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맛비가 오락가락, 후텁지근한 오후다. 서늘한 숲속이 그립다. 어디로 갈까? 문득 생각나는 곳이 산속 깊은 데에 있는 암자다. 백암산 백양사에 딸린 암자 청류암으로 간다. 이름에서도 서늘함이 배어나는 작은 절집이다.
산속 암자를 생각하니, 마음이 먼저 가든가든 가뿐하다. 청류암으로 가는 길은 가인마을에서 시작된다.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에 속한다. 마을로 향하는 길도 사뭇 다르다. 백양사 매표소를 지나자마자 왼쪽으로, 흡사 '비밀의 통로' 같은 조그마한 오솔길을 따라간다.
마을에는 열댓 가구가 어우렁더우렁 살고 있다. 마을사람들은 대부분 토종벌을 기르고 있다. 그 꿀을 받아서 판다. 철따라 고로쇠 수액을 채취하고, 곶감도 깎는다. 비자나무 열매도 판다. 여행객들에게 묵을 방을 내주는 민박집도 많다. 머루와 다래, 더덕, 취나물도 마을 주변에 지천이다.
밤하늘의 별이 선사하는 감동은 여행자들의 몫이다. 마을의 끄트머리에서 나무 몇 그루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자연스레 발길이 멈춘다. 흔히 보던 비자나무가 아니다. 사계절을 수백 번은 족히 보냈을 법한 나무다.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나무의 모양새가 우람하다. 키가 십수 미터는 거뜬히 넘어 보인다. 가지도 한 그루에서 여러 갈래로 매지매지 뻗었다. 둥치에서 살짝 두 팔을 뻗어보니, 한쪽 귀퉁이에 머문다. 어른 서너 명이 두 팔을 벌려야 겨우 닿을 정도의 몸집을 지니고 있다.
나무의 껍질은 회색빛 도는 갈색이다. 마삭줄이 귀한 나무를 보살피기라도 하듯 감싸고 있다. 연한 빛깔의 이끼는 나뭇가지에서 더부살이를 하고 있다. 잎은 뾰족하다. 햇볕을 받은 양에 따라 진녹색과 연녹색으로 나뉜다. 연녹색이 새잎이다. 목재의 탄력이 좋고 무늬도 예뻐 가구나 조각작품, 바둑판 등의 재료로 많이 쓰인다.
동그마니 매달린 연둣빛 비자 열매가 반득반득 빛난다. 비자 특유의 향이 코끝을 간질인다. 열매의 생김새가 아몬드를 닮았다. 오래 전 구충제로 먹었던 비자열매다. 햇볕에 바짝 말리거나 볶으면 쌉쌀하면서도 구수한 맛이 났다. 약재로 많이 쓰였다. 식용유 같은 식물성 기름으로도 쓰인다. 비자 기름이 기침을 멎게 하고 배변에 효능이 있다고 전해진다.
백암산 자락의 비자나무는 고려시대 각진국사(1270∼1355)에 의해 심어졌을 것이다. 당시 각진국사는 구충제로 쓰이던 비자열매를 절집 주변 사람들에게 많이 나눠줬다. 비자(榧子)나무는 상록침엽수다. 잎사귀가 한자의 아닐 비(非)자처럼 생겼다고, 이름 붙었다는 설이 있다.
비자나무는 여느 산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나무가 아니다. 추위에 약한 난대성이다. 남도, 그것도 절집 주변에서 많이 자생한다. 장성 백양사와 장흥 보림사, 나주 불회사 등지에 넓게 퍼져 있다. 비자나무가 자랄 수 있는 북방 한계선이 백양사로 알려져 있다. 해발 500∼700m에서 주로 자란다. 백양사 계곡 부근과 청류암, 운문암, 약사암, 천진암 주변에서 무리지어 있다.
백양사에서는 오랫동안 산과 나무를 관장하는 산감(山監)스님을 두고 비자나무를 관리해 왔다. 덕분에 백양사 일대 71만㎡에 비자나무 7000여 그루가 분포돼 있다. 비자나무 숲도 천연기념물(제153호)로 지정됐다. 1962년의 일이다.
청류암으로 가는 숲길도 다소곳하다. 비자나무 군락이 소나무와 단풍나무, 참나무와 한데 어우러져 있다. S자로 부드럽게 휘어지는 숲길에 비자나무 낙엽이 수북하게 쌓여있다. 소들소들한 잎에서 늦가을의 서정이 묻어난다. 바위를 딛고 올라앉아 자라는 참나무에선 놀라운 생명력이 느껴진다.
인공의 냄새라곤 맡을 수 없는 천연의 숲이다. 한낮의 햇살을 한 올도 허락하지 않는다. 이렁성저렁성 걷기에 좋다. 비자나무가 내뿜는 피톤치드도 마음을 다독여준다. 걸으면서 마음껏 호흡한 비자나무의 향이 발걸음까지 위무해준다. 길섶에서 하얗게 핀 개망초 꽃은 장맛비에 젖은 마음속까지 뽀송뽀송하게 해준다.
비자나무 숲길 끝자락에서 만나는 청류암도 다소곳하다. 청류암(淸流庵)은 각진국사가 1350년에 세웠다고 전해진다. 중생의 마음을 맑은 물에 비유해 깨끗한 심성으로 선(禪)에 들라고 이름 붙였다.
갑오농민혁명 때 전봉준 장군이 피난 가며 하룻밤 묵고, 물을 마셨다는 장군샘은 서편에 있다. 관음전 앞 배롱나무는 붉은 꽃망울 만들기에 들어갔다. 비자나무 덕에 암자의 품격까지 달리 보인다. 참 좋은 비자나무이고 숲이다.
청류암과 백양사를 품은 백암산도 멋스럽다. 백암산은 바위가 희다는 데서 유래한 백학봉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 소설 속의 산 같다. 학바위는 백암산 전경을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다. 절벽 아래 백양사에서 풍경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오는 듯하다.
백양사는 백제무왕 때(632년) 지어진 절집이다. 대웅전과 극락보전, 팔층석탑이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목은 이색(1328∼1396)이 이름 붙이고, 포은 정몽주(1337∼1392)의 시로 널리 알려진 쌍계루가 연못에 비치는 풍광도 함초롬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남일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