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비혼, 돌아온 비혼, 자발적 비혼 등 비혼들이 많아진 요즘, 그동안 ‘비혼’이라는 이유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가 조금 더 또렷하고 친절하게 비혼의 목소리를 내고자 용기를 낸 40대 비혼의 이야기입니다. [편집자말] |
한 달 전쯤, 후배와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 테마는 퇴직기념 여행. 나야 직업이 프리랜서 작가이니 따로 퇴직이라는 게 없지만, 후배는 경제적인 이유로, 또 일이 좋다는 이유로 48살이 될 때까지 어린이집 원감으로 일하고 있었다.
일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은 월급, 크고 작은 사고들에 늘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작업 환경. 저러다 과로사하겠다 싶은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몸에 피곤을 달고 살던 후배는 급기야 당뇨병에 걸리고 말았다. 나를 비롯해 주위에서 좀 쉬라고 권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경제적인 이유도 있고, 타고난 바지런한 성격 탓에 마음 편히 노는 성격이 못 되었던 탓이다.
퇴직기념 여행을 떠나다남편의 회사가 증평으로 이전하면서 3년 동안 주말 부부를 불사했는데, 김포와 증평을 오가던 후배는 얼마 전 백기를 들었다. 몸은 수명을 다해가는 휴대폰 배터리마냥 방전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지만 공연히 눈치가 보이고, 그렇다고 일터에서 사정을 알아줄 리는 만무하고. 더 이상 버티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하고 결국 퇴직을 결정한 것이다. 하지만 일을 좋아하고 돈도 필요한 현실 속에서 후배는 계속 뒤를 돌아보며 불안해했다.
"언니, 내가 증평에 내려가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요?""찾아보면 다 있어. 너무 걱정하지 마."나도 글 쓰는 일만으로는 먹고 살기 힘들어서 노후를 위해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형편인데, 주제에 넘는 위로를 했다.
"과연 나를 써주는 사람이 있을까요?" "너 같은 사람을 안 쓰면 그 사람이 손해지."그렇게 위로했지만 공기처럼 흩어지는 말이었다. 앞으로야 어찌 될지 우리는 알 수 없는 일. 그래도 일단은 퇴직을 기념해 주고 싶었다. 취직을 하면 축하하고 다들 기뻐하는데 퇴직을 하면 마땅히 위로할 말도 찾기 어렵고, 희망 담긴 격려를 하기에도 어색하다. 오랜 시간 애쓴 시간들에 비해 초라하고 쓸쓸한 퇴직의 모습이 늘 못마땅했다. 어찌 보면 가장 응원과 격려, 축하가 필요한 때인데 말이다.
그래서 취직을 했을 때처럼 즐겁게 기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배한테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단숨에 오케이. 그래서 퇴직기념 여행을 작당했다. 장소는 일본의 소도시인 오카야마와 구라시키. 그리고 지인이 추천해 준 나오시마로 낙점.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이 나오시마다.
가가와현의 나오시마는 '예술의 섬'이다. 배를 타고 섬마을에 들어서면 이 섬의 상징인 빨간 호박이 관광객을 반긴다. 에도시대에 지어졌다는 오래 된 집들은 예술가들에 의해서 멋진 작품으로 재탄생했다. 무엇보다 이 섬의 백미는 바다를 캔버스 삼아 세워진 건축미가 도드라진 미술관들. 미술관 외부의 아름다움은 물론, 그 안에 있는 작품들까지 모두 압도적으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나오시마는 나름 사연이 있는 섬이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구리 제련소가 있던 세토내해의 투박하고 외면 받았던 섬. 금속제련 공장 때문에 자연은 황폐해졌고, 젊은이들이 떠나면서 빈 집이 많았던 섬. 그랬던 이 섬에 1989년부터 예술인들의 손길이 닿으면서 변신은 시작된다.
나오시마 섬을 살리기 위한 나오시마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교육 기업 베네세의 후쿠타케 소이치로 회장과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가장 염두에 둔 것은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현대 미술과 더불어 '노인이 웃는 얼굴로 살 수 있는 지역을 만들어 보자'는 데 의기투합했다. 안도 다다오는 아름다운 풍경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지형을 따라 땅에 묻힌 듯한 미술관을 지었다.
미술관 절반은 땅에 있고 땅위로 솟은 부분은 빛이 들어오는 구조다. 미술관 곳곳에 배치된 모네, 월터 드 마리아, 제임스 터렐의 작품들은 자연의 빛과 어우러져서 오묘한 아름다움을 뽐낸다. 그래서 자연 속에서 예술 작품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작품이 미술관 안에 갇히지 않고 자연 전체와 어우러져 있다는 것을 보여준달까.
이런 기획의도에 맞게 섬 전체는 변하기 시작했다. 예술가들이 주민들과 협력해 작품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 돌아다녀 보니 마을 곳곳이 하나의 예술 작품이었다. 오래된 편안함, 아름다움을 뽐내지 않는 겸손함, 그럼에도 숨길 수 없는 고상한 아름다움. 우리는 나오시마의 매력에 푹 빠져서 많이 웃고 많이 감탄하고 많이 감동했다.
아름다움은 고유의 서사가 있을 때 비로소 빛을 드러낸다. 나오시마가 남다르게 느껴진 건, 그 섬이 갖고 있는 이야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떠나고, 외면받는 오래된 섬의 변신과 부활. '사람'을 염두에 둔 재생 프로젝트, 제련소의 섬에서 예술의 섬으로 다시 태어난 섬의 이야기가 어쩐지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던 건, 오십을 바라보는 쓸쓸한 중년의 희망을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면서 사람도 일도 하나씩 떠나가는 나이. 그 쓸쓸함을 꿀꺽 삼키면서도 자꾸만 누가 나를 봐줄까, 누가 나를 써줄까 하면서 자신의 쓸모에 대해서 의심하게 되는 지점. 바로 거기서 만난 나오시마는 왠지 우리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용기를 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후배가 증평이라는 작은 마을에 가서 나오시마처럼 그곳을 빛내기를 바란다. 외면 받는 투박한 섬 같은 40대에도 어떤 이의 손길이 닿는가에 따라 충분히 변신할 수 있는 거니까.
자체 재생 프로젝트 가동중인 우리 모두에게 응원을!
여행을 다녀온 지도 한 달이 되어 간다. 종종 업데이트되는 후배의 근황은 흥미롭다. '백수'라는 새로운 신분에 적응하지 못해 오락가락하면서도 아르바이트를 하고, 교회에서 소소한 봉사활동도 하는 등 자체적으로 재생 프로젝트를 가동 중이다.
엉덩이를 두들겨주고 싶을 정도로 기특하다. 화려한 변신은 아니어도 그녀의 애씀이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스스로 희망이 될 거란 확신이 든다.
너나할 것 없이 자신의 존재와 쓸모를 인정받기 위해 가상한 노력을 하는 시대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인정에 휘둘리는 자아는 피로감과 무기력함의 쳇바퀴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다짐하듯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북돋아주고, 우리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자고 후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사회적 죽음을 맞이하고 등 떠밀리듯 새로운 지점에 서야 하는 중년에게 하고 싶은 말이자, 스스로에게 보내는 응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