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실전, 여행도 실전. 여행에 대한 막연한 환상보다 안전하고 당당한 여성의 여행법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혼자 하는 여행뿐 아니라 모든 여성 여행자가 당당하고 안전하게 여행을 지속할 수 있는 세상을 꿈꿉니다. - 기자 말남성의 보호가 필요없는 여성들이 등장하다
여성들이 본격적으로 길을 떠나기 시작한 19세기는 제국주의와 팽창주의가 세상을 뒤흔들던 시대였다. 그리고 그 시절 여성여행자들의 상당수는 유럽 중상류층의 가정에서 교육받은 여성이었다. 그렇다고 여성이 혼자 세상 밖으로 나가도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당시 코르셋으로 신체와 정신을 압박받던 여성은 히스테리적이고 병약한 존재로 여겨졌다. 여성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은 간호사, 작가, 가정교사가 전부였다. 대부분의 여성은 가정을 벗어나지 못하고 남성의 보호를 받으며 예속적인 삶을 사는 것이 당연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사는 여성들은 언제나 있었다.
여성이 길을 떠난 이유 당시 여성들이 길을 떠나게 된 배경은 다양하다. 프레야 스타크이나 거트루드 벨처럼 어려서부터 리처드 버튼이나 찰스 다우티 등의 탐험기를 읽으며 먼 곳으로의 동경을 키운 여성들이 많았다. 이사벨라 버드의 경우에는 지병으로 인한 요양이 여행의 시작이었다. 이다 파이퍼나 메리 킹슬리처럼 가족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중년이 넘어 끝끝내 자신만의 길을 떠난 경우도 있었다.
떠남의 배경은 각기 다양했지만, 그 시작은 언제나 다른 세상에 대한 동경과 열정이었다. 이다 파이퍼는여행의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것에 강한 열정을 품고, 시인이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풀어놓듯, 나는 세계를 보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혀 다녔다. 여행은 내 젊은 날의 꿈이었고, 나이가 들어서는 내가 본 것을 떠올리는 기쁨이 되었다." (이다 파이퍼, <한 여인의 세계여행> 서문에서)
여행하는 여성에 대한 당대 남성들의 공포여성들이 독자적으로 여행을 하면서 가장 많이 한 활동은 저술활동이었다. 많은 여성들이 여행을 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모험담을 글로 써서 남겼다. 사명감 때문이기도 했고 여행경비를 마련하기 위한 활동이기도 했다. 초기 여성 여행자들의 여행기는 무명으로 출판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19세기 중반이 되면 전업 작가로 인정받는 작가들이 생겨난다.
여성여행자의 여행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슈였고, 남성여행자의 다른 섬세한 접근법이나 문체로 인기를 끌기도 했다. 하렘처럼 남성은 접근 할 수 없는 공간에 드나들 수 있다는 것도 여성만의 강점이었다. 무엇보다 많은 여성들이 그 여행기들을 통해 여성도 독자적으로 여행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아직 지도가 그려지지 않은 지역으로 떠나 빈 공간을 채워오거나 고고학적 탐사를 진행했던 여성들의 활약도 공식적인 인정을 받기 시작한다. 이사벨라 버드는 여성은 회원으로 인정하지 않던 영국왕립지리학회의 최초 여성회원이 되었다. 메리 킹즐리는 스코틀랜드 왕립지리학회의 회원이었고, 이다 파이퍼는 베를린 지구과학학회의 회원이었다. 거트루드 벨은 아랍여행 후 아랍전문가가 되어 영국군 정보 장교로 근무하게 된다.
그럼에도 여성이 여행을 한다는 것은 온갖 중상모략과 평가절하의 온상이 되었다. 앞서 언급한 거트루드 벨은 영국여성 최초로 백서(白書)인 <메소포타미아 행정보고서>을 썼지만 이에 대해 남성들은 "개가 뒷다리로 섰다"라며 폄훼했다.
영국인 외교관 마크 사이크스는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 거트루드에 대한 격양된 감정을 쏟아내기도 했다.
"어리석고, 오만함으로 가득 차 있고, 감정적이고, 가슴도 납작한데다, 남자 같고, 세계여행이나 하고, 엉덩이나 흔드는 빌어먹을 여자 같으니!"이사벨라 버드 역시 엉뚱하게 치마논란에 휩싸였다. 그녀가 여행 중에 바지를 입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당시엔 여성이 바지를 입는다는 것은 다리의 형태를 노출하는데다 남성성의 상징을 빼앗는 부적절한 행동으로 여겨졌다. 이런 논란은 그녀의 업적을 깎아내리기 위해 제기된 것이었다.
여기에 대해 이사벨라 버드는 발끈하며 자신이 치마를 입고 여행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진을 제시했다. 그런 시대였다. 여성이 어떻게 홀로 세계를 탐험했는지 보다, 사회의 상식에 맞게 치마를 입었는지가 더 중요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다보니 이사벨라 버드와 동시대 인물인 영국의 정치가 조지 커즌이 "여자라는 사실과 여자들이 받는 교육은 탐험에 적합하지 않다. 미국이 최근에 보급시키고 있는 전문적인 세계 여성 여행가들은 다음 세기와 19세기말의 공포중 하나다" (바바라 호지슨, <세상에 못갈 곳은 없다>중) 라며 여성여행가들에 대해 반감을 보인 것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감히 여성이 겁도 없이 사막을 탐험하고 (헤스터 스탠호프, 거트루드 벨, 프레야 스타크, 로지타 포브스 등), 원주민과 스스럼없이 교류하고 (이다 파이퍼, 메리 킹즐리, 메이 프렌치 셀던 등), 바지를 입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남장을 하기도 하고(제인 듀라포이, 이자벨레 에버하르트 등), 남성용 안장에 앉아 다리를 쩍 벌리고 말을 타고 다니는 모습(루이자 제브, 이사벨라 버드 등)이라니...! 당시 남성들에겐 얼마나 '공포'스러운 일이었겠는가.
이번 지면을 빌어 간략하게나마 당대 남성들에게 '공포'를 불러 일으켰던 여성 여행자들의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그들이 왜 길을 떠났고, 길에서 무엇을 발견했으며, 어떻게 경계를 허물 수 있었는지.
19~20세기 초 여성 여행자들은 누가 있을까? 1. 이다 파이퍼 (1797-1858, 오스트리아) 1797년 비엔나의 부유한 상인의 집에 태어나 아버지의 비호 아래 남자아이와 동등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망 후 어머니로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게 되고 1820년 어머니의 뜻대로 24살 많은 남성과 원치 않는 결혼을 한다. 고통스런 결혼 생활이 끝나고 자녀들이 분가하자 이다 파이퍼는 유언장을 작성한 후 43살의 나이로 홀로 팔레스타인으로 떠난다. 그 후 그녀는 타히티, 남미, 페르시아, 북극, 중국, 아이슬란드 등 전 세계를 여행하며 자연연구가로 일했고, 베를린 지구과학학회 명예회원이 되었다.
출발 당시부터 이미 당시 기준에선 할머니였지만 '나이 많은 여성'이라는 점은 그녀의 여행에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오히려 수마트라섬에서 식인종 바타크족을 만났을 때 그녀는 "내 고기는 너무 오래 돼서 질기고 맛이 없을 거다"라는 농담으로 그들의 환심을 샀다.
1858년 사망할 때까지 그녀는 지구의 8바퀴를 도는 길이의 여행을 했고,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는 이다파이퍼의 여행기를 참고로 했다고 한다. 그녀가 죽었을 때 당대 신문들은 '중세마녀의 기적'. '여자 옷을 입은 남자'라고 일컬었다.
2. 이사벨라 버드 (1831~ 1904, 영국) "나는 이사벨 버드 비숍 여사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 1893년에 조선을 처음 방문한 영국왕립지리학협회 회원이다 그녀는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세계로 화하는 극적인 서울을 보았다 이 아름다운 시간에는 남자로서 거리를 무단통행 할 수 있는 것은 교군꾼, 내시, 외국인의 종놈, 관리들뿐이다 그리고 심야에는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가 다시 오입을 하러 활보하고 나선다고 이런 기이한 관습을 가진 나라를 세계 다른 곳에서는 본 일이 없다고 천하를 호령한 민비는 한 번도 장안외출을 하지 못했다고-김수영, <거대한 뿌리> 인용김수영의 시에 등장한 이사벨라 버드는 1831년 영국국교회 목사의 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해서 누워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그녀는 의사로부터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는 요양여행을 권고 받고 이것이 여행의 시작이 되었다.
오늘날이었다면 이사벨라 버드의 증상은 재능과 개성이 넘치는 여성이 돌파구를 찾지 못해 생겨난 '스트레스성 질환'이라고 이름붙였을 것이다. 하와이로 떠난 그녀가 활기를 찾은 것은 승마 덕이기도 했다. 영국에서는 여성용 안장에 한쪽으로 불안정하게 앉은 후 말을 달리곤 했는데, 하와이에서부터는 여행용 치마바지를 입고 남성용 안장을 타고 신나게 말을 달렸다.
그녀는 <미국에 간 영국여인>이라는 책을 출판하며 전업 작가의 길을 걷게 된다. 62세의 나이에 한국과 중국을 여행했고,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그녀는 평생 호주, 하와이, 북미, 인도, 러시아, 티베트, 중국, 이집트, 말레이 반도. 페르시아 등을 여행했다. 1892년에는 남성의 큰 저항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왕립지리학회에 최초 여성회원이 되었고, 그녀는 '여성의 일을 인정하게 된 결정에 감사한다'며 간략히 소감을 밝혔다.
3. 메이 프렌치 셀던 (1847-1936, 미국)1847년 미국 펜실바니아에서 태어났다. 미국 아프리카 탐험대를 이끈 최초의 여성이다. 탐험 당시 43살이었다. 1891년 그녀는 138명의 현지인을 고용해 동아프리카 35개의 아프리카 부족을 방문했다. 그녀가 출간한 책 <술탄에서 술탄으로>에 따르면 그녀는 킬리만자로 산기슭에서 마사이족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번쩍이는 무대 의상을 입고 금발 가발을 썼다. 심지어 조명로켓까지 터트렸다고 한다.
그렇게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백인여왕으로 깊은 인상을 준 그녀는 베베 브와나(Bebe Bwana, 레이디 보스로 번역된다)'로 불렸다. 지리학과 인종학에 큰 영향을 미쳤고 1892년 '런던 왕립지리학회' 회원이 되었다.
4. 메리 킹슬리 (1862~1900, 영국)1862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의사였던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자주 집을 비우고 여행을 떠났고, 고정관념이 강한 어머니 아래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자라났다. 그 대신 아버지의 서재에서 책을 읽으며 꿈을 키웠다.
1893년 부모님이 모두 사망하고, 더 이상 무능한 남동생을 돌볼 필요가 없게 되자, 가족에게서 해방된 그녀는 아프리카로 여행을 시작한다. 아프리카에서도 그녀는 영국 빅토리아 시대풍 긴치마와 양산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프리카 사람들에 대한 그녀 나름의 예의였다고 한다.
아프리카의 식인 부족과 교류했으며, 식인풍습이나, 마녀사냥 풍습 등을 근절시키고자 노력했다. 또한 그녀는 서양선교사들이 흑인을 열등하게 취급하는 것에 분노하며 아프리카인에게는 그들의 문화가치와 권리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서아프리카에 대한 책을 두 권 출판했으며, 보어 전쟁의 부상자를 간호하다 39살의 나이에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5. 거트루드 벨 (1868~1926, 영국) 거트루드 벨은 1888년 옥스퍼드대학에 입학하여 여성 최초로 학사취득자격시험을 통과했다. 하지만 당시 여성에게 학위를 주지 않았기에 학위는 없었다.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을 지녔으며 마터호른을 비롯한 알프스의 산들을 올랐다.
현재 스위스 엥겔호른 제 5봉은 최초 등반가인 그녀의 이름을 따서 "거트루드 봉"이라고 불린다. 아랍어, 터키어 등에 능통하였으며 아라비아를 여행하며 다양한 고고학적 발굴을 했다. 1914년엔 2,400 km에 달하는 아라비아 중부사막을 낙타를 타고 횡단하기도 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국의 여성정보장교로 근무하며 아랍전문가로 인정받았다. 그녀는 이라크와 요르단의 국경을 그은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라크를 가슴 깊이 사랑했고 늘 아랍인들의 편에 서고자 했지만, 불행히도 그 국경선은 오늘날 중동 분쟁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2015년, 그녀의 삶을 다룬 영화 <퀸 오브 데저트(Queen of the Desert)〉가 개봉되었다.
6. 알렉산드라 다비드 넬 (1868~1969, 프랑스) 19세기 티베트는 금단의 땅이었다. 가기도 험했고 오랜 쇄국정책으로 외국인의 입국을 허용하지 않던 시기였다. 유럽 여성으로 최초로 라싸에 도착한 것은 프랑스 여성 알렉산드라 다비드 넬이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방랑벽이 있었고 정신세계에 심취했으며, 오페라 가수로도 활동했다. 1912년 그녀는 남편에게 19개월 정도 인도를 여행을 하고 오겠다고 했으나 그들이 다시 만난 건 14년 후였다. 남편은 여행 동안 그녀의 든든한 지지자가 되었다.
알렉산드라 다비드 넬은 1913년 칼림퐁에서 제 13대 달라이라마를 만나 인터뷰 하고, 티베트 승려 용덴을 양자로 삼아 함께 여행했다. 그들은 일본, 한국, 중국을 여행했으며, 검문을 피하기 위해 티베트 걸인으로 위장한 채 1924년 티베트 라싸에 도착했다. 그녀는 티베트 불교를 서양인에 맞게 풀어 설명했고, <라싸로의 여행>, <티베트의 마술사와 신비주의자> 등을 출판했다.
7. 프레야 스타크 (1893~ 1993, 영국)태어날 때는 꽤 허약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어머니가 운영하던 수건 공장에서 머리카락이 기계 사이에 끼이는 사고를 당한 후, 평생 흉터를 머리카락으로 가리며 살았다. 그녀는 이탈리아에서 레바논 출신의 수도사를 찾아가 아랍어를 배우고, 자신만만하게 레바논으로 향한다. 그리고 전시법하에 있던 시리아의 드루즈지역을 여행한다.
그 후 페르시아어 공부를 해 고대 암살자 집단으로 알려졌던 아사신파의 요새를 찾아 엘브르즈산으로 떠난다. <암살자들의 계곡에서> 등 총 30여 권을 책을 썼으며, 1972년 영국여왕으로부터 데임(여성 작위)를 받았다.
8. 김금원 (1817~?, 조선) 여성의 여행은커녕, 외출조차 자유롭지 않던 19세기 조선에도 여성여행자는 있었다. 김금원은 14살의 나이에 남장을 하고 금강산과 관동팔경, 한양 등을 유람했다. 그리고 1850년 자신의 여행기를 기록한 <호동서락기>를 썼다. 금원은 스스로 지은 호(號)고, 책에는 그녀 자신에 대해 확실히 적혀있지 않다.
훗날 학자들의 연구로 그녀가 원주기생 '금앵'으로 확인되었다. 종모법을 따르던 조선사회였으니, 어머니가 기생출신의 양반가 첩이고, 아버지는 딸의 여행을 뒷받침할 정도의 재력가라는 분석이 나온다. 금원은 15살 기적(妓籍)에 오르기 전에 절박한 마음으로 부모를 설득하여 여행길에 올랐던 것이다. <호동서락기>는 1925년 금강산을 찾은 독일인 베버 신부의 기행글에 언급될 정도로 후대에까지 인기를 끌었다.
20세기에 들어서며 여성 여행자들의 면면은 점점 다양해진다. 리비아 사막의 비밀 도시 쿠프라를 발견한 로지타 포브스(1890~ 1967, 영국), 북경에서 카시미르까지 원정을 한 엘라 마일라르트(1903~1997, 스위스), 자전거로 아프리카를 횡단한 더블라 머피(1931~ 현재, 아일랜드) 등이 있으며, 한국에는 나혜석(1896∼1948)이 용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파리로 출발하여 1년 2개월간 유럽을 여행했다.
여행 후, 무엇이 변했을까 여성이 지성과 재능을 지녔음에도 사회적 제약에 발이 묶여있던 19세기, 여행은 숨 막히는 공간을 탈출할 수 있는 탈출구였고, 여성들의 능력을 확인할 수 있는 무대였다. 길 위에 나선 여성들은 더 이상 사회의 인습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여행을 하며 그녀들은 자유로운 복장을 하기도 하고, 외국 남성들과 교류하거나, 아무 곳에서나 잠을 청하고, 새로운 문화를 만나며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독립적인 주체로 거듭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여행을 마친 후, 여성여행자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1908년 출판된 한 책에서 막 여행을 마친 여인의 심경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어제 밤엔 우리는 더럽고 고립되었으나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밤의 우리는 깔끔하고 사교적이지만, 자유롭지 못하다." (루이자 젭, <바그다드로 향하는 사막길>) 여행은 늘 즐겁지만은 않았다. 체력적인 한계를 경험하기도 하고, 불결한 위생상태에 놓이는 것은 물론, 때론 목숨을 위협당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어쩌면 여성여행자들에게 가장 힘들었던 것은 여행 자체보다, 고국에 돌아온 후 기존 사회에 적응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여행을 통해 여성 여행자들은 변했으나 그녀들이 살던 세상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글북>의 저자 키플링은 한 티파티에서 만난 메리 킹슬리를 이렇게 기억했다. 둘이 집으로 걸어오며 열광적으로 서아프리카의 식인풍습에 대한 대화를 나누던 중, 키플링은 메리에게 자기의 집에서 마저 이야기를 나누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처음엔 그러자며 동의했던 메리는 갑자기 뭔가가 기억난 듯 이렇게 말했다.
"오, 내가 여자라는 것을 잊었습니다. 미안하지만 그럴 순 없습니다."남성과 동등하게 혹은 남성보다 더 용감히 아프리카 대륙을 탐험했지만, 돌아와서는 미혼 여성이 따라야할 엄격한 예법을 지켜야했던 것이다. 아무리 그녀가 아프리카에서 식인부족 팡과 함께 지내고, 우산 하나 들고 하마랑 싸웠어도 말이다.
이사벨 버튼을 비롯한 많은 여성들이 여행 후의 자기 자신이 과거의 삶과 어울리지 않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상당수의 여성 여행자들은 평생 여행을 계속하거나, 집필이나 연구 활동을 하거나, 여행을 통해 다른 일을 찾으며 변화된 삶을 살았다. 여행을 경험한 여성들은 결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19세기 여성 여행자가 남긴 것 역사 속 남성 탐험가들의 도전은 정복으로 이어졌고 이에 따른 부와 명예는 많은 탐험가들의 동기가 되었다. 그러나 여성탐험가들에게는 애초에 이 부분이 아예 배제된 상황이었다. 정복하거나 파괴하지 않는 것- 바로 이것이 남성과 여성의 여행법의 근본적인 차이기도 했다.
여성들에게 여행은 새로운 세상의 발견과 사람과의 교류를 뜻했다. 많은 여성 여행자들이 존중으로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을 대했다. 거트루트 벨이나 프레야 스타크는 당대 남성들과 달리 유럽인들의 거주지가 아닌 그 지역 사람들과 거주하며 친분을 쌓아나갔다. 프레야 스타크는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여행가가 갖춰야 할 첫번째 덕목을
'자신의 기준과 맞지 않는 기준을 인정하고 자신의 가치관과 다른 가치관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렇게 여성들은 세상을 정복하지 않고 발견해냈지만 아직도 여성의 여행에 대해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들이 있다. 앞서 언급한 19세기 정치가 조지 커즌이 여성들의 여행을 '공포'스럽다 표현한 것처럼, 21세기인 지금도 여성들의 여행기엔 온갖 혐오성 댓글이 따라붙는다.
아직도 '여자는 집에서 살림이나 해라' 혹은 '여자는 유리그릇과 같아서 바깥으로 내돌리면 깨진다'는 말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면 19세기 여성 여행자들은 뭐라고 할지 궁금하다. 분명한 것은 아무리 이들이 여성의 여행을 폄훼해도 여성들은 더 넓은 세상에 도전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19세기 여성여행자들이 수많은 제약에 맞서 스스로 자신의 삶을 결정하고, 후대의 여성들에게 더 넓은 세상을 유산으로 안겨주었듯이.
지금도 여성의 여성에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리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행을 망설이는 여성들이 있다면. 19세기 조선의 여성여행자 김금원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여자는 세상과 단절된 채 깊숙한 규방에서 생활하고 있는 탓에 스스로 총명과 식견을 넓힐 기회를 갖지 못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아무 것도 세상에 남기지 못한 채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면, 그것이야말로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김금원, <호동서락기>중)* 참고자료: 여성여행자를 다룬 책과 영화
도서 <이사벨라 버드 > 이블린 케이 지음, 바움
도서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 이사벨라 버드 비숍 지음, 살림
도서 <정열의 방랑자 프레야 스타크> 제인 플레쳐 제니스 지음, 달과소
도서 <동방을 꿈꾸며> 바바라 호지슨 지음, 말글빛냄
도서 <여자 모험가들> 크리스텔 무샤르 지음, 기린원
도서 <길들일 수 없는 자유> 막달레나 쾨스터 외 지음, 여성신문사
도서 <세상에 못갈 곳은 없다> 바바라 호지슨 지음, 북하우스
도서 <조선여성 첫 세계 일주기> 나혜석 지음, 가갸날
도서 <호동서락을 가다> 최선경 지음, 옥당
도서 <백일 년 동안의 여행> 바바라 포스터 외 지음, 향연
도서 <영혼의 도시 라싸로 가는 길> 알렉산드라 다비드 넬 지음, 르네상스
영화 <퀸 오브 데저트> 베르너 헤어조크 감독, 니콜 키드먼 주연, 2015년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