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왜 연하(조인성 분)하고 헤어져? 능력 있겠다, 유럽에 으리으리한 집 있겠다, 수시로 활동보조인이 와서 도와주겠다... 휠체어 신세긴 하지만 얼굴이 조인성이잖아? 심지어 연하잖아. 왜 반대해? 뭘 고민해?'노희경 작가의 <디어 마이 프랜즈>라는 드라마 속 서연하(조인성 분)와 박완(고현정 분)의 러브라인을 보면서 나는 답답함에 가슴을 마구 쳤더랬다.
한편, 시골에서 백발의 노부모와 함께 사는 완이의 외삼촌 장인봉(김정환 분)을 보면서 완전히 다른 의미에서 가슴이 답답해졌다. 사랑하는 자끄(재클린)의 빚 2천만 원을 갚아주고 그녀와 결혼하게 해 달라고 노모에게 생떼를 부리는 거다.
'아무리 철이 없어도 그렇지. 그럴 돈이 어디 있어. 결혼은 해서 어쩌게. 잘 살 수 있겠어? 애는 어떻게 키울 거야? 행여나 자끄가 자기 나라로 도망이라도 가면 어쩌려고...?'그도 연하처럼 전봇대에서 떨어져 하반신 불구이긴 마찬가지인데... 씁쓸하게도 나는 영롱한 자본주의에 철저하게 눈이 먼 인간이었다. 물론 지금도 크게 나아지지는 않았다.
'장애'에 대해 무지한 사회장애인의 권리 선언(UN) 제1조에는 "장애인은 선천적이든 아니든 신체적 또는 정신적 능력의 결함으로 인하여 일상의 개인 또는 사회생활에 필요한 것의 확보를 스스로는 완전히 혹은 부분적으로 행할 수 없는 사람"으로 정의한다.
연하도 인봉이도 제 손으로 밥벌이를 하고 사회에서 제 몫을 하는 건실한 청년이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둘 다 어느 날 갑자기 불의의 사고로 하반신 불구라는 신체적 손상을 입게 되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장애인이 되었다. 그런데 나는 왜 둘의 연애와 결혼에 관해 생각할 때, 오직 연하에게만 이렇게 관대한가. 그것은 비단 '비주얼'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 시각장애 체험을 했다. 신입사원 교육 차원에서 약식으로 이루어지는 체험인데, 안대로 눈을 가린 채 점심 식사를 하고, 봉천역에서 보라매공원까지 보조자의 입회 아래 흰 지팡이에 의지해 보행한다.
밥을 먹으면서 식판에서 내 입까지의 거리가 생각보다 멀다는 생각을 한다. 조금이라도 덜 흘리겠노라 나도 모르게 식판에 고개를 처박는다. 생선 반찬은 가시를 발라 먹을 엄두가 안 나니 일찌감치 포기한다. 샐러드도 용케 젓가락으로 집었지만 그 크기를 가늠할 길이 없다.
입을 얼마나 벌려야 할지 몰라 곤혹스럽다. 입 주위에 잔뜩 묻은 드레싱을 닦아야겠는데 냅킨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건지 모르겠다. 김치는 왜 이렇게 크고 청포묵은 뭐 이리 미끄덩거리는지. 잔반을 남기면 안 된다는데 식판에 밥과 반찬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봉천역에서 보라매공원까지. 지하철 2호선 봉천역 승차, 신대방역 하차. 소요시간 4분. 신대방역에서 보라매공원까지 도보로 17분. 총 21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이다. 물론 비장애인 기준으로.
우선 지하철을 타기 위해 기나 긴 계단을 내려가는 것부터가 두렵기 그지없다. 발을 헛디뎌 계단에서 구르기라도 하면 어쩌나 다급한 마음에 지팡이로 바닥을 마구 더듬어 본다. 걸음마를 갓 뗀 어린 아이처럼 한 칸씩 천천히 계단을 내려간다.
이제는 개찰구를 찾는 게 일이다.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개찰구 위치를 유도블록으로 표시해 놓았다는데, 지팡이 끝 무딘 감각으로는 선형블록과 점형블록의 차이를 도통 모르겠다. 할 수 없이 발바닥의 감각에 의지해 블록을 구분해 본다.
신대방역에서 보라매공원으로 이어지는 좁다란 가로수 길도 험난하기는 마찬가지. 똑바로 걷는다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 일인 줄은 미처 몰랐다. 갈 지(之)자로 걷다가 벽이나 나무에 가로막히면 그때서야 다시 방향을 튼다.
스쳐 지나가는 자전거와 오토바이 소리에 간이 콩알만 해진다. 그리 큰 키도 아닌데 혹여 가로수 나뭇가지에 머리를 부딪칠까봐 고개를 움츠린다. 얼마나 진땀을 뺐는지 도착해서 보니 마스카라가 다 번졌다. 워터 프루프도 소용없다.
중요한 것은 시각장애인들이 훈련을 통해 이 모든 것들을 척척 해내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나 역시 시간은 걸리겠지만 꾸준히 훈련을 받는다면 그들과 마찬가지로 깔끔하게 식사를 하고 흰 지팡이에 의지해 집과 회사를 오갈 수 있을 것이다.
편견을 가질 필요도, 연민을 느낄 필요도 없다 특수학교나 장애인 시설이 동네에 들어설라치면 마치 정해진 수순처럼 반대 시위가 벌어진다. 집값이 떨어져서 안 된단다. 이른바 님비 현상(NIMBY 현상-Not in my backyard)이라는 그것, 참 고약스럽기 짝이 없다. 특수학교, 장애인 시설이 들어서면 왜 집값이 떨어져야 하는가. 그 이유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는 우리들도 사실은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맥 빠지는 아이러니다.
우리는 유럽의 앞선 장애인 복지 정책을 선망한다. 그들에게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선진 복지 사회의 모습을 찾곤 한다. 장애는 장애일 뿐, 사회적 편의와 자본주의적 합리화를 핑계로 장애인이 우리 사회에서 격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충분히 알고 있다.
장애인의 인권, 복지 문제에 대해서 구체적인 법안이나 사회적 제도 마련과 같은 어려운 얘기를 하자는 것은 아니다. 막말로 그건 나라의 녹을 먹는 사람들이 심각하게 고민하면 될 일이지, 우리가 모두 장애인의 인권 신장을 위해 몸 바쳐 앞장설 필요는 없지 않은가.
다만, 적어도 진보하는 사회의 발목을 잡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내가 장애인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식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혹시나 시대에 뒤떨어진 나의 낡은 사고방식이 인간다운 사회를 실현하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한 번쯤 생각해 보면 어떨까.
혹시 당신도 나처럼 인봉이는 안쓰럽고 연하는 멋있어 보였는가? 인봉이에게 결혼이란 꿈 꿔서는 안 될 사치인 것만 같고, 상대가 연하라면 당신도 주저 없이 결혼할 수 있을 것 같았는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 의식의 기저에 이러한 사고방식이 자리 잡은 이유가 무엇일까. 결국 장애인이란 우리 사회가 그들을 차별하고 격리함으로써 생겨나는 개념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시각장애를 가진 내 동료도 자기 남편의 '초딩 입맛'에 대해 흉을 본다. 그러더니 그래도 성격은 무던하고 좋은 사람이란다. 집에서 싸 온 간식을 선뜻 내어주며 "나는 퍼주는 걸 좋아해서"라며 웃는다. 이번 여름에는 가족들과 오키나와에 여행을 가기로 했다고 한다. 신혼여행은 괌으로 다녀왔다고.
나는 지난 십여 년 간 직장생활에 찌들어 제대로 된 여행 한 번 못 가봤다. 일이 바쁘다는 핑계 아닌 핑계로 결혼은 미뤄졌다. 혼자 사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어쨌든, 나에게 초딩 입맛에 사람 좋은 남편은 없다. 이런 내가 단지 장애가 없다는 이유로 그녀보다 행복하다 말할 수 있을까?
장애인들도 주말이면 텃밭을 가꾸고 반려견과 산책을 나선다. 반나절이 걸려도 자기 손으로 반려견을 씻기고 정성껏 털을 빗겨준다. 병원에 데려가 예방접종도 시킨다. 여자 친구와 사소한 일로 다툰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후회가 밀려온다. 그녀의 퇴근 시간에 맞춰 회사 앞 지하철 입구에서 기다린 남자가 그녀의 가방을 덥석 받아들고 손을 마주 잡는다. 나란히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은 부럽다 못해 아름다웠다.
한편, 장애인들 사이에서도 지체 장애나 언어 장애에 비해서 시각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무시가 존재한다. 장애인 요양 시설에서 시각 장애인이 소위 '왕따'가 되는 일은 매우 흔하다고 한다. 장애인 중에도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다. '장애인=착하다'는 생각도 일종의 편견이다.
장애인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다. 그들도 자신의 삶을 치열하게, 그리고 충실하게 살아간다. 그러니 그들에게 연민을 느낄 필요는 없다. 그저 편견을 지우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된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존중하면 된다. 우리는 그것부터 시작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