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쉰 살인 정숙씨는 밖에서 헤어롤을 앞머리에 말고 다니는 여성들을 보면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어느 날은 롤을 만 여중생에게 '깜빡하고 롤을 안 풀고 왔냐'며 물어보기도 했지만, 일부러 하고 다닌다는 말에 무척이나 당혹스러웠다. 색색깔의 두툼한 헤어롤을 말고 돌아다니는 여학생들이 귀엽긴 했지만 아무리 봐도 이상하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원래 헤어롤이 집에서 세팅 마치고 풀고 나오는 거잖아요. 그런데 요새 애들 보면 어딜 가든 밖에서 앞머리에 롤을 말고 있더라고요. 마치 머리띠나 헤어핀처럼요. 처음에는 앞머리만 깜빡하고 안 풀고 나왔나 싶었어요. 어린 친구들은 길에서 하고 다녀도 민망하지 않은 것 같더라고요. 자꾸 보다 보니 '저게 편한가' 싶기도 하고." 최근 버스 정류장, 식당, 카페 등 공공장소에서 젊은 여성들이 앞머리에 '헤어롤'(일명 '찍찍이 구르프')을 말고 있는 모습을 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10~15분 가볍게 말고만 있어도 예쁘게 말린 앞머리가 완성되는 헤어롤.
집에서 알음알음 사용하는 은밀한 미용 '팁'이었던 헤어롤은 이젠 어디서든 볼 수 있는 '필수템'이 되었다.
하지만 길에서도 당당히 헤어롤을 말고 다니는 젊은 여성들의 모습은 기성세대에겐 다소 어리둥절한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로 보인다.
집에서 머리를 말아 웨이브를 넣을 때 사용하는 헤어롤. 어쩌다가 소문난 '집밖용품'으로 자리 잡게 되었을까. 1020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이름은 가명).
"일단 편하니까... 남들 시선, 신경 안 써요"
"공부할 때, 수업 들을 때, 급식 먹으러 갈 때, 저는 꼭 앞머리 롤을 말고 다녀요. 멋이요? 에이, 누가 그걸 멋으로 말고 다녀요. 편하니까 하고 다니죠. 앞머리는 좀만 길어도 눈을 콕콕 찔러서 성가시거든요." 하교길에 인터뷰를 요청하자 소정(18)씨는 앞머리를 말고 있던 핑크색 헤어롤을 돌돌 풀었다. 소정씨처럼 헤어롤을 앞머리에 말고 하교하는 여학생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한창 외모에 관심이 많을 여고생들에게 축 처진 앞머리를 회생시키는 마법의 헤어롤은 필수품. 앞머리 있는 여자애들의 가방 속에 헤어롤 하나씩은 기본이라고 소정씨는 단언했다.
소정씨는 쉬는 시간에 헤어롤을 말고 있다가 선생님께 혼쭐이 나기도 했다.
"선생님들께선 자주 헤어롤을 압수하세요. 왜냐고요? 공부에 집중 안 하고 외모나 신경 쓴다고요. 그리고 선생님에 대한 예의도 아니래요. 하지만 (학교에) 고데기도 반입불가인데 헤어롤까지 없으면 정말 불편하다고요. 앞머리를 롤로 말고 있으면 시원하기도 하고 (앞머리가 눈에) 찔리지도 않고 완전 편해요. 멋만 부린다고 하지 말고 저희 입장도 한 번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어요."소정씨와 친구들은 한목소리로 "편안함"을 강조했다. 아침 일찍 등교하는 학생들은 졸린 눈 비비며 머리 말릴 새도 없이 후다닥 등교준비를 마쳐야 한다. 숨 가쁜 아침에 드라이는 사치. 축 늘어져 이마에 달라붙고 눈을 찌르는 앞머리는 장시간 학교에 앉아있는 아이들에게 불편한 걸림돌이다. 학생들에게 헤어롤은 멋 이전에 편리함을 위한 아이템이다.
"어른들은 집에서 해야 할 헤어롤을 밖에서도 하고 다닌다고 뭐라 하세요. 하지만 헤어롤이 비밀스럽고 부끄러워야 할 물건은 아니잖아요. 하루 종일 앞머리 고정되면 좋은 거고 공부할 때 편하니까 좋고 이마에 여드름도 안 나게 해주니까, 완전 일석삼조죠. 다른 사람들이 쳐다보면 조금 민망하긴 하죠. 저걸 왜 밖에서 하고 다닐까란 눈빛들(웃음). 하지만 그런 시선들은 딱히 신경 안 써요. 제가 편하니까, 하루 종일 예쁜 앞머리를 만들고 싶으니까 당당히 하고 다니는 거니까요. 그래서 민망하다고 느끼지 않아요. 스스로 만족하니까요.""앞머리는 '생명'... 축 처지면 자신감도 상실" 여성들의 헤어롤 사랑은 교실에서 멈추지 않는다. 올해 스무 살 대학생이 된 연지(20)씨는 핸드백에 작은 헤어롤을 꼭 넣고 다닌다. 길에서 하고 다니진 않지만, 동아리실이나 도서관같이 사람들 시선이 적은 곳에선 꼭 헤어롤을 착용한다. 밖에서 화장을 고칠 때도 걸리적거리는 앞머리를 롤로 말고 있으면 그렇게 편할 수 없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드라이를 하고 나와도 땀이 많이 나는 여름철에는 앞머리가 쩍쩍 달라붙는다. 그런 날 헤어롤이 없으면 정말 '절망'이라고 연지씨는 덧붙였다.
"앞머리가 축 처지면 자신감도 상실한달까(웃음). 그런 외모적인 부분도 있지만 공부할 때 앞머리를 말고 있으면 얼마나 편한데요. 저는 집중해야 할 땐 앞머리가 걸리적거리니까 꼭 말아요. 핀 같은 걸 집어 놓으면 나중에 모양이 안 예쁘거든요. 편리성, 효율성, 외적인 부분을 다 따져보면 헤어롤만한 게 없어요. 아침에 바빠 죽겠는데 드라이 하고, 롤 말고, 그럴 시간이 어딨어요. 게다가 열기구 사용하면 머리카락도 타버리기 마련이죠. 헤어롤은 더 이상 집안용품이 아니에요. 화장 고치는 것처럼 헤어롤도 꾸민 모습을 유지해주는 도구들 중 하나인 것 같아요."학원강사 가연(25)씨는 초등학생 때부터 항상 알자 앞머리와 함께 성장해왔다. 이마 콤플렉스 때문에 앞머리는 늘 포기할 수 없는 스타일이었다. 드라이를 잘못해서 앞머리가 망가지거나 축 처져 옆으로 넘겨야 할 상황이 생기면 가연씨는 부끄러운 마음에 자꾸만 이마를 손으로 가렸다. 비오는 날은 아무리 앞머리에 세게 컬을 넣어도 금세 치렁치렁 내려왔다. '앞머리는 생명'이라는 가연씨는 쑥스럽게 웃어보였다.
"사진 찍을 때도 앞머리 별로면 안 찍어요. 얼마나 안 예쁘게 나오는데요. 롤은 그럴 때 필수품이에요. 여행갈 때 반드시 챙겨야 할 순위 중 하나랄까. 헤어롤 처음 사용할 땐 민망하기도 했죠.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도 느껴지고. 그래서 처음엔 몰래몰래 화장실에서 사용하고 수업에 들어 갔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턴 공적인 자리가 아니라면 자연스레 헤어롤을 착용하게 됐어요. 헤어롤은 제 자신을 위해서 하는 거예요. 더운 날 앞머리 망가졌다고 괜히 울적해지지 않기 위해서, 그런 부분에 불필요한 신경을 집중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일할 때 더욱 편안하게 집중하기 위해서." "애도 아니고 그걸 왜 말고 있냐" 상사에게 질책도
올해부터 직장을 다니기 시작한 회사원 아연(27)씨는 이른 출근 시간 때문에 드라이 할 시간이 매번 촉박하다. 대학생 여동생을 따라 헤어롤을 들고 다니게 되었다는 아연씨는 쉬는 시간을 틈타 종종 헤어롤을 착용한다. 가끔 헤어롤을 착용하다 상사에게 들키면 '애도 아니고 그걸 왜 말고 있어'란 질책을 받기도 한다.
"고데기 할 시간도 없고, 롤을 자주 하고 다녀요. 하지만 회사에선 고등학생 같은 느낌에 좀 민망하달까. 그래서 앞머리 롤을 밖에서 하는 건 어리니까 할 수 있는 특권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들면 못할 것 같기도 하고. 학생들은 다른 사람들 시선을 잘 신경 안 쓰는 것 같더라고요. 그런 당당함이 가끔 부러워요. 늘 완벽한 헤어스타일을 유지하고 싶은 건 모든 여자들의 바람이잖아요. 여러모로 장점이 많은 헤어롤인데 집 안에서만 쓰는 거라고 못 박을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미용적인 부분에서 보다 시대가 유연하게 변화하고 있달까. 헤어롤을 밖에서 한다고 부끄러워하거나 몰래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편안하고 만족하면 그걸로 된 거죠."집이나 미용실에서만 사용되던 헤어롤이 길거리에서도 당당히 하고 다니는 '뉴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물론 사적영역의 대중화를 다소 불편하고 당황스럽게 여기는 다양한 시각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여성들의 생활이 좀 더 편리하고 만족스럽게 발전해가는 유쾌한 과도기 중 일부가 아닐까. 이젠 헤어롤이 아침에 바빠서 "깜빡하고 안 풀고 나온" 민망한 헤어용품이 아님은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