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려 비가 축축
하늘에서 비가 축축
비가 내려 비가 축축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걸까
비가 내려 비가 축축
하늘에서 비가 축축
비가 내려 비가 축축
하늘 위 구름이라도 우는걸까
- 아마도 이자람 밴드 <비가 축축> 노랫말 중에서
혼자 타박타박 걸어다니는 배낭여행을 남들이 보면 세상에 없는 한량이고 신선놀음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그렇게 한가하게 보내는 날은 거의 없다. 여기까지 날아온 비행기 티켓값과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쌓여가는 숙박비를 생각하면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도 '하나라도 더 보고 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주섬주섬 점심 도시락을 챙기고, 물을 가득 채워 가방에 넣고 숙소를 나선다.
숙소에 돌아와서는 길을 걸으며 틈틈이 메모한 것들을 펼쳐 놓고 일기도 쓰고 사진도 정리해야 한다. 그 동안 여행하면서 찍은 사진이 7만 9000장 정도 되는데 사진들을 그때그때 정리하지 않으면 사진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된다. 사진 찍는 기술이 없으니까 자꾸 많이 찍게 되는 것이 물론 첫 번째 문제다.
그래서 컨디션이 안 좋거나 몸이 피곤할 때는 '비가 좀 오면 좋겠다' 싶었다. 비가 오면 그 비를 핑계로 마음에 쌓인 짐을 좀 내려놓고 그날은 푹 쉴 수 있으니까. 뉴욕에 있는 동안 내 마음도 모르는 비는 언제나 오후부터 밤까지 왔다. 구름이 얄미웠다.
그러던 어느날 드디어 아침부터 비가 왔다. 오늘이다 싶어서 하루 푹 쉬어야지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마음일 뿐이고 비가 오는 날에는 미술관에 가야했다.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닌데 배낭을 주섬주섬 꾸린다. 그래도 미술관에 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또 설렌다. 이 설렘 때문에 늘 여행을 꿈꾸는 것이겠지.
뉴욕에 있는 동안 뉴욕현대미술관에 네 번 갔었다. 두 번은 티켓을 사서 들어갔고, 두 번은 금요일 무료 입장을 이용했다. 지금부터 뉴욕현대미술관 가이드북 중 '시간이 1시간 밖에 없을 경우'라는 항목에 소개된, MoMA가 내세우는 가장 중요한 작품만 모아서 다섯 번째 미술관 산책을 시작해보자.
<Bell-47D1 Helicopter> Arthur Young 1945
지금까지 미술관을 다니면서 실내에 헬리콥터 매달려 있는 것은 처음 봤다. 입구에 들어서면 머리 위에 떠 있는 헬기를 보면서 역시 현대 예술은 난해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벨-47D1은 예술품이 아니라 미국에서 민간용으로 허가받은 최초의 헬리콥터였다. 1945년에 이 헬리콥터를 설계한 아서 영은 발명가이면서 시인 겸 미술가였다. 그래서인지 헬리콥터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풍기는 촌스러움 없이 외관이 미끈하고 예뻤다.
MoMA는 예술가들의 작품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실제로 사용했던 물건들도 수집해서 전시하고 있다고 했다. 디자인이라는 것이 우리의 일상과 유리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대중들에게 알리기 위함이라고 한다.
<별이 빛나는 밤> 빈센트 반 고흐 1889
MoMA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을 하나만 꼽으라면 이 작품일 것이다. 루브르 박물관의 문이 열리면 관람객들이 모나리자를 향해서 달려가듯이 여기서는 모두들 5층에 걸린 <별이 빛나는 밤>을 향해 달려간다. 사람들은 왜 빈센트의 작품을 이토록 좋아하는 것일까? 그 중에서도 특히 이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뭘까?
큐레이터 조아킴 피사로는 "이 작품은 정적인 프레임 안에 있으면서도 끊임 없이 움직이면서 스스로를 새롭게 하는 동적인 그림입니다"라고 했다. 너무 거창한 설명인가 싶겠지만, 실제로 빈센트의 그림을 보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모니터나 전시 도록에 실린 그림에서는 빈센트 특유의 양감이 보이지 않지만 미술관에서 직접 빈센트의 작품을 보면 그 선명한 붓자국이 보내는 광채가 선명하다. 특히 <별이 빛나는 밤>은 전경의 측백 나무 뒤에 펼쳐진 밤 하늘의 별들이 정말로 흐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분명 빈센트의 눈에도 그 별빛들은 그렇게 흐르고 있었을 것이다.
빈센트는 이 작품을 생-레미 정신병원의 2층 병실에서 밤새도록 밤하늘을 눈으로 쳐다보고 아침에 1층 작업실로 내려와 간밤에 본 장면을 캔버스에 그대로 그려서 완성했다(동생 테오가 빈센트를 위해 병실 두 개의 비용을 냈다). 직접 보지 않고 그렸다는 것도 대단하지만 그의 작품 어디에서도 낮의 기운은 없었다. <별이 빛나는 밤> 속에서는 그믐달이 떠 있고 샛별이 반짝이는 그 여름의 새벽날에 불었을 서늘한 바람이 계속해서 불어 나왔다.
<아비뇽의 여인들> 파블로 피카소 1907
"휘발유를 들이킨 다음, 입으로 불을 뿜어내는 사람을 볼 때처럼 위협을 느꼈다."피카소가 1년을 두문불출하며 그린 이 그림에 대해서 유일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조르주 브라크가 처음 이 작품을 보고 했던 말이다. 이 말은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 했던 평가 중에서 가장 호의적인 표현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피카소가 드디어 '진짜로' 미쳤다고 생각했다. 젊은 피카소가 거장이 될 수 있게 도와준 후원자 거트루드 스타인도 '헐...' 했다. 자존심이 상한 피카소가 한동안 제목도 붙이지 않고 작업실에 처박아 놓았던 작품이 이제는 피카소의 상징이자 현대미술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작품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두고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의 알레고리'라는 알프레드 바의 해석과 '철학적 매음굴'이라 표현한 레오 스타인버그의 해석이 분분하다. 어느 쪽이든 혹은 그 무엇도 아니든 그건 관객들이 몫이다. 나는 다만 폴 세잔이 평생을 통해 이끌고 온 회화의 경지를 단 하나의 작품으로 흡수하여 단숨에 자신만의 브랜드로 만들어버린 그의 능력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가만히 서서 한참을 바라보니 나보다 훨씬 키가 큰 작품 속의 여인들이 나와 눈을 맞춘 채 불쑥 그림 밖으로 걸어나올 것만 같았다. 우리가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 여인들은 피카소가 이 엄청난 작품을 그릴 때 가졌던 대중을 향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붉은 작업실> 앙리 마티스 1911
툴루즈 로트렉과 앙리 마티스의 작품을 보면 이상하게 마음 한쪽에 찝찝한 느낌이 든다. 활동 시기는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화풍인 두 사람이 내게는 '응가하다가 중간에 끊고 나온 느낌'이란 공통점 때문에 항상 묶어서 떠오른다. 그리고 어느 미술관이나 그들은 항상 같은 전시실에 있다. 그래서 눈에 더 띈다. 이 작품은 마티스의 작품들 중에서 그나마 그 느낌이 가장 덜한 작품 중에 하나다.
이 작품은 마티스의 개인 회고전과 다름 없다. 야수파라는 이름답게 작업실 안에 흐르는 숨막히는 에너지를 표현하기 위해 벽 전체를 붉은색으로 가득 채워 놓았다. 그리고 붉은색이 아닌 것들은 모두 마티스 자신의 작품들이거나 그의 작품과 관련된 것들이다. 전경에 있는 접시는 실제로 같은 전시실에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그림을 그리는 크레파스와 마티스의 풍경화, 인물화 그리고 하얀색 조각상도 보인다. 방 전체를 붉게 칠해서 2차원 평면 같은 느낌이지만 바닥에 그어 놓은 단 두 개의 선으로 공간감도 만들어 내는 그의 능력이 놀랍다.
<브로드웨이 부기우기> 피에트 몬드리안 1942
이 작품을 처음 책에서 보았을 때 피식 웃음이 났었다. 우리가 피에트 몬드리안하면 떠올리는 그 컴포지션 작품들은 1차 세계대전 이후 벌어진 네덜란드의 '데 스테일(De Stijl)' 운동의 일환이다. 수직선과 수평선, 삼원색과 삼무색만으로 예술을 통해 견고한 유토피아를 꿈꿨던 사람은 몬드리안 뿐만이 아니었다. 몬드리안과 함께 데 스테일 운동을 이끌었던 테오 반 두스부르흐(Theo van Doesburg) 역시 몬드리안과 비슷한 작품을 만들었었다.
그러다가 두 사람이 갈등을 겪는데 이유는 두스부르흐가 데 스테일 운동에 '대각선'이라는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이었다. 몬드리안은 대각선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서 두스부르흐와 결별을 선언했다. 그리고 데 스테일 운동도 현실의 벽에 부딪혀 끝이 난다. 1차 세계대전 직후에 피에트 몬드리안과 젊은 전위 예술 그룹은 그만큼 간절했고 처절했기 때문에 더욱 철저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런 몬드리안이 데 스테일의 기법을 사용해서 <브로드웨이 부기우기>라는 작품을 발표했다. 부기우기는 소비와 향락의 중심인 뉴욕 브로드웨이의 재즈클럽을 의미한다. 작품이 발표된 1942년은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시기로 전세계가 전쟁 속에서 허덕이는 동안 미국이 세계의 군수공장이 되어 엄청난 경제 성장을 이루고 있던 해다. 몬드리안은 위대한 콜렉터 페기 구겐하임 덕분에 전쟁에 폐허가 된 유럽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올 수 있었다.
<브로드웨이 부기우기>는 전형적인 추상화지만 작품 제목 덕분에 브로드웨이의 화려한 네온사인과 경쾌한 재즈 음악 그리고 교차로를 건너는 인파를 떠올리는 것이 어렵지만은 않다. 젊어서는 대각선도 참지 않으셨던 몬드리안 할아버지도 나이가 드니까 좋은 게 좋다고 뉴욕을 참 좋아하셨나보다. 참, 2년 후에 발표하는 <빅토리 부기우기>에서는 어찌나 좋았는지 캔버스를 45도 돌려서 마름모를 만들었다. 즉 그의 작품 속에 대각선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봄여름가을겨울의 노래가 떠오른다.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봐. 그래 나도 변했으니까.'
<수련 3부작> 클로드 모네 1914-1926
젊어서 꽤 고생한 모네는 엄청난 부자가 된 후 자신만의 일본식 정원을 만들어 말년을 수련만 그리면서 보냈다고 한다. 연못 앞에서 멋진 정장을 차려입고 시가를 피우며 그림을 그리는 모네의 모습을 담은 흑백 영상을 보면 나는 항상 카미유가 떠올랐다. 저 풍경 속에, 저 다리 위에 카미유가 양산을 펼쳐 들고 아들 장과 함께 걸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번에는 장이 엄마보다 키가 훨씬 더 큰 청년의 모습이었겠지. 카미유 이야기는 또 할 기회가 있을테니 이번에는 수련에만 집중하자.
수련 연작은 매우 큰 그림이다. 모네는 죽기 10년 전부터 스스로 '그랜드 컬렉션'이라고 이름 지은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 지하에 있는 거대한 수련 연작들도 같은 연장선이다. 모네의 수련은 감상할 때 앞으로 다가갔다가 뒤로 물러섰다가 하면 참 재미있다.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도 그림의 형채가 사라지고 뒤로 조금만 물러서면 어느 사이엔가 수련이 제 모습을 찾는다.
그런데 수련을 그리던 순간의 모네를 떠올려보면 또 마음 한구석이 아려온다. 말년의 모네는 백내장 때문에 시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평생 빛을 따라다니며 그림을 그렸던 모네인데, 그 빛이 조금씩 자신을 떠나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모네의 수련들은 모두 지금 눈앞에 보이는 이 풍경이 내일은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그래서 더욱 간절했던 그의 마음이 그려낸 작품이다. 내가 다시 뉴욕에 와서 또 모네를 마주할 일이 있을까? 나도 간절한 마음으로 모네의 수련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기자의 블로그 '타박타박 아홉걸음(http://ninesteps.tistory.com)'에도 동시에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