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것을 자랑스럽게 묘사하는 졸작이지만, <쓰바키야마 과장의 7일간>에는 인상적인 한 장면이 있다. 영업 접대 술자리에서 뇌경색으로 사망한 과장은, 억울한 누명을 벗기 위해 3일간 다른 몸으로 환생을 허락받는다.
그러니까 몸은 여자, 마음은 남자인 채로 그는 길을 나선다. 아침 출근길 전철에 오른 그녀(=그)는 만원 전철에서 거칠게 몸을 밀어 대는 남자들에게 위협을 느낀다. 처음으로 여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된 경험은 그에게 깨달음을 남긴다.
혼잡한 전철 안에서 그는 아무런 이유 없이 남자들에게 겁을 먹었다. 체구가 작고 무력하다는 건 이렇게도 불안한 것이었던가? 왜 세상의 남자들은 연약한 여자들에게 더 친절하게 대해주지 않는 것일까? (아사다 지로, <쓰바키야마 과장의 7일간> 중에서)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어린이, 노인, 장애인, 다문화 가정 자녀 등 보호 대상이 되는 사회적 약자의 목록에 여성이 '실제로' 포함되는가? 여성이 신체적으로 약하다는 사실은 모두 알고 있지만, 그래서 그들에게 친절하게 대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오감의 감옥 안에서 사는 우리는 다른 존재가 되는 느낌조차 상상하지 못한다.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양차 세계대전이 아니었다면 여성 참정권은 아직도 사회운동가들의 구호에 그쳤을지 모른다. 총알받이로 전선에 내몰린 남자들을 대신해서 여자들이 공장을 돌리고 식료품점을 운영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의 목소리에 누가 귀를 기울였을까? 여성 참정권은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역사적 우연이다.
<어번던스>에는 이런 에피소드가 나온다. 물이 부족한 아프리카 오지에 우물을 대신할 수도관을 건설했는데, 자꾸 파손되더라는 것이다.
"여자들이 길을 나서 물을 구해 오는 데 보내는 하루 걸러 4시간이 그들이 남편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시간이었죠. 그들은 이 프라이버시의 시간을 소중히 여겼기 때문에 계속 파이프를 파괴했던 겁니다." (피터 다이어맨디스, <어번던스>, 153쪽)
과연 그들이 "프라이버시를 소중히 여겨서" 파이프를 파괴했을까? 그들은 아마도 남편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랬던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들이 단순히 고독을 즐기기 위해 범법행위를 했다고 상상하는 건 나로서는 어렵다.
샤를리즈 테론이 주연한 영화 <노스 컨트리>는 탄광에서 벌어진 여성 노동자에 대한 성폭력을 주제로 한다. 영화의 배경은 1990년대다. 여성에 대한 차별과 성희롱이 당연시되던 시대는 그다지 옛날이 아니다.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을 위시로 하는 많은 학자들은 인류의 뇌가 인공지능과 결합할 때 인류의 최종 진화가 진행될 것이라 믿고 있다. 그것보다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극복하는 순간이 우리의 최종 진화 시점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