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작품 한 점을 독자와 함께 감상하며 그림 속 숨어있는 이야기와 작가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보려고 합니다. 미술전문가의 입장보다는 관람객 입장에서 그림이 어떻게 느껴지는지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편집자말] |
공허한 눈동자, 우울한 표정, 광대 아래로 흐르는 어두운 그림자, 여자는 수심에 가득 차 있다. 시흥군수의 딸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란 그녀는 진명여자 보통학교를 수석졸업하고 일본 도쿄 여자 미술학교에서 그림을 공부한 우리나라 최초 여성 서양화가.
여자로서는 최초로 유화 전시회를 열었으며 수필, 시, 소설, 기행문 등 다양한 장르의 글을 썼던 신여성. 조선여자 최초로 세계일주 여행을 하고 프랑스에서 그림을 공부한, 최초라는 제목이 너무 많아 열거하기도 벅찬 그녀의 이름은 나혜석(1896~1948). 이 그림은 나혜석의 나이 32세에 파리에서 그린 자화상이다. 세상 부러울 것 없이 거침없는 그녀의 자화상이 왜 이토록 우울해 보일까.
그녀 나이 19세 도쿄 유학 시절, 오빠 나경석의 친구였던 최승구(23)를 만났다. 요절하지 않았더라면 문학사의 한 획을 그었을 시인, 그와 사랑에 빠졌다. 둘은 민족과 문학과 예술을 알아가며 뜨거운 청춘을 통과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혼과 중첩이 만연했던 그 시대에 그 또한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조혼한 여인이 있었다. 부인과 이혼하고 그녀와 결혼하려 했지만 집안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와중에 폐결핵이 악화된다.
그는 갔지만 그녀는 그를 보내지 아니하였다둘은 몰래 약혼한다. 요양 차 귀국한 그를 만나러 도쿄 기숙사에서 몰래 빠져나와 배를 타고 며칠이 걸려 전남 고흥에 도착한 그녀에게 그는 말했다. 이미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운명을 아는 듯이.
"오해 없이 영원히 잊어주세요."그를 만나고 돌아온 지 며칠 후, 그의 사망소식을 듣고 그녀는 발광했다. 최승구 나이 25세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으로 잃어버리고 미치지 않고 어떻게 견딘단 말인가. 미치도록 아팠고 미치도록 미쳤다. 그를 보내고 15년이 더 지난 후, 그를 그리워하며 쓴 수필이 '원망스런 봄밤(1933)' 제목부터 목이 멘다.
"슬퍼. 아아. 슬퍼. 해가 가고 날이 가니 슬픈가. 그 얼굴 그 몸이 재 되고 물 되어 가는 것이 슬픈가. 그 세계와 내 세계의 거리가 멀리 갈수록 그는 점점 냉정해가고 나는 점점 열중해가는 것이 슬프다. (중략) 보름달은 구름에 가려 그 얼굴이 보일 듯 보일 듯할 뿐 아니라 빛까지 가리어 어두컴컴하다. 아아! 소월아! 소월아!"(소월은 최승구의 호다-기자 말.)그는 갔지만 그녀는 그를 보내지 아니하였다. 그의 그림자는 평생을 그녀를 따라다녔다. 그런 그녀를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도쿄 제국대학 법학도 김우영. 열 살 연상의 그는 결혼했으나 3년 전 상처하고 혼자였다.
하지만 몸을 추스른 그녀의 관심은 '조선여성과 민족'에 있었다. 그녀는 1917년 '학지광'에 '여자도 사람이다'라는 주제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를 조직하여 <여자계 (女子界)>를 창간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페미니즘 소설 '경희'를 써서 여자계 2호에 실었다. 봉건적·인습적 관념의 억압성을 드러내는 글들을 써서 사회적 비난과 냉대를 받기도 했지만 그녀는 여성인권 향상을 위한 글을 멈추지 않았다.
옛 애인의 무덤으로 신혼여행을 떠나다1921년 매일신보에 입센의 '인형의 집'이 번역되어 연재되었는데, 마지막 회에 나혜석은 '인형의 家'를 써서 실었다. 십 년 후, 이 시는 그녀의 운명이 되었다.
"내가 인형을 가지고 놀 때 기뻐하듯 아버지의 딸인 인형으로 남편의 아내 인형으로그들을 기쁘게 하는 위안물 되도다. 노라를 놓아라. 최후로 순수하게 엄밀이 막아논 장벽에서 견고히 닫혔던 문을 열고 노라를 놓아주게.남편과 자식들에게 대한 의무같이 내게는 신성한 의무 있네.나를 사람으로 만드는 사랑의 길로 밟아서 사람이 되고자(하략)"독립운동에도 적극 가담했던 그녀는 1919년 이화학당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감금된다. 이때 그녀의 변호를 맡은 이가 김우영이다. 그의 변론에 힘입어 5개월 만에 출소한 그녀는 이를 계기로 그와 결혼까지 이르게 되는데 그녀의 결혼 조건이 세간의 화제를 모았다.
1.평생 사랑할 것 2.그림을 방해 말 것 3.시어머니와 따로 살 것. 그리고 첫사랑 최승구의 묘지에 비석을 세워줄 것. 청첩장도 신문광고를 통해 돌렸다. 그는 모든 것을 받아 들였고, 신혼여행도 최승구의 묘가 있는 고흥으로 가서 그의 묘비를 세워주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약속으로 잡을 수 없음을 알기에 그때의 그녀는 너무 어렸다.
결혼 후에도 그녀의 머릿속을 지배한 4가지 화두가 있었으니. '첫째,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나. 둘째, 남녀사이는 어떻게 살아야 평화스럽게 살까. 셋째, 여자의 지위는 어떠한 것인가. 넷째, 그림의 요점은 무엇인가'였다.
그녀는 사람으로, 여자로, 예술가로 삶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다. 때마침 외교관 신분이던 남편에게 세계일주 여행 기회가 왔고 그녀는 그와 함께 떠났다. 아이 셋과 노모가 마음에 걸렸지만 견식을 넓히고 싶은 마음의 파동을 금할 수 없었다.
남자는 칼자루를, 여자는 칼날을 쥔 세상경성에서 기차를 타고 시베리아를 횡단해서 유럽까지. 한 달 만에 파리에 도착한 그녀는 비시에르의 화실에 다니며 그림을 그렸고 그는 법학 공부를 위해 베를린에 머물렀다. 그는 파리 와있던 그의 친구이자 천도교 지도자, 민족 대표33인 중 1인이었던 최린에게 그녀를 부탁한다. 잘못된 만남이 시작되었다. 둘은 걷잡을 수 없는 감정에 빠져들었다.
이 그림은 그녀가 그를 만났을 때 그린 자화상이다. 왜 이렇게 상념이 가득 차 있는지 보인다. 그녀는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가 일생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키워드 "여자도 사람이외다"를 관통하는 그림이다. 사람이니 사랑에 빠지고, 실수를 할 수도 있고, 그를 통해 성장할 수 있음을 말하고 싶었으나 정조관념이 없는 부도덕한 여인으로 낙인찍히고 만다.
그녀는 외려 이런 감정들이 남편과의 관계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것은 진보한 사람의 자연스러운 감정임을 피력했다. 도덕과 법이 아니라 사람의 감정에 대해 그녀는 말했으나 그 시절 조선에서 통하지 않았다. 물론 지금도.
도덕의 잣대를 들이대며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쉽다. 그래야 자신도 도덕군자라고 포장하기 쉬우니 말이다. 하지만 유사 이래,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사를 들여다 보면 무너지는 댐을 주먹으로 막는 게 더 쉬워 보인다. 마음이 가는 것을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선택과 그에 따르는 책임이 있을 뿐.
이혼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일들이 있었다. 사랑했지만 막상 자신에게 해가 될까봐 전전긍긍, 그녀를 회유하고 밀어내기 바쁜 최린과 복수심에 눈이 멀어 이혼 전부터 다른 여자와 동거하는 남편에게 세상은 한결 너그러웠다. 물론 사람들의 입방아에 남편도 괴로웠으리라. 그녀 때문에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남자는 칼자루를 쥔 셈이요, 여자는 칼날을 쥔 셈이니 남자하는 데 따라 여자에게만 상처를 줄 뿐이지. 고약한 제도야." 남자는 첩을 쌓아두고 살아도 능력남으로 추앙받지만 여자에게는 돌이 날아오는 상황에 대해 1933년 <조선일보>에 기고한 그녀의 글이다. 남편이 복수의 칼을 휘두를 때마다, 최린이 자기방어의 칼을 휘두를 때마다 그녀는 베어졌다. 그녀는 칼날을 쥐고 있으니 몸부림칠 때마다 피가 철철 흐르고 살점이 뚝뚝 떨어져 나갔다.
그녀의 자화상은 말하고 있다. 나는 인형이 아니요, 살아서 생각하고 움직이는 사람이외다. 사랑하고 흔들리고 고뇌하고 후회하는, 여자 이전에 사람이외다.
참고 자료 <나혜석, 글쓰는 여자의 탄생>(민음사), <조선여성 첫 세계 일주기>(가갸날), <나혜석 작품집>(essay), <근대인의 삶과 꿈>(호암 미술관)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시사인천에도 중복송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