승태씨가 판사로서 주요 시국사건에 대해 어떤 판결을 내렸는지를 검토해보는 일은 지금 양승태씨가 초래한 사법부 독립성 침해사건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양승태 전 대법관은 지난 1970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이듬해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법관으로 임용되어 1975년 11월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로 근무를 시작했다. 그는 박정희 유신정권시절인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서울지방법원 판사로 재직하면서 12건의 긴급조치 재판에 관여하였다.
특히 그는 서울형사지법 판사로 재직 중인 지난 1976년 재일교포간첩조작 사건인 김동휘 사건, 이원이 사건, 장영식 사건, 조득훈 사건에 배석판사로 참여하여 유죄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이 네 사건은 후에 재심에서 모두 무죄가 선고되었다. 이 조작간첩사건이 어떻게 무고한 재일교포 청년들의 삶을 파괴했고, 그 과정에서 양승태 판사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살펴보자.
36년 만에 무죄판결을 받았지만....김동휘 사건은 1975년 10월에 일어난 사건으로, 그는 1954년 일본에서 출생, 성장하였다. 그는 1973년 3월 모국 유학차 입국하여 서울대학교에서 2년간 한국어교육을 받고, 1975년 3월 서울 가톨릭 의과대학에 입학, 1학년에 재학 중이던 1975년 10월 13일 중앙정보부 남산분실에 연행되어 야만적인 고문을 통한 조사를 받고 그해 11월 20일 서울지검에 송치되어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죄로 기소되었다.
그 다음해인 1976년 4월 30일 1심인 서울지법에서 김동휘씨는 징역 5년을 선고받고 항소하였다. 같은 해 8월 31일 서울고법에서 김씨는 1년이 감형된 징역 4년을 받고 상고하였다. 그러나 그해 12월 14일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고 결국 그는 억울하게 4년을 감옥에서 살았다.
지난 2010년 5월 18일 진실화해위원회는 김동휘 사건에 대해 불법구금, 가혹행위 등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하고 재심 등을 권고하였다. 그리고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법원에 재심을 청구하여 김동휘씨는 지난 2012년 5월 24일, 36년 만에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20대의 젊은 나이에 모국에 유학와서 모진 고문과 조작 끝에 판사 양승태로부터 '간첩' 판결을 받고 감옥에서 망가진 몸과 인생은 어떻게 보상 받을 수 있겠는가.
1970년대와 1980년대 판사 양승태가 판결한 6건의 조작간첩사건에서 이미 2건(강희철 사건, 김동휘 사건)에 대해서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었고, 다른 4건의 간첩조작사건 피해자들도 지금 재심을 준비 중이다.(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2017.2.16, <반헌법행위자 열전 집중검토대상자 명단발표 기자회견 자료집>, 65쪽)
사후에 무죄판결 받은 이원이 사건
재일교포 이원이 사건은 지난 1975년 부산대학교에서 발생한 반유신 데모 사건, 유인물 살포 사건이 발단이 되었다. 부산대에서 발생한 반유신 유인물 살포 사건을 추적하던 경찰은 재일교포 김오자씨와 이원이씨가 이 사건에 관련된 사실을 파악하고 이를 학생들의 반유신 운동을 넘어서 북한, 재일조총련과 관련된 간첩사건으로 조작했다. 당시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 김기춘은 단순한 반정부 유인물 살포 사건을 부산대학생 박준건, 김오자, 김정미, 이원이, 철학과 교수 하일민 등 모두 24명이 관련된 대형 간첩단 사건으로 조작해 발표했다.
이 사건으로 이원이씨는 당시 서울형사지방법원의 판결에서 5년형을 받았다. 5년 징역형을 마치고 지난 1981 출소 한 이원이씨는 불법구금과 고문 등 후유증으로 인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난 1999년 11월 대장암으로 그는 비극에 찬 생애를 마쳤다.
이원이씨 유족은 지난해 4월 이 사건에 대한 재심을 청구했고, 같은 해 11월 재심 개시 결정이 확정됐다. 그리고 사건 발생 43년 만인 올해 1월 26일 서울중앙지법 형사부는 국가보안법, 반공법 등 간첩 혐의로 지난 1976년 유죄를 선고받은 고인 이원이씨에 대한 재심 판결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고인의 ▲ 반국가단체 구성원과의 통신연락·지령에 의한 잠입 등 반공법 위반 ▲반국가단체 찬양·고무·동조 ▲ 군사목적수행 간첩 관련 혐의에 대한 공소 사실에 대해 모두 "혐의를 인정하기 부족하고 이를 인정할만한 증거 없다"고 판단했다. 특히 과거 고인이 체포당할 당시 "불법구금 상태에서 허위자백을 강요받은 정황이 엿보인다"라며 경찰·검찰의 피의자신문조서 등을 증거로 인정하지 않았다.
43년 만에 간첩 누명을 벗은 고인의 아들(34)은 선고 이후 "아버지가 평소 우리들한테 힘든 티도 잘 안내고 버티시느라 너무 힘드셨을 거 같다"며 "하늘에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개인적으로는 내가 간첩의 아들, 그리고 내 아들이 간첩의 후손이라는 오명을 벗은 게 가장 기쁘다"며 감회를 밝혔다.
장영식씨는 1949년 5월 12일 일본에서 출생, 일본 주오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1974년 모국에 유학와 서울대에서 1년간 공부한 뒤 1975년 4월 서울대 대학원 법학과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그해 9월 일본에 갔다 한국에 돌아온 장씨는 정보기관에 체포되어 재일조선인유학생동맹 활동 및 조총련 공작원으로부터 정보수집 지령 등 간첩활동 혐의로 모진 고문수사를 받은 후 서울지검에 의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등으로 기소되었다.
다음 해인 1976년 5월 7일 장영식씨는 서울형사지법(재판장 심훈종, 판사 조용무·양승태)에서 징역 및 자격정지 3년 6월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다. 장영식씨은 같은 해 9월 6일 서울고법에서 일부무죄를 받고 상고하였다. 그리고 1976년 12월 28일 대법원에서는 무죄취지로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에 파기 환송하였다. 1979년 1월 14일 장영식씨는 서울고법 파기 환송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1심에서 3년 6월형의 유죄를 선고 받은 것에 대해 장영식씨는 양승태를 포함한 판사들에게 아무런 사과를 받지 못했다.
간첩조작사건에 유죄판결 내린 양승태 조득훈씨는 1951년 12월 29일 일본에서 출생 1971년 4월 오카야마 대학교 전자공학부에 입학, 1975년 3월 졸업하자마자 모국으로 유학와 서울대학교 재외국민교육연구소에 입소해 그해 12월 10일 수료했다. 조득훈씨는 일본에 있을 때 대학 재학 중 조총련계 인물들과 만나 북한관련 학습을 함으로써 반국가단체 성원들과 회합 통신하고 반국가 단체를 이롭게 하는 등 간첩행위를 했다는 혐의로 보안대에 체포돼 무자비한 고문과 조사를 받은 후 서울지검에 의해 국가보안법 위반, 간첩 혐의 등으로 기소되었다.
1976년 6월 8일 조득훈씨는 1심인 서울지방법원(재판장 심훈종, 판사 조용무·양승태)에서 징역 및 자격정지 각 10년씩을 선고받고 항소하였다. 그리고 그해 10월 25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징역 및 자격정지 각 7년을 선고받았다. 조득훈씨는 이에 불복하여 상고하였으나 1977년 2월 8일 대법원에 의해 상고가 기각되어 7년형을 확정 받고 징역을 살다가 지난 1981년 8월 특사로 가석방되었다.
석방 후 조득훈씨는 재심청구를 하여 38년 만인 지난 2014년 9월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당시 김종근 판사는 "조씨가 혐의를 인정한 진술서는 15일간에 걸친 불법감금 중 며칠 동안 잠을 못 자게 하는 등 고문과 협박에서 비롯된 허위자백 요구의 결과라며 증거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또한 "다른 증거도 없다"며 "범죄사실이 날조됐다"고 인정했다.
판결 후 조득훈씨는 "이번 판결은 한국의 민주화가 낳은 하나의 성과라고 생각한다. 조국을 생각하는 재일한국인의 마음을 법원이 받아들여줬다"고 말했다. 1970년대부터 조득훈씨 명예회복과 구제운동을 지원한 일본 지인들도 이날 법정에서 재판을 방청한 후 무죄선고가 나오자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이들 간첩 사건 이외에도 서울지법에 근무할 당시 1975년 심지연, 최열, 이명준 등 대학생들, 1975년 이부영, 성유보 등 전 동아일보 기자, 1977년 이혜경, 배경순, 고광순 등 여대생들의 재판에 배석판사로 참여하여 12건의 긴급조치 사건에서 유죄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이 사건들도 나중에 재심에서 다 무죄로 판결되었다.
또한 양승태씨는 대법관으로 재직 중이던 지난 2007년 5월 독재 정권시절 학내 비리로 퇴진한 김문기 전 상지대 이사장이 "정부가 임명한 임시이사들이 정식이사를 선임한 것은 무효"라며 낸 소송에서 김씨의 손을 들어줬다.
이외에도 양승태는 지난 2009년 1월 20일에 일어난 '용산철거민 과잉진압 사망사건' 관련자 재판에도 관계가 있다. 2009년 10월 28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재판장 한양석)는 농성장 망루에서 화염병을 던져 진압에 나선 경찰특공대원 1명을 숨지게 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이충연씨 등 2명에게 징역 6년을 선고했다. 다음해인 2010년 5월 31일 항소심 재판부인 서울고법 형사7부(재판장 김인욱)는 이충연씨 등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다. 이어서 그해 11월 11일 상고심 대법원 2부(주심 양승태 대법관)는 항소심 형량을 그대로 확정했다.(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2017.2.16, <반헌법행위자 열전 집중검토대상자 명단발표 기자회견 자료집>, 246쪽)
그러나 위와 같은 개별 사건 외에도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반헌법적 행위가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대법원장 시절(2011년 9월부터 2017년 9월까지)이라 할 수 있다. 양승태는 대법원장 시절 박근혜 정부의 주요 관심 사안이었던 원세훈 국정원장의 제18대 대선 불법개입 사건 재판에 대한 정권의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 당시 법원의 최대 관심 사안이었던 '상고법원' 도입 등을 얻어 내려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행정부, 정치권력과의 밀착 또는 부당거래를 통해 법원의 이해관계를 얻어내려는 이런 시도는 사법부의 독립성을 대법원장이 스스로 저해하는 중대한 반헌법적 행위라 할 수 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게 사법적 단죄가 필요한 이유
특별히 양승태씨는 지난 2016년 12월 박근혜 정권에서 대법원장인 자신을 사찰하자 "중대한 반헌법적 사태"라며 반발했다. 그런 그가 뒤로는 법원의 판사들을 사찰한 의혹을 받고 있는 것이다. 1970년대 박정희 독재정권시절 12건의 긴급조치 사건에서 자신이 유죄판결을 내린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지난 5월 25일 김명수 대법원장 취임후 구성된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관련 특별조사단' 조사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양승태 대법원은 과거 유죄판결을 내린 1970년대 긴급조치 사건과 관련하여 '긴급조치 배상 판결'을 내린 판사들에게 불이익을 주려고 시도했다는 정황이 드러나 충격을 주고있다.
박근혜 정권 국정농단사건으로 지금 감옥에 있는 김기춘과 양승태는 경남고 선후배 사이다. 지난 1970년대 박정희 유신정권 아래서 이른바 '학원침투 북괴간첩단사건'은 중앙정보부에 있던 선배 김기춘이 조작하고 법원에 있던 후배 양승태가 조작사건에 대해 합법성을 마련해준 헌법과 민주주의를 파괴한 심각한 불법행위였다.
더욱이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사법부의 민주적 운영과 독립성을 요구하는 판사들의 당연한 활동을 억누르고 통제하기 위해 인사상의 불이익을 계획하는 등 직·간접적 압력을 행사한 정황이 확인됐다. 나아가 그는 자신에게 비판적인 판사들의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그들의 활동과 동향을 조직적으로 감시하고 사찰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양승태씨는 누구보다 사법부의 독립성을 지키고 민주적 운영을 책임져야 할 대법원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법부 수장으로서 결코 해서는 안 되는 반민주적인 행위를 서슴없이 해왔다. 이는 가장 심각한 반헌법적 행위로, 이러한 양승태씨에게 도의적 책임을 묻고 사법적 처벌을 하는 것은 어찌보면 민주국가에서의 당연한 조치라고 확신한다.
* 이 기사를 위해 소중한 자료를 제공해 준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한홍구 교수와 임영태 조사위원에게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