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6일 그 날, 경교장의 총소리 1949년 6월 26일 낮 12시경, 서울 광화문 앞 사거리에서 서대문 방면으로 가는 통로에 있던 경교장. 해방 후 중국에서 돌아온 김구는 이때까지 이 건물을 숙소 겸 집무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곳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열의 독립 운동가들과 국내의 유력한 정치인들이 오가며 활발한 활동을 했던 정치의 요람, '서대문 경교장'이었다.
그날도 그는 집무실에 앉아 이미 분단된 조국의 현실을 어떻게든 되돌리거나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를 고민하였다.
이때 32세의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가 들어왔다. 한국 독립당 당원으로 비서진과도 어느 정도 안면이 있었던 그는 선우진 비서의 안내를 받아 2층에 올라왔다.
별일 없을 거라고 생각한 비서는 곧 내려갔다. 그리고 몇 마디 대화.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말끝에 안두희가 다짜고짜 총을 꺼내 들고 놀라는 김구의 얼굴을 보며 네 발을 순서대로 쏘았다.
"탕! 탕! 탕! 탕!"눈앞 정면에서 온몸에 네 발의 총을 맞은 김구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 했지만, 곧 피를 토하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두 발은 몸을 관통해 유리창을 뚫었고, 두 발은 폐와 아랫배를 관통했다. 옷은 붉게 물들었고, 얼굴과 가슴에서 책상으로 피가 쏟아졌다.
10대 시절 동학 농민군의 용맹한 '아기 접주', 20대 시절 일본인 쓰치다를 죽인 살인죄로 사형 직전까지 간 탈옥수, 30대 시절 애국 계몽 운동가이자 비밀 결사 신민회 회원, 40대부터 망명 독립운동가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킴이가 된 이후 임시정부를 끝까지 지키며 임시정부의 상징이 된 인물.
1937년 63세 때에 중국에서 조선혁명당원 이운환에게 권총 저격을 당했을 때도 혼수상태 끝에 살아났고, 임시정부 주석 시절 점심을 먹다가 주변에서 폭탄이 터져 흙이 도시락에 쏟아졌는데도 태연하게 "이게 무슨 소린고?"라고 했던 담대한 민족주의자 김구는 이렇게 허망하게 쓰러졌다.
김구와 안두희 대통령 선거를 비롯해서 무슨 선거 때마다 그를 존경한다는 후보자가 가장 많은 인물, 정말 존경하는 것인지, 그에 대해 얼마나 아는지는 모르지만, 정치인들이 그의 이름을 내세울 수밖에 없을 정도로 한국인들의 머리와 가슴에 깊이 새겨진 인물, 김구.
그의 생애는 오로지 조국의 독립과 자주 국가 수립을 위한 헌신에 바쳐졌다. 특히, 임시정부와 함께 한 그의 이력은 그와 임시정부를 거의 한 몸처럼 인식하게 만들었다.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한 이후, 임시정부의 분열과 자금난, 일제의 탄압 등에도 우직할 정도로 끝까지 임시정부를 지켰다. 결국, 1932년 한인 애국단을 조직,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 등 의열투쟁을 전개하여 임시정부를 본궤도에 올려놓았다.
일본이 건 거액의 현상금, 일본군과 경찰의 집요한 추적에도 한 번도 잡히지 않았던 그는 1940년대에는 이념을 뛰어넘은 좌·우 합작의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여 연합국의 일원으로 대일 전쟁에 참여하였다.
해방 이후 고국에 들어온 그는 경교장에 머물며 끝까지 분단을 막기 위한 자주적 통일 정부 수립을 추진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되었지만, 그는 분단된 민족의 미래는 없다고 보고, 현실의 변화와 상관없이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1948년 4월, 우익 민족주의자로서 자신의 신념을 깨고 남북 협상을 위해 평양에 간 것도 분단을 막기 위한 그의 노력 중 하나였다. 그가 현실과 이해관계를 고려한 영리한 정치인이었다면 결코 가지 않았을 길을 간 것이다.
해방 이후의 정치 공간에서 사심 없이 민족의 자주 독립 통일국가 수립을 위해 그토록 일관되게 노력했던 드문 인물 중 한 사람, <나의 소원>에서 부강한 나라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 문화 강대국이 되기를 바랐던 인물, 그래서 우리는 눈앞의 현실에 영합하기보다 좀 더 크고 긴 꿈을 꾸었던 인물로 그를 기억해야 한다.
더구나 북미 협상 이후 한반도 평화의 분위기가 확대되어 가는 상황에서, 그리고 장래 남북통일로 가는 기나긴 여정에서 다시 그의 노력이 주목받아야 한다.
그러나 당시의 현실은 냉정했다. 그는 아직도 진정한 배후가 밝혀지지 않은, 모종의 세력의 사주를 받은 안두희에 의해 비명에 가고 말았다.
그리고... 끝까지 자주적 통일국가 수립의 꿈을 버리지 않고 나라의 미래를 걱정했던 그가 서거한 지 딱 1년 후, 민족의 비극인 6.25 전쟁이 일어났다. 그가 그렇게 걱정했던 이념 대립과 분단이 최대의 민족적 비극으로 현실화된 순간이었다.
한편, 대낮에 벌어진 사건의 실행자, 육군 포병 소위이자 주한미군 방첩대(CIC) 요원 안두희는 어떻게 되었을까.
사건 후 그는 현장에서 김구 비서진들에게 붙잡히고 경찰에 체포됐지만, 안두희가 현역 군인이라는 이유를 댄 정체불명의 군인들이 들이닥쳐 그의 신병을 확보하고는 현장에 재빨리 도착한 헌병 지프에 강제로 실려 갔다. 그리고는 신속하게 군법 회의를 거쳐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3개월 후 15년형으로 감형됐고, 복역 중 2계급 특진도 했다. 그러다 6.25 전쟁 이후에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군에 복귀했으며, 이후 별다른 문제 없이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부가 붕괴할 때까지 편안하게 살았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그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면서 숨어다니기 시작했다. 1965년 곽태영 씨가 강원도 양구에서 그를 발견하고 목을 칼로 찔렀으나,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1987년 민족정기 구현회장 권중희 씨는 경기도 김포에서 발견한 안두희를 몽둥이로 폭행하여 형무소에 갔다. 그러나 그는 출소 후에도 안두희를 계속 추적하여 두 차례나 더 그를 응징하기에 이른다.
결국 안두희는 1996년 10월 23일 오전 11시 30분, 인천시 중구 신흥동 자택에서 버스 운전 기사이자 평범한 가장이었던 박기서 씨가 자신이 직접 글자를 쓴 '정의봉'이라는 몽둥이에 얻어맞아 피살되었다. 길고 긴 추격전과 숨바꼭질 끝에 이루어진 결말이었다.
박기서 씨는 천주교 신자였다. 그는 사건 직후 교회에 가서 고해성사를 했고, 이를 들은 신부의 연락으로 경찰에 체포됐다. 그는 안두희가 인간적으로는 안 됐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했다 하며 초연하게 징역 3년을 선고받았고, 결국 1998년 특별 사면으로 풀려났다.
법적으로 공소 시효 기간이 끝난 상태에서 안두희를 방치한 정부와 사법부에 대항하여 정의를 바로 세우겠다고 한 그의 살인 행위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법질서가 온존하는 대한민국 체제에서 살인은 살인이다. 게다가 명령권자도 아닌, 한낱 하수인에 불과한, 다 죽어가는 노인을 폭행해 죽였다는 것은 보는 시각에 따라 잔인한 범죄이기도 하다. 그래서 본인도 이를 인정하고 법적 처벌을 받았다.
하지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를 생각해 보자. 역사와 국가가 진작 했어야 할 일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국민이 자발적으로 들고 일어난 것은 아닐까. 벌건 대낮에 민족 지도자 중 한 사람을 살해하고도 이승만 정부 아래에서 보호받으며 10년 이상을 호의호식하고, 정권이 바뀐 이후에 비로소 이리저리 도망 다니던 사람을 공소 시효 기간이 끝났다고 '법에 의한 면죄부'를 내리고 내버려 둔 것이 누구인가. 극단적인 결과지만, 그런 사람을 자연사하게 내버려 두면 그것이 국가와 민족의 수치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일을 벌인 것이 아닌가.
국가와 정부가 제 할 일을 하지 못할 때 국민은 들고일어난다. 그것이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에게 주어진 저항권이다. 국민의 소리를 무시하거나 미봉책으로 넘어가려 했을 때 국민뿐 아니라 역사는 심판대 위에 그들을 세울 것이다. 시간이 흐른 뒤에라도.
경교장, 지금 그곳은 경교장은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에서 광화문 방향의 언덕을 조금만 올라가면 나오는 강북 삼성병원 내에 있다. 차들이 병원으로 들어오는 길 입구에 있는 고풍스런 2층짜리 건물이다. 하루 종일 병원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과 차들이 무심히 지나가는 곳이지만, 때때로 경교장을 알고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으며, 체험학습을 위해 단체로 찾는 학생들이나 유치원 원생들도 있다.
왜 병원 안에 있을까. 본래 경교장은 해방 후 임시정부 요인들이 돌아왔을 때 친일파였던 최창학이 과거의 잘못을 뉘우친다는 의미에서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제공한 건물이다. 원래 명칭은 죽첨장(竹添莊)이었으나, 일본식 색채가 강한 이름이라 하여 서대문 근처 다리의 이름을 따 경교장(京橋莊)으로 고쳤다.
광산업으로 부를 축적해 부자가 된 최창학은 중일전쟁 이후 일본에 거액의 기부금을 전달하고 비행기를 헌납하는 등 친일 행위를 했던 인물이다. 그가 정말로 자신의 죄를 반성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후에 임시정부 계열의 독립 운동가들이 해방 공간의 현실 정치에서 힘을 잃기 시작하면서 보인 그의 태도에서 드러난다. 자기의 집과 가구에 흠집이 생기는 데에 불만을 제기하기도 하고, 자기 집을 돌려달라는 압박을 하기도 했다.
김구 서거 후 경교장은 중화민국(지금의 대만) 대사관저로 사용됐다. 6.25 전쟁 이후에는 베트남 대사관으로 바뀌는 등 소유주가 여러 번 변경됐다가 1967년 삼성그룹 계열의 삼성 재단이 이곳을 인수하고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 본관으로 사용했다.
1970년대 이후 시민 사회와 학계, 언론 등이 경교장을 역사적 현장으로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 시작했고, 1990년대에 본격화되어 결국 시민 사회의 끈질긴 노력으로 2005년 국가 사적 제 465호로 지정되기에 이른다. 2009년에는 서울시와 병원 측이 건물 복원에 합의했고, 2010년부터 본격적인 복원 공사가 시작되어 2013년에 복원이 완료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누구나 경교장에 가서 김구와 임시정부 계열 독립 운동가들의 해방 후 정치 활동에 대한 편린을 엿볼 수 있다.
경교장은 1층과 2층, 지하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다. 1층에는 정면에 오리엔테이션실이 있어 처음 방문한 사람은 이곳에서 TV를 통해 경교장과 김구, 임시정부에 대한 영상을 시청할 수 있다. 시청 후 북쪽의 응접실과 남쪽의 임시정부 선전부 활동 공간, 귀빈식당을 차례로 돌아보면 된다. 깔끔하게 정리된 1층 응접실은 돌아온 임시정부 요인들의 공식적인 회의 공간이자 김구가 국내외 주요 인사들을 만났던 공간이다.
지하 공간은 당시에 보일러실과 부엌으로 사용되었다. 지금은 경교장과 임시정부의 역사를 알아볼 수 있는 전시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이 공간에서는 김구의 유품들이 눈길을 끈다. 특히, 총탄을 맞을 당시 그가 입고 있었던 피 묻은 옷과 바지는 당시의 현장을 증언하는 생생한 증거로 남아 가슴을 아프게 한다. 서거 당일 조각가 박승구가 뜬 데드마스크(복제품)도 눈길을 끈다.
2층에 오르면 임시정부 요인들과 김구의 숙소가 많은 공간을 차지한다. 2층에도 응접실이 있는데, 1층 응접실과는 다른 배치로 보아 김구가 소규모의 요인들과 회의를 하거나 일대일 면담을 할 때 사용한 공간이었을 듯싶다.
복도 끝에 김구의 거실(집무실)이 있다. 평상시 공무를 보거나 접견 장소로 사용한 공간이다. 거실 벽면 내부에는 그의 흉상이 세워져 있고, 창가 쪽에 그가 사용한 책상이 놓여 있다. 이곳에서 그는 안두희에게 총탄을 맞았다.
책상 뒤편 유리창에는 지금도 두 발의 총탄 자국이 선명하다. 한 발은 김구의 얼굴을 관통해서 유리창을 뚫었고, 한 발은 그의 목을 뚫고 유리창에 맞았다. 이 흔적이 그날의 비극을 그대로 증언하고 있다. 지금은 안쪽에 유리를 덧대어 총탄 자국을 직접 만져볼 수는 없다.
경교장에 와서 이 자국을 볼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지고 기분은 착잡해진다. 경교장이 일반에 공개되기 이전에는 건물 바깥에서 2층을 올려다보며 이 총탄 자국을 발견하고는 얼마나 심란했는지. 2013년 일반에 공개되자마자 달려가서 2층에 올라가 확인한 것이 이 총탄 자국이었다. 그저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것과 실제 당시의 흔적을 눈으로 보는 것과는 이렇게 다르다.
지금은 2층 베란다 공간으로 나갈 수 없지만, 당시에는 중요한 정치적 사안이 있을 때마다 김구는 여기에 나가 아래에 있는 군중을 상대로 연설을 하거나 정치 현안을 이끌었다. 1945년 12월 말부터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벌일 때도 때때로 이곳 2층에서 시위를 주도했고, 1948년 4월 남북협상을 위해 북에 넘어갔다 올 때도 이곳에서 모여든 청년들을 향해 연설을 했다. 특히, 북행을 만류하는 군중들을 향해 그는 외쳤다.
"이 길이 마지막이 될지 어떻게 될지 몰라도 나는 이북의 동포들을 뜨겁게 만나보아야겠다."
우익 민족주의자였던 그가 북에 억류당하거나 정치적으로 이용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38도선을 넘어 남북협상에 참여한 것은, 그가 이미 1948년 2월에 발표한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에 나온 것처럼 '통일 정부를 세우려다 38도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위를 위해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 가담하지 않겠다'는 강한 신념 때문이었다.
민족 공동체의 생존과 미래를 고민하고, 독립과 통일 국가 수립을 위해 끝까지 일관된 길을 간 진정한 민족주의자. 통일하면 살고, 분열하면 죽는다는 말에 따라 그 길이 정치적으로 불리하고 가시밭길이 될지라도 기어이 가겠다는 그의 발길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이정표가 되고 영감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그가 했던 평소의 말처럼.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는 발걸음을 어지럽게 걷지 마라 오늘 나의 발자국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답사 정보 - 주소 : 서울 종로구 새문안로 29 강북삼성병원
- 관람 시간 : 화요일~일요일 오전 9시~오후 6시. (오후 5시 30분까지 입장)
- 관람료 : 무료
- 단체로 관람할 때는 경교장에 상주하는 해설사 분께 설명을 요청 드려도 된다.
김구의 전반적인 일생과 그의 독립운동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내용들을 알고 싶다면 지금의 효창공원에 있는 백범기념관에 가면 된다. 특히, 효창공원 안에는 그의 묘가 있다.
가는 법 자가용으로는 서울 종로와 광화문 사거리 쪽에서 서대문 방향으로 직진, 서울역사박물관과 경희궁을 지나 우측으로 강북삼성병원 들어가는 진입로가 있다. 병원 안에 들어가서 주차한다.
대중교통으로는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4번 출구로 나와 3~4분 정도 걸어가면 왼쪽에 강북삼성병원이 있다. 병원 안마당으로 올라가면 고풍스런 2층짜리 건물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