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교수님. '교수님'이라는 호칭이 이제는 어색하실 테지요. 정치에 입문한 후 당 대표와 국회의원, 대선 및 지방선거 후보 등 여러 직함을 거친 당신께 교수란 호칭은 이제는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오늘만큼은 새삼 당신을 그 이름으로 부르고자 합니다.
먼저 고백하자면, 서울시민인 저는 교수님을 찍지 않았습니다. 물론 당신이 속한 정당에게도 표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한편, 저는 당신이 적어도 김문수 후보는 이길 수 있길 바랐습니다. 이렇게 큰 차이로 패하진 않길 내심 바랐던 것이지요.
물론 교수님이 큰 차이로 낙선하리라는 것은 여론조사를 신뢰하는 상식적인 시민이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바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큰 차이로 낙선하고 성명을 발표하는 당신의 쓸쓸한 표정을 보니, 새삼 여러 만감이 교차합니다.
2012년, 안철수와 나
제가 교수님을 직접 본 건 2012년, 지금으로부터 6년 전입니다. 그 무렵 저는 대학 진학에 실패한 재수생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때도 선거를 앞둔 무렵이었습니다. 당신은 지방 순회 강연을 다니며 투표 독려와 더불어 청년들에게 희망과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제가 다니는 독서실 근처 대학에서 교수님 강연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재수 중임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보기 위해서 땡볕 아래에서 1시간을 줄을 섰던 기억이 납니다. 대강당이었는데도 교수님을 보려는 인파가 줄을 이어 야외에서 1시간을 기다려야 했지요.
일찍 줄을 섰는데도 좌석이 매진된 탓에, 저는 강단 앞 복도에 쪼그려 앉아야 했습니다. 그래도 교수님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그때는 무척 행복했었습니다. 정치인은 물론 그 나이대 남성 어른들의 흔한 말투인 '다나까'체조차 어색해 쓰지 못하던 당신. 기득권을 비판하며 청중에게 앵그리버드 인형을 던지던 당신의 모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시민들에게 무료로 백신을 나눠준 교수님의 일화를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우고 자란 세대로서, 당신에 대한 그런 호감은 어쩌면 당연한 감정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뿐만 아니라, MBC <무릎팍도사>에 출연한 당신의 상식과 때 묻지 않은 순수함. 당시 지지율이 5%에도 못 미쳤던 박원순 후보에게 기꺼이 단일화 후보를 내준 '아름다운 양보'를 보면서, 분명 교수님은 기존 정치인들과는 다른 정치를 보여주리라 굳게 믿었습니다.
이는 물론 저 개인만의 기대는 아니었습니다. 당시에 청년 대부분이 교수님에게 큰 기대를 품었으니까요. 그러나 그 이후의 교수님의 정치 행보는 굳이 거론하지 않아도 잘 아실 겁니다.
2018년, 안철수와 나
그로부터 6년이 흐른 지금, "앞으로의 소임을 고민하겠다"라는 당신의 낙선 기자회견을 TV로 지켜봅니다. 당선은커녕 탄핵 무효를 주장하는 '적폐정당'의 후보로서 서울 한복판에서 혐오 발언을 서슴지 않는 그 빨간 점퍼의 후보에게조차 패배한 당신의 씁쓸한 표정을 보는 저도 마음이 무겁고도 한편 어딘가 모를 아련한 감정을 느낍니다.
어느덧 당신을 처음 본지 6년이 흘렀고, '아름다운 단일화'를 보여준 새정치의 상징이던 당신이, 이제는 선거를 앞두고 '적폐정당'의 후보와 단일화를 논의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당신을 보며 꿈을 키운 재수생이었던 저는 대학도 졸업하고 이제는 의젓한 사회인이 돼, 대안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제가 다시 세월을 거슬러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스무살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당신도 '정치인' 안철수 이전의 '청년멘토' 안철수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겠지요. 그러기에는 저나 당신이나 너무 멀리 와버렸습니다.
아마 지금쯤 교수님은 앞으로의 거취에 대해 여러모로 고민이 많으실 겁니다. 그런데 그런 교수님에게, 정치에 입문해 별다른 성과도 없이 많은 걸 잃은 당신에게, 이제와 제가 정계은퇴를 권유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일까요?
저는 솔직히 출구조사와 개표결과 나오고 교수님의 낙선이 기정사실화된 무렵, 당신이 정계은퇴를 선언하길 바랐습니다. 정작 당신이 입문한 이후 당신에게 단 한 표를 주지 않은 무심한 저이지만, 만약 기자회견에서 '정치에 입문하기 이전 청년멘토 시절의 안철수로 돌아가고 싶다'며 정계은퇴를 선언한다면, 당신에 대해 어렴풋이 남아있던 호감의 감정을 조금은 되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신이 너무도 무참히 패배한 데에 대한 연민일까요? 상식과 비상식의 대결을 이야기하며 새정치를 외치던 '청년멘토' 안철수의 정치 실패는, 어쩌면 '나'의 실패, 그리고 우리 모두의 실패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는 당신에게 기대를 걸었던 나와 청년들의 실패이자, 만일 보다 나은 정치 지형과 조건이었더라면 정치에 미숙한 당신도 더 나은 정치를 펼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공허한 아쉬움이겠지요.
교수님, 정계를 떠나 당신의 고향 부산으로 내려가는 것은 어떨까요? 그저 쥐 죽은 듯 조용히 지내길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공직과 후보를 거친 당신의 무게는 6년 전과는 이미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정치적 행동과 발언을 일절 자제하되, 대신에 묵묵히 지역사회와 청년교육에 힘쓰며 헌신하고 공부하는 당신을 본다면 저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언젠가는 당신을 호명할 날이 꼭 있을 것입니다.
과거 14대 대선. 김영삼 당선자가 아닌, 패배한 김대중 후보를 국민들이 주목했던 것은 민주투사이자 노정객의 씁쓸한 정계은퇴를 가슴 아파했기 때문이고, 17대 대선, 이명박 당선자의 취임식이 아닌, 노무현 전임 대통령의 퇴임식에 국민들이 주목했던 것도 미련 없이 고향으로 떠나는 그의 뒷모습이 너무도 진한 여운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랬기 때문에 이후 김대중 후보는 돌아와 대통령이 될 수 있었고, 노무현 대통령 또한 서거 전까지 봉하마을에 머물며 국민들의 사랑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떠나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이것은 오늘만큼은 당신을 보며 희망을 키웠던 스무살의 나로 돌아가 쓰는, '정치 첫사랑' 당신에 대한 마지막 러브레터의 마지막 문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