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 김복득 할머니가 '전쟁 없는 하늘나라'로 가셨다. 비가 내리는 속에 김복득 할머니 '시민사회장' 영결식이 3일 경남 통영 충무실내체육관 시민분향소에서 엄수되었다.
경남도립통영노인전문병원 장례식장에서 이날 오전 발인에 이어, 운구행렬이 이곳에 도착해서 영결식이 열렸다.
영결식은 조사와 조시 낭송, '시조창' 추모 공연, 유족 인사, 헌화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송도자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 통영거제시민모임 대표는 조사를 통해 "어머니를 보내드려야 하는 오늘, 함께 울고 웃고 했던 수많은 시간이 떠오른다"고 했다.
송 대표는 "저희가 손을 내밀 때마다 어머니 당신은 늘 따뜻하게 잡아주셨다. 언제나 앞장서 나서 주셨다. 단 한번도 '안 된다'고 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앞장 서 나선 발걸음들은 수요시위와 나고야·오사카 증언집회, 국내외 수많은 언론 인터뷰, 생존 피해자 발언 등 …. 그 걸음들로 수많은 역사를 쓰셨다"고 했다.
송 대표는 "그 발자국을 따라 아이들이 길을 따라 걸어가고 있는 거 어머니는 알고 계실 것이다. 어머니께서 사랑하시는 아이들, 어른들을 부끄럽게 하는 아이들, 그 아이들이 고마워 장학기금도 내놓으셨다"며 "그 아이들이 나와 같은 아픔을 겪지 않도록 역사관도 세우라 한 푼 두 푼 모은 재산도 기꺼이 내놓으셨다"고 했다.
이어 "당신은 그런 분이셨다. 당신은 말씀도 잘하지 못하셨지만, 당신은 무얼 해야 할지 서투르셨지만, 기꺼이 나서서 새 역사를 써오셨다. 진실 그 하나로 말이다"며 "어머니의 외침, 어머니의 바람, 어머니의 발걸음, 우리 아이들이 이어가고 있다"고 덧붙였다.
조시 낭송에 이어 유족 대표가 인사를 했다. 또 시민들은 할머니 영정 앞에 헌화하며 고개를 숙였다.
김복득 할머니 시신은 통영시립화장장에서 화장한 뒤 통영 용남면 소재 두타산에 위패가 안치된다.
김복득 할머니는 1918년 통영에서 출생했고, 1939년 '취업사기'에 속아 통영 강구안항에서 배를 타고 부산을 거쳐 중국과 필리핀에서 7년간 일본군 성노예 생활을 강요 당했다.
해방 후 어렵게 고향으로 돌아온 할머니는 1994년 정부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등록을 했고, 2003년부터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 통영거제시민모임과 함께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섰다.
할머니는 나고야, 오사카 '증언집회'를 비롯해 수요집회에도 함께 하면서 줄기차게 일본의 사죄를 요구했다.
김복득 할머니는 정부생계지원금 등을 아껴 모은 돈으로 통영여자고등학교에 장학기금 2000만원, 일본군위안부역사관 건립기금 2000만원, 통영 '정의비'와 거제 '평화비' 건립기금 100만원, 유네스코기금모금운동 100만원을 기부하며 우리 사회에 큰 울림을 전하기도 했다.
김 할머니는 2013년 보행이 힘들어 요양병원에 입원해 투병생활을 해왔고, 2018년 7월 1일 새벽 숨을 거두었다. 할머니는 "그토록 기다리던 일본 정부의 진정한 사죄를 받지 못한 채" 향년 101세를 일기로 이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가 운명하자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 통영거제시민모임을 비롯한 단체들은 '시민사회장'으로 준비해 왔고, 통영시가 충무실내체육관에 시민분향소를 설치해 운영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