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는 졸업하지 않는다' 이전 기사] ①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날 성추행한 선배가 말했다 ② 성추행 당한 여성 교수는 왜 대학을 나와야 했나③ 친했던 동기의 성추행, 피해자는 '잊기로 했다' 상명대에 재학 중인 주연(가명, 23세)은 올해 초 학생상담센터에 찾아갔다. 3년 전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고발하기 위해서였다.
2015년 8월, 주연이 스무 살 때였다. 당시 사귄 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았던 A와 강의실에서 <위대한 개츠비>를 보고 있었다.
영화 중반부터 스킨십이 심해졌고 A는 주연의 옷을 벗기려 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주연은 A를 밀쳤지만 통하지 않았다. 주연이 원치 않은 스킨십이었다. 그녀가 고통스러워하자 A는 행위를 멈췄다.
그녀는 화장실에 가 속옷을 확인했다. 혈흔이 묻어 있었다. 혈흔이 묻었다는 주연의 말에 A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사과했다. 사건 이후에도 그는 자신의 한 일에 책임지겠다고 했다. 주연은 A를 믿었다.
"남자친구니까 그 정도의 사과면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남자친구였는데... 누가 믿어줄까?' 숨겨왔지만하지만 2주 후 A는 돌연 그녀에게 헤어지자고 통보했다. 전 여자친구를 잊지 못했다는 이유였다. 주연은 사귄 지 3주 만에 A와 헤어졌다.
주연은 A를 계속 마주쳐야 했다. 같은 수업을 듣거나 복도에서 마주칠 때면 지난 일이 떠올랐다. 결국 주연은 2016년 1학기에 휴학을 결정했다.
3년 후인 2018년 3월, 주연은 우연히 교내에 있는 학생상담센터의 존재를 알게 됐다. 센터를 통해 단톡방 성희롱 사건을 해결한 동기의 소개가 있었다.
그녀는 '누가 믿어줄까?'라는 의구심에 피해 사실을 숨겨왔다. 센터의 도움을 받는다면 자신이 겪은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3월 27일 교내 학생상담센터를 찾은 주연은 A의 행위를 강간으로 신고했다. A는 성기가 아닌 손가락을 삽입했다고 주장했다. 바로 다음날 A는 주연을 스토킹 사유로 센터에 신고했다. 학교 내 자신이 지내는 공간에 지속해서 찾아왔다는 게 이유였다.
이후 사건은 양성평등센터로 넘어갔다. 열흘 후인 2018년 4월 9일, 양성평등센터는 두 개의 신고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조사위원회를 열었다. 조사 대상은 가해자, 피해자 그리고 둘의 증언을 뒷받침해줄 각각의 증인 3명이었다.
징계 결과는 한 달 뒤에 발표됐다. 양성평등센터는 성기 삽입이 아닌 손가락 삽입이라는 A의 주장을 인정해 '유사 강간'으로 2주 유기 정학 처분을 내렸다. A가 주장한 스토킹은 증거불충분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제297조의2(유사강간)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에 대하여 구강, 항문 등 신체(성기는 제외한다)의 내부에 성기를 넣거나 성기, 항문에 손가락 등 신체(성기는 제외한다)의 일부 또는 도구를 넣는 행위를 한 사람은 2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형법」 제32장 강간과 추행의 죄
주연은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A가 받은 징계 수위가 자신이 느낀 고통에 준하지 못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더 불쾌한 지점이 있었다. 양성평등센터의 조사 과정에서 그녀가 겪은 일 때문이다.
"너는 왜 그러지 않았니"라고 묻던 사람들조사위원회가 처음 열린 4월 8일, 한 조사위원은 주연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데 너는 왜 그러지 않았냐."끝이 아니었다. 또 다른 조사위원도 주연에게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조사위원 : "어떤 사례에서는 억지로 키스할 때 입술을 물어뜯은 사람도 있었는데, 이거를 어떻게 생각하나?" 주연 : "그러면 제가 그렇게 해야 했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조사위원 : "아니 그냥" 두 발언 모두 '피해자의 저항이 있어야 했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주연은 자신의 피해 상황을 의심하는 듯한 발언에 분노했다. 조사위원회는 자신들이 한 질문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듯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행동은 없었다.
실제 '피해자의 저항 여부'로 성폭력 사건을 판단하려는 문제는 조사 과정에서 빈번하게 발생한다.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가 발표한 '성폭력 피해자 수사,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의 인권을 침해한 사례'에 따르면 "옆방의 오빠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나?", "허리 돌려 저항하면 성관계 막을 수 있지 않나?", 등의 발언이 조사 과정에서 서슴지 않고 이뤄졌다.
이러한 발언은 피해자의 적극적인 저항 여부로 성폭력을 판단하는 가부장적 통념 때문이다. 강간의 책임을 여성에게 돌리는 통념으로 인해 저항하지 않는 피해자를 탓하게 된다. 그러나 전문가와 학계는 이미 오래전부터 강간죄 입증을 위해 피해자의 저항 여부를 확인하는 한국의 법을 비판해왔다.
'강간에 대한 가부장적 통념'
2. 여성이 저항하는 한 강간은 매우 어렵다.
3. 여성의 거부 의사는 진짜 거부가 아닐 수도 있다 진정한 거부인지 가장된 거부인지는 말이 아니라 강력한 항거를 통해 비로소 알 수 있다.
4. 따라서 여성이 온 힘을 다해 완강하게 저항했지만, 남성이 그 저항을 물리적 심리적으로 제압했을 때 강간의 범죄가 성립한다.
한인섭, <성폭력 조장하는 대법원 판례바꾸기 운동> 중에서
저는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주연은 조사과정에서 입었던 '2차 피해'에 대해 사과받고 싶었다. 그러나 양성평등센터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양성평등센터는 조사 과정에서 관련 발언이 오간 것에 대해선 인정했지만, 2차 피해였다는 부분엔 동의하지 않았다고 주연은 말했다.
"양성평등센터 담당자는 자신들이 4월 8일 속기록을 확인해보니 '2차 가해가 아니었고 단지 예를 들어서 설명한 거였다'고 해요. 하지만 저는 제 사건과 달리 저항의 강도가 높은 사례를 들며 제 생각을 묻는 것이 2차 가해로 느껴졌어요. 그런데 그 담당자는 그렇게 느꼈으면 유감이래요. 2차 가해로 받아들인 제 잘못이라는 식으로 들렸어요."사건 파악을 위해 질문했다고 하더라도 부적절한 표현으로 피해자의 인권을 침해하거나 피해자를 위축시켰다면 제대로 된 사과가 있어야 한다.
주연은 양성평등센터에 4월 8일 조사위원회의 속기록을 공개하라고 요구했다. 자신이 받았던 2차 피해를 입증하기 위해서였다. 당사자인 자신이 보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양성평등센터는 그녀의 요청을 거절했다. 시행세칙 제2조 3항과 제5조 3항에 근거해 공개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제2조 (사건관련자 보호) ③ 사건 처리를 위한 제반 절차는 공개하지 아니함을 원칙으로 한다.
제5조 (비밀유지의 의무)③ 사건당사자가 사건에 대한 자료 열람을 요청한 경우, 관계 법령을 위반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에 응할 수 있다. 단, 사건관련자의 보호가 필요한 경우와 사건 처리에 지장을 줄 우려가 있는 경우, 그 밖의 관계 법령에 따라 공개하지 않을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열람의 범위를 제한하거나 열람을 불허할 수 있다.
상명대학교 '성희롱 및 성폭력 예방과 처리에 관한 규정' 시행세칙 중에서
주연은 양성평등센터의 주장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2018년 5월 18일에 센터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당시 센터 직원은 센터장, 총장과 함께 속기록을 확인했다고 했다. 학교 관계자들은 속기록을 확인했지만, 당사자인 자신은 열람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주연은 센터의 태도에 막막해졌다.
그녀는 지금도 속기록 공개를 요청하고 있다.
보호받지 못하는 피해자들성폭력 전담기구의 존재 이유는 피해자 구제다. 하지만 이를 지원하기보다는 사건을 조용히 마무리하려 하는 곳이 많다. 대학 내 성폭력 전담기구는 왜 피해자 보호를 최우선으로 지키지 못하는 걸까. 이유는 분명하다. 구조적으로 2가지의 문제를 꼽을 수 있다.
첫째, 전문성 결여다. 전담인력이 부족하다. 2012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조사한 대학교 성희롱·성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학내 상담기구에 전담인력을 배정한 경우는 전체 대학의 약 7%로 그쳤다. 나머지는 상담업무와 일반 행정을 병행하고 있어 성폭력 상담에 집중하기 어렵다.
상담전담인력의 대부분이 계약직 형태로 고용된 점도 문제다. 2015년 한국대학성평등상담소협의회가 전국 95개 대학의 성폭력 전담기구 상담원을 설문조사한 결과, 상담기구 종사자의 53.7%는 기간제 계약직이었다. 한 마디로 성폭력 전담기구가 실무 능력을 축적하기 어려운 구조다. 사건 처리 과정에서 비슷한 문제가 반복되는 경우도 이 때문이다.
센터장의 전문성을 검증하는 절차도 필요하다. 대체로 센터장은 교수가 맡는다. 경북대에서는 대학원생을 상습 성추행한 교수가 2016년 성폭력상담소장(현 인권센터)을 맡았다는 사실이 지난 4월에 밝혀졌다. 성폭력상담소장 임명이 별도의 자격이나 검증 절차가 없는 보직이라는 걸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둘째, 독립성 문제다. 센터장 임명 문제는 성폭력 전담기구의 독립성으로 이어진다. 상담소 직원도 같은 교수이기 때문에 동료 교수가 가해자로 조사를 받을 경우에는 입장이 더욱 난처해진다. 이는 성폭력 전담기구가 교수의 입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암시한다.
"학교에서 남자 교수님들은 (우리 센터를) 너무 불안해하시고 싫어하세요. (우리 센터는) 공공의 적이에요. 오늘 아침에도 직원 한 분이 그 주변에서 압력받는 게 힘드시다고 그만두겠다고 했어요(B대학 성폭력전담기구 담당자)."교육부는 지난 5월 30일 '대학 성폭력 근절을 위한 제도 개선 권고'를 제시했다. 동료 교수 등 내부자 위주로 위원회가 구성될 경우, 조사·심의 및 징계 과정에서 사안의 공정한 처리를 저해할 우려가 있음을 지적했다.
○ 심의·조사위원회 구성 시 교직원, 학생 및 외부위원을 참여시키고, 위원 성별을 균형 있게 구성한다.
○ 성폭력 사안 관련 징계위원회 구성 시 관련 분야 전문성을 갖춘 외부위원(성폭력 전담 국선변호사 등)을 반드시 포함하고, 위원 성별을 균형 있게 구성한다.
교육부 <대학 성폭력 근절을 위한 제도 개선 권고> 중에서
성폭력 전담기구 독립화는 필수적이다. 센터는 학생이 가장 먼저 도움을 요청하는 곳이며, 사건을 최초로 인지하고 조사하는 과정을 담당한다. 성폭력 전담기구가 어떻게 조치하는지에 따라 이후에 진행될 사법절차도 영향을 받는다.
현재 성폭력 전담기구의 역할은 학교마다 천차만별이다. 센터장의 의지나 전문성에 따라 사건 진행이 원활하게 이뤄지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그러나 대학 내 성폭력 문제는 결정권자의 선의에 맡길 수 없다. 제도적으로 명확히 정비돼야 한다.
대학 내 성폭력은 '대학 내에서 발생'했을 뿐, 엄연한 범죄다. 국가에겐 피해자 구제를 지원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동안 대학 내 성폭력을 묻고, 감추게 만든 시스템이 존재했다. 성폭력 전담기구를 대학 본부에 맡길 수 없는 이유다.
학교 울타리 밖으로 나와야 하는 건 학생이 아닌 성폭력 상담기구다.
"학교의 기관이 학생들을 위해 존재하는 기관임을 잊지 않길 바랍니다(주연이 작성한 대자보 중에서)."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다음카카오 스토리펀딩 <미투는 졸업하지 않는다> https://storyfunding.kakao.com/project/19633 5화 연재 기사로 올라간 바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