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에게 일어난 전쟁과 학살, 재난과 재해 등 비극적인 현장을 돌아보며 희생자를 추모하고 같은 일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배우고 교훈하는 여행을 다크투어리즘 혹은 블랙투어리즘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장소로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뉴욕의 그라운드 제로, 중국 난징 대학살기념관, 캄보디아 킬링필드 등이 있으며 국내에는 제주 4.3 유적지나 광주 5.18민주묘지,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등이 여기에 포함될 것이다.
1980년 중반에 개봉된 롤랑 조페 감독의 영화 <킬링필드>를 기억한다. <굿모닝 베트남>이나 <지옥의 묵시록>과 같은 강렬한 작품들이 개봉되던 시기라 기자의 눈으로 전쟁을 그려낸 <킬링필드>는 그다지 기억에 남는 작품은 아니었다.
한국 동란을 소재로 한 영화 속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보았기에 우리와 비슷한 역사가 있었구나 정도로 공감했다. 다만 마지막에 주인공인 시드니 쉔버그(뉴욕타임스 기자)와 통역관이었던 디스프란이 만나는 장면에 삽입된 존 레논의 'Imagine'(이매진)이 오랫동안 귓가에 맴돌았던 것 같다.
프놈펜에서 차로 1시간 거리에 우리가 흔히 '킬링필드'라고 부르는 쯩아익에 집단학살 센터(choeung ek genocidal center)가 있다. 1만7000여명이 집단 매장되어 있는 쯩아익은 캄보디아 전역에 흩어져 있는 2만 여개의 집단 매장지 중 프놈펜에서 가장 가까운 장소라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이어지는 곳이다.
어깨 들썩이며 흐느끼는 파란 눈의 소녀
차에서 내리자마자 '원 달러'를 외치는 작은 손들이 달려든다. 허겁지겁 1달러짜리를 꺼내 주던 처음과 달리 며칠이 지나니 아이들의 외침과 눈빛에 익숙해져 무심한 듯 지나치는 용기도 생긴다.
그렇게 아이들이 내미는 손들을 피해 지나다 문득 땅바닥에 주저앉은 한 남자 앞에서 굳어버렸다. 캄보디아 내전 때 묻어 둔 지뢰에 한 쪽 다리를 잃은 남자였다. 그가 내민 거친 손과 붉게 충혈된 눈이 가슴에 와 박힌다. 아, 어쩌란 말인가. 전쟁은 끝나고 평화가 왔지만 이 땅의 비극은 여전히 진행형이었다.
쯩아익 '킬링필드'에서는 가이드가 필요하지 않다. 각 나라 말로 나오는 오디오 가이드가 있어서 번호만 누르면 설명이 나오기 때문이다. 오디오 가이드의 효과는 생각보다 컸다. 별다른 건축물이나 유물을 남겨 두지 않아 공터나 다름없어 보이는 곳이지만 각 지점마다 그 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설명을 듣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50여 년 전 그 땅에서 벌어진 잔혹한 학살극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슬프고 굳은 얼굴로 조용히 오디오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관람객들 사이사이에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는 모습도 보인다. 걸음을 멈추고 벤치에 앉아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는 파란 눈의 소녀에게서 오랫동안 눈길을 떼지 못했다.
행렬을 따라 걷다 보면 마음으로 공감하고 진심으로 추모하는 그들을 느낄 수 있다. 대화를 나누거나 소란스럽게 이야기 하는 사람도 없고 뛰거나 웃는 사람도 없다. 그저 조용히 걸으며 눈물과 기도로 희생자들을 추모할 뿐이다.
인간의 잔혹함은 어디까지 일까
쯩아익 집단 학살센터는 아이들과 여성 희생자들이 많다. 72시간 안에 도심을 비우라는 폴포트의 강제이주 명령에 따라 시골로 내려가야 했던 사람들. 그 중에는 이동이 쉽지 않은 여성들과 노인들 그리고 아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가족을 인정하지 않았던 크메르루즈군들은 자식이 보는 앞에서 엄마를 강간 살해하고 엄마 앞에서 아기를 나무에 던져 죽였다. 하늘에 닿을 듯 높고 큰 나무 킬링트리. 아기의 두발을 잡고 휘둘러 머리를 깨뜨려 죽인 나무다. 허연 뇌수와 붉은 피로 얼룩졌던 나무가 지금은 추모객들이 걸어 두고 간 팔찌로 알록달록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이보다 슬픈 나무가 또 있을까.
인간의 잔혹함은 어디까지 일까. 총알이 아깝다는 이유로 몽둥이로 머리를 쳐 죽이고 날카로운 야자 잎으로 목을 베었다. 자백을 받기 위해 드릴로 머리를 뚫는 고문도 했다. 그것도 귀찮으면 구덩이를 파고 산채로 사람을 매장했다.
그렇게 살해 당한 희생자가 당시 인구의 3분의 1에 가까운 200만에 이른다니 광기의 살육이 아니고 무엇일까 싶다. 더욱 소름끼치는 것은 그런 살육을 베트남 전으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10대의 어린 아이들에게 맡겼다는 것이다. 혹시라도 훗날 이들이 성장해 학살의 책임을 묻게 될 것이 두려워 목격자가 아닌 공범을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리 크지 않은 집단학살센터 투어의 마지막은 유골이 가득한 추모탑이다. 1975년 4월 17일. 폴포트와 크메르루즈군이 프놈펜을 함락함과 동시에 시작된 집단 학살을 기억하기 위해 17층 규모로 지어진 이 탑에는 1만 여구의 유골이 나이, 성별, 사망원인 등으로 분류 보관되어 있다.
기념관 내부를 걷다 보면 곳곳에서 흙위로 드러난 사람의 뼈와 아직 썩지 않은 옷가지들을 볼 수 있다. 이 같은 집단 매장지가 확인된 것만 2만여 개에 이른다니 부모와 조부모 형제와 자매의 억울한 죽음 위에서 삶을 시작해야 했던 이들의 가난과 슬픔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우리에게도 쯩아익 킬링필드와 다르지 않은 유적지가 있다. 제주 4.3과 광주민주화 항쟁 관련 유적지, 서대문 형무소, 최근에 영화로 알려지게 된 군함도 등등이 아픔과 슬픔을 가진 다크투어리즘의 장소일 것이다.
우린 그런 뜻 깊은 역사의 현장을 효과적으로 알리고 있는 것일까. 아쉽지만 그러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들에게까지 설명하고 추모하며 기억하게 할 좀 더 많은 장치들이 동원된다면 그곳을 찾는 관광객들에게는 오랫동안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교훈과 감동의 장소가 되지 않을까.
그와 더불어 폴포트 정권에서 저질러진 학살에 대해 최근까지 책임을 묻고 있는 유엔크메르루즈 전범특별재판소(ECCC : Extraordinary Chamber in the Courts of Cambodia)와 같이 책임자를 찾아 처벌하는 노력도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진정한 교훈이며 다음 세대에 같은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하는 최소한의 노력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지난 7월8일부터 13일까지 캄보디아에 다녀왔습니다.